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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년동안 <국희> <은실이> <거지왕초> 등 해방 이후부터 80년대 사이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이 모두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볼 만한 드라마'로 평가받자 비슷비슷한 시대극들이 끊이지 않는다.

올들어 SBS는 창사 10주년 기획드라마로 <덕이>를 선택했고, KBS도 주말연속극의 부흥을 노리며 <꼭지>로 맞섰다. 이에 뒤질세라 MBC도 오는 11월부터 <황금시대>(가제)를 선보일 계획이다.

KBS의 아침드라마 <민들레>와 <송화>도 모두 비슷한 시대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이다. KBS의 <개그콘서트>에 밀려 고전하던 MBC 코미디 프로그램의 자존심을 세워준 것이 70년대를 배경으로 한 '돌아온 울엄마'라는 점도 시대극의 인기를 반증한다.

시대극들은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에 대한 아련한 향수를 자극하며 가족애를 중심으로 한 주요 인물설정이 청장년층에게 쉽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역경을 딛고 일어선 주인공의 감동적인 성공 스토리가 극적 재미를 준다.

잊혀져 가는 당시의 생활풍습을 재현한 자잘한 볼거리들로 시청자의 눈을 사로잡을 수 있는 장점도 있다. 게다가 간간이 등장하는 시대상을 반영한 에피소드를 통해 굴절 많았던 우리 현대사가 개개인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쳐왔는지를 엿보는 의미도 더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시청률 상위에 올라 있는 시대극들이 이런 미덕을 고루 갖추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현재 방송되고 있는 시대극들은 대부분 멜로 드라마의 성격만 강할 뿐 배경이 된 시대를 반영한 시대사를 다루는 데는 별반 관심이 없다. 8살 소녀를 화자로 송씨일가 가족사를 보여주고 있는 <꼭지>의 경우 70년대를 배경으로 한 4남자의 사랑이야기가 중심이다.

'유신' 선생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학교에서 쫒겨나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는 큰아들 지태는 철없는 아내를 보살피는 다정다감한 남편의 모습에 비중이 놓여 있고, 야심만만한 둘째아들 현태의 야망과 헌신적인 사랑을 보여주는 아내와 정희 사이의 미묘한 삼각관계가 한축을 이루며 문제아지만 인간적인 정이 넘치는 막내아들 명태가 8살 연상의 여인을 해바라기하는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또 한축을 이룬다.

가장인 송만호도 제주4.3항쟁에 참여한 전력으로 고초를 겪었다고는 하나 이루지 못한 첫사랑에 대한 한이 더 많은 사람이다. 사상문제로 2대째 핍박을 받고 있는 모습은 형제간 갈등을 부각하는 양념정도에 그칠 뿐이다.

전형적인 '콩쥐팥쥐' 구도를 통해 착한 마음으로 고난과 역경을 헤쳐나가는 질곡많은 여인의 삶을 보여준다는 <덕이> 역시 초반에는 빨치산의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키고 그 시대를 추억할 수 있는 다양한 캐릭터를 통해 60-70년대 서민들의 생활모습을 비중있게 재현해 보는 재미를 더했으나 귀진이와 귀덕이 성장하면서 귀진을 둘러싼 남자들의 사랑이야기로 빠지고 있다.

아침드라마 <민들레>와 <송화>의 경우는 등장인물들의 의상에서나 간신히 시대배경을 유추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도 시대극이 인기를 얻고 있는 이유는 '현실에선 불가능한' 성공 스토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가난하지만 착하고 성실한 주인공이 온갖 시련을 참고 견디며 꾸준히 노력한 결과 성공에 이른다는 드라마의 기본골격이 시청자들의 대리만족 심리를 자극한다.

현대물에서는 사기극으로나 가능(MBC <뜨거운 것이 좋아>)한 주인공의 성공이야기가 20-30년전 과거에는 가능했던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게다가 굶기를 밥먹듯이 했던 어려웠던 시절을 돌이켜 보면서 '저렇게 어려웠던 시절을 지나왔는데 IMF가 대수며 전세값이 문젠가. 적어도 밥은 굶지 않잖아' 라고 자신을 타이르기도 좋지 않은가.

순종적이고 헌신적인 '착한 여자'가 주변의 시기를 견디고 왕자님의 구원의 손길을 받게 된다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이야기'도 인기요인이다. 자기주장 뚜렷하고 성취욕 강한 여자는 욕심 많고 이기적인 '악녀'로 몰아부치는 것도 가능하다.

이처럼 TV 드라마로 보여지는 시대극들은 전통적인 가치관을 교훈으로 삼고, 시련을 딛고 일어서는 주인공의 '일과 사랑'에서의 성공 스토리가 전부이다. 사람들의 삶을 어렵고 힘들게 했던 당시의 정치, 사회적인 상황은 안중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 시절에 대한 향수에 젖어 시대극에 빠져들다 보면 자칫 현실과는 동떨어진 구시대적 가치관에 젖어들지도 모른다.

21세기를 시작하는 이때, 왜 하필 시대극이 유행인가 생각해 볼일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부경대신문에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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