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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거의 20년 전에 신영복 선생님의 <더불어 숲>(신영복의 세계여행)을 처음 접했습니다.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문명과 사람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긴 따뜻한 글과 그림엽서. 20대 초반의 대학생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갖는데 큰 영향을 받았음은 물론이며 그 감동으로 막연하게 세계 일주에 대한 꿈도 품게 됐습니다. 인생의 반환점에 이르렀다고 생각되는 2017년, 배낭여행자가 되어 그 꿈을 실행에 옮깁니다. 당신이 보낸 첫 번째 엽서에 적혀있던 '언젠가 나는 당신의 답장을 읽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는 문구에 무모한 용기를 얻어 여행지에서 편지를 띄웁니다. 이 여행기는 당신 그리고 또 다른 수많은 당신들과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 기자 말

천안문 성루에 올라서 바라본 광장의 모습
 천안문 성루에 올라서 바라본 광장의 모습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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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을 꺼내 오늘이 평일이 맞는지 요일을 다시 확인해야 했습니다. 비단 베이징뿐만 아니라 여행했던 시안, 장가계, 상하이의 주요 관광지는 늘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많은 인파 중에서 외국인들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깃발을 기준으로 줄지어 늘어선 단체관광객 특유의 대열은 내국인들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평일이 이 정도이니 휴일이나 말로만 듣던 국경절 같은 연휴기간에는 어느 정도일까에 생각이 미쳤습니다. 중국의 상상할 수 없는 인구와 거대한 내수시장을 단편적을 보여주는 풍경이기도 했습니다.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는 나라의 횡단보도를 건널 때에는 익숙했던 방향의 반대쪽에서 자동차가 오기 때문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나 중국은 우리와 같은 도로교통 체계임에도 불구하고, 길을 건널 때 반드시 좌우를 살피고 또 살펴야 했습니다. 파란불에도 아랑곳없이 빠른 속도로 밀고 들어오는 차는 위협적이었습니다.

물론 차를 운전하게 된다면 반대로 불쑥 차도로 뛰어드는 사람을 주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거리에서 침 뱉기, 버스와 지하철을 탈 때 큰 의미가 없는 줄서기, 조금만 방심하면 밀고 들어오는 새치기. 이러한 중국의 카오스적인 질서는 사실 익히 알려진 정보이기에 크게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질서의식 있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 보다 훨씬 많다는 면에서 부정적인 점을 굳이 부각시켜 볼 필요도 없었습니다.

눈길을 끈 자전거와 오토바이 그리고 휴대폰

정작 눈길을 끄는 것은 자전거와 오토바이와 휴대폰에 있었습니다.

중국의 주요 도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공유자전거 풍경.  이제 중국에서 자전거는 소유물이 아니라 필요할 때 잠시 이용하는 공유물로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중국의 주요 도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공유자전거 풍경. 이제 중국에서 자전거는 소유물이 아니라 필요할 때 잠시 이용하는 공유물로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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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여행 중 가장 많이 눈에 띈 광고는 배우 박보검을 닮은 모델이 자전거를 타는 광고였습니다. 처음에는 '웬 자전거 선전을 이렇게 하나? 자전거가 이렇게 많은 홍보비를 들일 만한 제품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은 대표적인 공유자전거 업체의 광고였습니다. 90년대 초반 개혁개방 당시, 천안문 주변을 가득 메운 자전거 행렬은 중국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모습 중의 하나였습니다. 이제 다시 자전거는 변화한 중국의 새로운 이미지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바로 공유경제의 혁신적인 모델로 말입니다.

길가에 세워진 자전거를 스마트폰을 이용하여 잠금 해제하고, 본인이 타고 싶은 만큼 이용한 후 주차구역에 구애받지 않고 편한 곳에 세워놓고 다시 스마트폰으로 잠금 기능을 설정하면 끝. 1시간에 1위안 정도 밖에 안 되는 저렴한 비용을 바탕으로 공유자전거 수는 1천만대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GPS와 빅데이터를 활용한 성공적인 경영기법은 실리콘밸리와 서방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도시를 달리는 심플하고 화사한 색상의 자전거 행렬을 보며, 중국에서 자전거는 더 이상 소유물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잠시 빌려 쓰는 공유물로 자리매김 했음이 느껴졌습니다.

길을 걷다가 갑자기 뒤에서 쉬~익~ 하고 스쳐 지나가는 오토바이 소리에 놀란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오토바이의 접근을 인지하지 못하다가 놀란 이유는, '무음' 때문이었습니다. 배달을 하거나 간단한 이동수단으로 쓰이는 소형 오토바이의 상당수가 전기로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전기로 움직이는 소리 없는 오토바이의 변신은 자전거만큼이나 신선한 변화였습니다.

식당과 상점, 심지어 노점상에서도 휴대폰으로 간단하게 결제하는 사람들의 모습 또한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미 중국에서는 SNS서비스를 통한 모바일 결제 이용자 숫자가 신용카드 이용자보다 훨씬 많다고 합니다. 종종 거리의 악사 중에는 바코드 인쇄물을 게시해놓고 모금을 하는 경우도 있으니, 중국에 보편화된 전자결제 시스템 수준을 짐작할 만 합니다.

유선전화를 건너뛰고 무선전화로, 휘발유 자동차를 건너뛰고 전기자동차로, 신용카드를 건너뛰고 모발일 결제로…  서구 선진국이 일반적으로 거쳐온 경제발전 단계를 생략한 중국의 이러한 성장을 두고 이어령 교수는 '캥거루 중국'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과연 거리에서 만나는 중국의 변화는 빠르고 놀라운 것임에 틀림없었습니다.

팔달령에서 바라본 만리장성
 팔달령에서 바라본 만리장성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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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과 부러움이 교차한 이유

흔히 중국의 과거를 보려거든 시안을, 현재를 보려거든 베이징을, 미래를 보려거든 상하이를 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 세 도시를 둘러보며 느낀 점은 장소에 따른 시간의 분절이 무의미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지나간 과거의 역사도 다가올 미래의 전망도 지극히 현재적이고 현실적인 관점에서 부단히 새롭게 쓰여진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팔달령 방면으로 올라가서 만리장성을 바라보며 느끼는 소회는 특히나 그러했습니다. 북방 유목민족의 침입을 막고자 방어용으로 축조되었던 거대한 성벽. 그러나 이제 장성은 방어 용도가 아니라 중화패권의 공격성이 짙게 느껴졌습니다.

잘 알다시피 지금의 중국은 한족과 55개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국가입니다. 현재의 영토를 유지하고 민족을 융합시키며 현대 중국의 정체성을 만들기 위한 그들의 현실적인 고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그 현실적인 고민이 외부로는 주변 국가들에 대한 무시로, 내부로는 소수민족에 대한 억압으로 나타난다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고조선과 고구려를 비롯한 우리 고대사에 대한 왜곡, 티베트와 신장위구르에서 자행되는 인권탄압이 단적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중화문화'가 아닌 '중화민족'이라는 허구적 개념을 만들어 현재와 미래를 염두에 둔 정치논리를 거기에 끼워 맞추다 보니 역사왜곡을 넘어 역사창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시황 시절 골격이 완성되었다는 만리장성은 2천 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 넘어 지금 새롭게 축조되고 있습니다. 원래 장성이 존재하지 않았던 신장위구르지역과 만주지역, 심지어 북한의 평양까지 만리장성의 영역이라고 주장하는 마당이니, 이제는 만리장성이 아니라 이만리장성 삼만리장성이라 불러야 할 지경입니다.

고궁박물원(자금성)에서 한 켠에 마련된 ‘해양실크로드’ 관련 특별전시실의 모습.  국가의 핵심 비전에 대한 대국민, 대외 홍보 현장이었습니다.
 고궁박물원(자금성)에서 한 켠에 마련된 ‘해양실크로드’ 관련 특별전시실의 모습. 국가의 핵심 비전에 대한 대국민, 대외 홍보 현장이었습니다.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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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서부터 직진방향으로만 둘러 보아도 두어 시간이 족히 소요되는 고궁박물원(자금성)은 크기만큼이나 볼거리가 많았습니다. 황금빛 궁전의 화려함 속에서 발길을 끄는 전시가 있었습니다. 해양실크로드를 주제로 한 '해양교류사 특별전시'가 그것이었습니다.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에 바닷길을 통해 중동과 유럽에 어떤 문화를 전달하고 교역했는지를 유물과 함께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전시관을 둘러보며 이 이벤트가 최근 중국의 핵심 화두가 된 일대일로(一帶一路) 프로젝트에 대한 대국민 및 대외 홍보를 목적으로 설계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부러움과 두려움이 동시에 밀려왔습니다. 장기적인 비전을 가지고 국가차원의 큰 전략을 세우고, 단계적인 실행계획을 수립하여 치밀하게 추진하는 국가운영 시스템은 분명 부러운 점이었습니다. 일대일로(一帶一路)만 하더라도 무려 150년에 걸친 장기 프로젝트이고, 2000년대 초반 큰 문제가 되었던 동북공정 역시 1980년에 시작되어 이제 마지막 단계에 이른 40년 역사공정의 중간단계에 불과했던 프로젝트였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음 세대는 고사하고 4년, 5년 주기의 생각 단위를 벗어나기 어려운 우리의 정치 문화와 시스템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긴 호흡으로 크게 활보하는 거인이 바로 우리 옆에 존재하는 국가라는 사실은 부러움 뒤에 따라오는 당연한 두려움이기도 했습니다.

베이징 공묘(孔?) 입구에 들어서서 만나는 공자상.  중국은 앞으로 공자가 제시했던 공존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반대로 패권의 길을 갈 것인가?
 베이징 공묘(孔?) 입구에 들어서서 만나는 공자상. 중국은 앞으로 공자가 제시했던 공존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반대로 패권의 길을 갈 것인가?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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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자의 세계화' 증명해야

공자가 태어났던 취푸 다음으로 크게 조성되어 있는 베이징 공묘(孔庙)에 갔습니다.

"군자화이부동(君子和而不同) 소인동이불화(小人同而不和)"

당신은 논어의 이 구절을 해석함에 있어 '군자는 화목하되 부화뇌동하지 않으며, 소인은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화목하지 못한다'는 일반적인 풀이가 여러 면에서 올바른 해석이 못 된다고 하였습니다. 화(和)와 동(同)을 대비(對比)로 읽지 않고 있으며,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 사상은 기본적으로 모두 정치적 담론이라는 점을 간과한 해석이라고 하였습니다. 화(和)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관용과 공존의 논리인 반면, 동(同)은 지배와 흡수합병의 논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습니다.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

평화 공존을 주장하고 흡수합병이라는 패권적 국가 경영을 반대하는 유가 학파의 정치사상은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을 강대국이 약소국을 전쟁 방식으로 침탈하고 병합하는 동(同)의 논리에 원인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동(同)의 논리는 근대화 이후 지금까지 서구열강이 추구해 온 패권의 길이기도 합니다. 큰 나라든 작은 나라든, 강대국이든 약소국이든 서로 평화롭게 공존하는 화(和)의 질서를 만드는 것이 공자의 사상이었습니다.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 G2 시대의 중국을 세계는 경계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를 의식한 듯 시진핑을 비롯한 중국의 지도자들은 중국이 서구열강이 걸었던 패권국가의 길을 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입니다. 의혹의 눈길을 해소하는 방법은 자명합니다. 중국이 주변 국가들과의 관계에서 동(同)의 논리가 아닌 공자가 주창했던 화(和)의 질서를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있을 것입니다. 국가적인 사업으로 추진중인 '공자의 세계화'를 이미지 수출이 아닌 공자 사상의 실천으로 증명하는 데 있을 것입니다.

19세기 중반 서구열강 침투 지점이었던 상하이 황푸강.  황푸강 동쪽의 높은 빌딩과 화려한 야경은 현대 중국의 강력한 힘을 상징처럼 보여주는 동시에, 앞으로 중국이 걸어갈 길의 방향에 대해 생각하게 했습니다.
 19세기 중반 서구열강 침투 지점이었던 상하이 황푸강. 황푸강 동쪽의 높은 빌딩과 화려한 야경은 현대 중국의 강력한 힘을 상징처럼 보여주는 동시에, 앞으로 중국이 걸어갈 길의 방향에 대해 생각하게 했습니다.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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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갯소리로 중국에서 평생을 해도 다 할 수 없는 것이 세 가지 있다고 합니다. 평생 돌아다녀도 중국땅을 다 밟아볼 수가 없고, 평생 먹어도 중국음식을 다 맛볼 수가 없으며, 평생 배워도 한자를 다 익힐 수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거대하고 다양하고 다채로운 중국을 개별적인 현상 하나 하나를 가지고 '무엇'이라고 규정하려는 시도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고, 자칫 편견으로 빠질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따라서 나무 하나 하나를 보는 눈이 아니라, 먼저 숲을 크게 보는 시야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이 가고자 하는 문명의 성격과 방향을 읽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중화문명의 미래를 주의 깊게 살펴야 하는 이유는 두말할 필요 없이 그것이 우리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지정학적으로 대륙과 해양의 요충지에 자리한 우리는 늘 크게 부상하는 외부의 힘에 영향을 받아 왔고, 그에 대한 대처가 미흡하여 고통과 시련의 역사를 겪어 왔습니다.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거인이 맞닥뜨리는 지금 이 시기도 역사적으로는 매우 중요한 변곡점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격동의 시대에 외부 변화를 냉정하게 살피는 성찰이 무엇보다 필요한 때입니다. 더불어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는 국민 다수의 이익을 중심에 놓고 다음 세대까지 고려한 선택과 행동이 될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현재 세계일주 인문기행을 하고 있습니다.



태그:#중국, #중화문명, #중화패권, #일대일로, #역사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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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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