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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거의 20년 전에 신영복 선생님의 <더불어 숲>(신영복의 세계여행)을 처음 접했습니다.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는 문명과 사람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긴 따뜻한 글과 그림 엽서. 20대 초반의 대학생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갖는데 큰 영향을 받았음은 물론이며 그 감동으로 막연하게 세계일주에 대한 꿈도 품게 됐습니다. 인생의 반환점에 이르렀다고 생각되는 2017년, 배낭여행자가 되어 그 꿈을 실행에 옮깁니다. 당신이 보낸 첫 번째 엽서에 적혀있던 '언젠가 나는 당신의 답장을 읽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는 문구에 무모한 용기를 얻어 여행지에서 편지를 띄웁니다. 이 여행기는 당신 그리고 또 다른 수많은 당신들과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 기자 말

파리의 야경
 파리의 야경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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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는 과연 매력적인 도시였습니다.

국내외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의 배경이 되었던 장소, 어느 여배우가 자전거를 타고 건넜었다던 다리, 유명 철학자와 예술가들의 흔적이 묻어 나는 카페와 거리를 찾아 보는 것은 재미있는 경험이었습니다. 1789년 대혁명 이후 반동과 혁명으로 반복된 격동의 시대, 좌절과 영광을 함께 했던 프랑스 근현대사의 역사적 현장을 둘러보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일이었습니다. 루브르 박물관과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된 많은 작품들을 통해 프랑스 뿐만 아니라 유럽의 역사와 문화를 만나는 시간도 흥미로웠습니다.

예술과 낭만, 혁명과 이상, 이러한 단어와 가장 잘 어울리는 도시를 꼽으라고 한다면 아마 대다수 사람들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곳이 파리일 것입니다. 나 역시 그런 기대감을 갖고 파리를 찾았고, 실망스럽지 않을 만큼 많은 것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서일까?  파리에서 만나는 예술과 혁명의 숨결은 살아 펄떡 뛰는 생명체라기 보다는 한번의 정제과정을 거친 무언가로 느껴졌습니다.

여행은 미처 알지 못하던 것들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단지 유명하다는 이유만으로 찾았지만, 보면 볼수록 생동감 있는 에너지가 느껴졌던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들. 파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그가 마지막 삶을 불태우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 작은 마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가면 파리에서 부족하게 느껴지던 살아있는 느낌을 만날 수는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감으로 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 Sur Oise)행 기차에 올랐습니다.

파리에서 1시간 남짓 걸려 도착한 오베르 쉬르 우아즈 기차역
 파리에서 1시간 남짓 걸려 도착한 오베르 쉬르 우아즈 기차역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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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가 마지막 삶을 불태운 마을

기차로 1시간 남짓.  멀지 않은 철길을 달리며 만나는 풍경은 마치 경춘선을 타고 서울에서 춘천을 찾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유유히 흐르는 강이 보이기도 하고 낮은 집들과 소박한 마을, 작은 간이역은 대도시에 치인 마음을 여유롭게 이완시켜 주었습니다.

기차칸에서 반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집을 읽었습니다.  반 고흐 사후 다른 사람들이 쓴 해설이나 평론이 아닌, 살아 생전 그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담은 편지를 읽는 것은 조금 더 그에게 다가가는 길이 되었습니다.

"인물화나 풍경화에서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은, 감상적이고 우울한 것이 아니라 뿌리 깊은 고뇌다.  내 그림을 본 사람들이, 이 화가는 깊이 고뇌하고 있다고, 정말 격렬하게 고뇌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의 경지에 이르고 싶다. 흔히들 말하는 내 그림의 거친 특성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그 거친 특성 때문에 더 절실하게 감정을 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1882년 7월 21일 반 고흐 편지 中 –

그의 그림에서 보이는 특유의 거친 붓 터치를 통한 격정적인 표현이 오랜 시간 삶과 미술에 대한 깊은 고민과 연구에서 비롯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는 그의 작품이 광기에서 비롯된 산물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하나, 그림이야말로 그가 정신적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유일한 목표이며 구원이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습니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는 그가 자살하기 전 70일을 머물며 약 70편의 작품을 남긴 마을인데, 곳곳의 건물과 전경은 우리가 만나는 작품 속의 실제 대상이 되었던 곳입니다. 그런 장소 마다 그림에 얽힌 사연을 담은 안내판이 친절하게 마련되어 있어 새로운 느낌으로 작품들을 다시 만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왼편은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교회'. 오른편은 마을에서 만나게 되는 실제 교회
 왼편은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교회'. 오른편은 마을에서 만나게 되는 실제 교회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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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이 서 있는 공원, 평생의 벗이자 후원자였던 동생 테오와 나란히 누워 있는 묘지, 그리고 권총 자살로 마지막 숨을 몰아 내쉰 다락방… 이 곳들을 둘러보면서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처절하게 가난하고 철저하게 고독했던 사내. 살아 생전 단 하나의 유화 작품만을 판매했을 정도로 세상으로부터 인정 받지 못했던 작품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의 그림 속으로 우리가 빠져 드는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그림에 빠져드는 이유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직접 촬영)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직접 촬영)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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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파리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나는 당신이 20년 전 파리를 다녀가며 남긴 소회가 떠올랐습니다.

"파리에서 깨닫게 되는 것은 자유의 반대는 구속이 아니라 타성이라는 사실입니다.  타성은 우리가 그것이 억압이나 구속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 그것은 견고한 무쇠 방입니다. 새로운 사고와 새로운 감성이 갇혀 있는 상태입니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예술이 추구해야 할 목적이나 예술이 수행하는 기능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개인과 사회가 가지고 있는 잠재적 에너지를 열어 주는 해방의 역할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반 고흐의 밤하늘과 별에서, 꽃과 나무에서, 자화상의 눈빛에서 ……  우리가 느끼는 그 격정 너머의 무언가는 바로 '해방감', '자유'로 표현할 수 있는 예술혼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파리에 매혹되는 이유 역시 격동의 역사 속에서 혁명의 이상과 좌절, 극복의 과정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프랑스 사람들의 자유와 해방 정신에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프랑스 대선일 출구조사 결과에서 마크롱의 승리가 발표되자 개선문 앞 도로로 뛰어 나온 시민들
 프랑스 대선일 출구조사 결과에서 마크롱의 승리가 발표되자 개선문 앞 도로로 뛰어 나온 시민들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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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초순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프랑스도 장미대선으로 출렁인 시기였습니다. 우리보다 이틀 앞서 대통령선거 결선투표가 치러졌던 날 저녁, 출구조사 결과가 마크롱의 당선 유력로 나오자 개선문 앞 도로로 시민들이 프랑스 국기를 들고 뛰어 나오고 차량들은 경적을 울렸습니다. 환호하는 사람들 중에는 특히 유색인들이 많았습니다. 이번 선거의 대체적인 정서를 읽을 수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선거 결과로 나타난 시민들의 반응이 예상보다 폭발적이지는 않았습니다. 힐러리와 트럼프의 대결에 비견될 만큼, 마크롱과 르펜에 대한 프랑스 국민들의 비호감도가 컸고, 마크롱이 최선의 선택지라기 보다는 르펜이라는 최악의 선택을 피하기 위한 결정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프랑스라는 사회가 추구하고 지켜온 공화국의 정신, 공동체의 가치가 극우세력에 무너질 수는 없다는 상식의 선택이었기에 담담한 반응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틀 뒤에 나온 한국의 선거 결과의 반응은 인터넷을 통해서 접하는 것이었지만, 파리에서의 열기 보다 훨씬 뜨겁게 느껴졌습니다. 프랑스가 상식을 지키는 선거였다면, 우리는 무너질 대로 무너진 상식과 민주공화국의 가치를 다시 세우는 과정이었기에 그 뜨거움 또한 당연한 것이라 여겨졌습니다. 무엇보다 비정상의 정상화를 이끈 원동력이 온전히 광장 그리고 드러내지 않았더라도 마음의 한 켠에서 촛불을 밝혀 든 수많은 시민들의 힘에 있었다는 사실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1789년 혁명 앞에 '大'자가 붙어 있기에 그 한번의 사건으로 프랑스 사회의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바뀌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이후의 역사를 살펴보면 기나긴 시간 동안 나아감과 물러섬의 부침을 겪으며 '자유, 평등, 박애'라는 공화국의 가치를 완성해 나아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파리는 인고의 과정으로 충분히 단련 되었기에 '정제된 듯한' 느낌의 안정감을 품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장미대선의 결과로 우리도 새로운 역사의 페이지를 다시 넘기게 되었습니다.  '대통령 하나 바뀌었을 뿐'이라는 말이 있듯이, 만만치 않은 구습과 사회 각 분야에 뿌리 내린 기득권의 저항과 반격을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개혁과 변화에서 오는 파열음과 잠재된 에너지의 표출을 '불안'으로 조장하고 이 정도에서 접고 가자는 시도 또한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콩코드 다리 아래로 흐르는 세느강. 바스티유 감옥을 허문 돌로 만들어진 이 다리는 콩코드 광장과 국회의사당을 잇고 있습니다.
 콩코드 다리 아래로 흐르는 세느강. 바스티유 감옥을 허문 돌로 만들어진 이 다리는 콩코드 광장과 국회의사당을 잇고 있습니다.
ⓒ 정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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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 박물관은 절대왕정의 상징 루브르 궁전을 탈바꿈한 장소이며, 콩코드광장과 국회의사당을 잇는 콩코드 다리는 바스티유 감옥을 허문 돌로 만들어졌습니다. 과거 적폐와의 확실한 단절과 창조적인 건설이 상식적인 사회의 기틀이 되었음을 상징처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상식과 기본이 바로 선 나라를 다시 세워야 하는 우리가 본보기로 삼아야 할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돌이켜 보면 지난 몇 년간은 우리 역사에서 매우 아픈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몇 개월 사이 우리가 그것을 극복해나간 과정은 전세계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평화적이면서도 격조 높은 시민혁명의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제 확실한 매조지를 통해 더 이상 퇴행할 수 없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 한국을 찾는 사람들이 파리에서와 같은 자유와 해방의 영감을 얻어갈 수 있는 나라가 되기를 기원해봅니다.

덧붙이는 글 | 2016년 12월 말부터 약 1년간의 일정으로 세계일주 인문기행을 하고 있습니다.



태그:#파리, #오베르 쉬르 우아즈, #고흐, #시민혁명, #장미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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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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