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내년 6월이면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열립니다. 민의를 대변하고 봉사자로서 소양을 갖춰 국민들에게 선택을 받는 선량(選良)들이면 얼마나 좋겠는가만 실제 현실정치권은 권모술수·마타도어·흑색선전과 네거티브에 충실한, 그야말로 '개판'인 선거현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꼭 그렇게 해야만 할까요? 저는 1998년부터 2010년까지 정치컨설턴트로 활동을 하면서 참 많이 아쉬웠습니다. 동시에 고민도 됐지요. 그래서 그런 부정한 선거방법이 아닌, 정직하게 선거운동을 해서 유권자의 선택을 받을 수 있는 '선거 전략'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앞으로 몇 회나 연재하게 될지 모르지만, 예비후보자는 영감을, 착한 시민(유권자)에게는 선택의 기준을 제공했으면 하는 소망을 가져봅니다. - 기자 말

정직한 모사꾼 링컨

모리스는 그의 저서 <파워게임의 법칙>에서 '첨예한 이슈로 분열시켜 정복하라'라는 명제를 내세웠습니다. 그는 세 명의 정치인을 사례로 들었습니다. 먼저 링컨이 첫째고, 둘째로는 닉슨, 마지막은 트루먼이었습니다.

제가 앞서 설명 드린 '갈라치기' 전략과 유사한 사례는 링컨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공화당 후보였던 링컨은 노예해방이라는 명확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드러냄으로써 민주당 후보였던 스티븐 A. 더글러스(Stephen A. Douglas)를 궁지로 몰아넣었습니다.

원래 더글러스는 노예제에 대해 중도적이고 온건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링컨은 명확하게 자신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노예해방에 대한 더글러스의 입장 표명을 거세게 요구했습니다. 그 때문에 더글러스는 스스로 무덤을 팔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소수파였던 공화당은 이런 링컨의 전략으로 민주당을 분열시켜 결국 대통령 자리를 차지하게 됐지요. 모리스는 이런 링컨을 '정직한 모사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모리스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링컨이 입장을 명확하게 했다는 게 아니라 '적'을 '분열'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다음 설명해드릴 닉슨입니다.

딕 모리스의 사감과 닉슨

그런데 사실 모리스는 닉슨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의 책 <파워게임의 법칙> 곳곳에서 닉슨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퍼부었습니다. 가령 '닉슨이 베트남의 평화문제를 놓고 장난을 친 기간은…'이라든지 '뻔뻔하게 변신'했다느니 등의 표현이 책속에 담겨있습니다. 그럼에도 닉슨의 전략, 즉 '적을 분열시켜서 정복하는 게임'에 대한 모리스의 설득력 있는 설명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합니다. 모리스의 사사로운 감정을 제거하고 그의 책을 읽다보면 닉슨의 선거 전략은 소름끼치도록 교묘했고, 치밀했으며, 징그러울 정도로 교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리스에 의하면 원래 닉슨이라는 사람은 배짱도 두둑하고 다혈질이며 달변에다 패기만만한 기백과 자신감을 가진 사람이라고 합니다. 닉슨은 연설을 통해 미국 국민들을 여러 번 눈물을 흘리게 만들기도 했고,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서 8년 동안(1953~1961) 부통령을 역임하기도 한 파란만장한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는 케네디에게 뜻밖의 일격을 당해 패배한 뒤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출마했지만, 여기서도 패배를 당했습니다. 닉슨의 정치적 활로가 막혔습니다. 여기부터 닉슨의 (모리스의 표현대로) '뻔뻔한 변신'이 시작됩니다. 정직한 모사꾼 링컨은 노예해방에 대한 자신의 소신과 의지를 명쾌하게 함으로써 상대방도 그런 입장을 취하게 만들어 분열로 정복했다면, 닉슨은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 모호하고 흐릿한 화법(2012년 대한민국에서 한참동안 유행했던 소위 '유체이탈 화법' 기억나시지요?)을 통해 상대방을 분열시켜 전세를 역전시켰습니다. 대체 닉슨은 무슨 조화를 부렸을까요.

남의 말 하듯, 그러나 할 말은 다 하는

닉슨은 열혈 반공투사였습니다. 하원의원에서 상원의원까지 진출하는 데 그의 선거에 제물이 된 상대방 후보자들은 모조리 '철저한 좌익 동조자'가 되든지 '용공'으로 몰렸습니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까지도 용공분자라고 비난을 했을 정도니 말 다한 것이죠.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닉슨은 대통령 선거에서 케네디에게 패배하면서부터 자신의 선동이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일대전환을 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에서 닉슨은 결단을 내리고 '뉴 닉슨 플랜'을 짜면서 캠페인에 돌입합니다. 극보수 반공주의자에서 중도주의자로 탈바꿈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1992년에 김대중 민주당 후보가 '뉴 DJ 플랜'을 통해 자신의 과격한 이미지를 벗어버리려고 했던 것과 비슷합니다(물론 닉슨의 지향점과 DJ의 지향점은 정반대라 할 수 있지요). 존슨 대통령이 소위 베트남전을 확대시킬 기미가 보이자 닉슨은 말 폭탄을 하나 턱 안겨주고는 해외로 떠나면서 입을 닫았습니다. 그가 이야기 한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1967년 현재 우리는 베트남전을 수행하기 위해 (최근의 4만 6천명 증파에 더해) 얼마나 많은 미군 병사들을 더 보낼 것인가?"

세상에! 열혈 반공주의자 닉슨이 반전을 이야기 하는 것인가요? 더군다나 베트남전에 케네디와 존슨이 개입하게 된 것은 중국 공산화 후 공화당에서 트루먼을 끈질기게 공격했고 이 트라우마를 케네디와 존슨이 고스란히 안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닉슨 자신도 그렇게 공격했음에도 이제 와서 반전을 외치다니요. 말도 되지 않는 상황이지만 이 닉슨의 말 폭탄이 회자되면서 일반 국민들에게는 닉슨이 베트남 전쟁에 반대한다는 인상이 뚜렷하게 남게 됩니다. 정말 닉슨은 남의 말하 듯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메시지는 다 이야기했습니다.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 아닌가요? 그러나 이는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닉슨의 1960년대식 '유체이탈 화법', 즉 '모호한 화법'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빛을 발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 하나가 되자... 어떻게?

영민한 정치인 닉슨은 중서부지역에서 선거운동을 펼치다 한 어린 소녀가 들고 있던 '우리 모두를 다시 하나로 만들어주세요'라는 피켓을 발견했습니다. 기회 포착에는 천부적인 감각을 가졌던 닉슨은 곧 바로 자신의 선거운동 테마를 '우리 모두 하나가 되자'로 정해 자신의 목표라고 떠들었습니다. 국가적 단결을 강조한 것이지요. 하지만 추상적인 단합, 단결 등 캐치프레이즈만 있었지 구체적인 내용은 없었습니다. 이를 테면 질문은 회피하고 원칙적인 이야기만 늘어놓으면서 베트남전에 대한 명확한 입장 표명을 하지 않는 것이죠. 침묵하는 겁니다. 공화당 후보지명 연설에서도 이렇게 이야길 합니다.

"현 행정부가 깨드린 단합을 아메리카가 강하게 촉구하고 있는 시기에 공화당이 오늘밤, 활기찬 정·부통령 후보 지명전 끝에 국민 앞에 단결된 모습으로 선 만큼 우리는 승리를 거둘 것이다. (중략) 스스로 단합할 수 있는 정당이 아메리카를 단결시킬 것이다."

번역이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닉슨이 이렇게 횡설수설 했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닉슨은 '단합하자! 단결하자!'로 선거 캠페인을 이끌었습니다. 그런데 이 도깨비 방망이 같은 '단합 합시다'는 구호는 미국 국민들에게 각기 다르게 해석됐습니다.

당시 미국의 좌파에게 다가간 '단합'이라는 의미는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학생들에 대한 추방과 처벌을 종식하고 이 전쟁으로 빚어진 분열을 치유한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미국의 우파에게 다가간 '단합'이라는 의미는 '웅크린 채 버티면서 베트남전을 승리로 이끌어 국내의 반대세력을 분쇄하는 의미'였습니다. 중도파에게 다가간 '단합'이라는 의미는 '확전과 징집 거부의 양극으로 치닫는 극단주의의 종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비춰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1968년 4월, 마틴 루터 킹 목사가 피살당하고 흑인사회가 분노와 비탄으로 인해 수십 개 도시에서 유혈 난동과 난투극이 벌어졌을 때 닉슨의 이 '단합'은 '흑인사회의 항의 난동에 맞서 백인사회가 '단결'해야 한다'는 식의 인종차별적 기미까지 드러냈다고 합니다.

저는 입이 쩍 벌어졌습니다. 만약 닉슨이 이런 것까지 예상하고, 자신의 캐치프레이즈와 컨셉트를 정했다면 그야말로 닉슨은 천재 중의 천재이고 아주 탁월한 전략가인 셈입니다.

자기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하는 '존슨' 대통령

닉슨이 이렇게 자기 자신의 명확한 입장을 내세우지 않고 흐릿하게 중도로 이전하는 사이에 민주당은 그야말로 '베트남전'을 둘러싸고 당내 불협화음과 이전투구로 갈기갈기 찢어졌습니다. 또 미국 국민은 이런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민심이 지쳐버렸습니다.

맹장 수술자국을 보여주는 존슨 대통령을 희화화하는 미국 신문만평. 맹장 수술자국에 베트남 지도를 그려 넣었다. 이는 베트남전에 대한 당시 존슨의 정책을 조롱하는 것이었다. 존슨의 맹장수술 자국 같던 베트남 전쟁과 오락가락하는 베트남 정책은 민주당을 분열시켰고 결국 닉슨에게 권력을 헌납했다(David Levine 그림).
▲ 린든 B. 존슨과 맹장 수술자국 맹장 수술자국을 보여주는 존슨 대통령을 희화화하는 미국 신문만평. 맹장 수술자국에 베트남 지도를 그려 넣었다. 이는 베트남전에 대한 당시 존슨의 정책을 조롱하는 것이었다. 존슨의 맹장수술 자국 같던 베트남 전쟁과 오락가락하는 베트남 정책은 민주당을 분열시켰고 결국 닉슨에게 권력을 헌납했다(David Levine 그림).
ⓒ New York Review of Books

관련사진보기

이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존슨 대통령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했습니다. 물론 닉슨의 집권을 막기 위해 베트남 폭격 중지 결정(1968년 10월 31일)을 내리는 등 발버둥쳤지만 턱없이 부족했다고 합니다. 존슨 대통령은 처음 만나는 손님이 있으면 일부러 그 손님 앞에서 셔츠를 들쳐 배에 있는 맹장 수술 자국을 보여줬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신상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는데도 자신은 매우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는 등 어려웠던 옛 시절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흔히 미국에서 이야기 하는 '프렌 포크스'를 한 셈이죠. 일각에서는 이를 서민성의 실천이라고 미화하곤 했지만, 미국 신문은 이런 존슨에게 따끔한 만평으로 응수했습니다.

대통령 존슨이 언론으로부터 이렇게 조롱당하는 동안에도 닉슨은 입을 굳게 다물고 침묵을 지켰습니다. 침묵이 무기였습니다. 링컨이 노예제에 대해 명확한 자신의 입장을 취하면서 상대방 더글라스의 입장을 요구하는 것과는 달리 닉슨은 침묵을 지키는 형태로 중도노선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링컨이나 닉슨이나 목적은 모두 '상대방을 분열시켜서 정복'했지만, 취하는 자세가 달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앞서 설명한 대로 모리스는 '적을 분열'시키는 데 더 중점을 뒀습니다.

미국 국민은 왜 닉슨의 침묵을 용인했을까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미국의 국민들과 언론들은 왜 닉슨의 이 의도적 침묵을 용인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몰랐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요?

모리스는 대체적으로 두 가지 이유를 대고 있습니다. 첫째, 언론사의 기자들의 상황이 당시 1960년대 말과 지금과는 판이하게 다랐습니다. 모리스는 이유를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사실 닉슨은 폭격과 확전으로 베트남전에서 승리를 거두겠다고 결심한 인물이었다."

그렇습니다. 닉슨은 선거 내내 미국 유권자들에게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그저 단합하자고 하지만 무슨 내용으로 단합을 할 것인지, 어떻게 단합할 것인지는 이야기하지 않고 그저 주술(呪術)에 따라 앵무새처럼 반복만 한 것입니다. 이렇게 반복하는 닉슨에게 기자들은 '이면을 파고드는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으며 '현재보다 꽤 소극적'이었다고 합니다. 요즘이야 대통령과 맞먹는 기자들도 (적어도 미국에서는) 많아졌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대통령 후보'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자 할 때는 이를 무시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둘째, 미 국민들이 고통과 번민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젊고 멋쟁이였던 케네디 대통령을 암살로 잃었습니다. 얼마 가지 않아 흑인들의 우상 마틴 루터 킹 목사 역시 암살을 당했습니다. 베트남에서는 수많은 전사자가 발생했고 반전시위에서도 시위대가 다치거나 죽었습니다. 국론분열이 심화되어서 더 이상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냉정한 판단을 하는 것이 무리겠지요. 깨어있는 시민의식은 국론분열과 잇단 죽음의 행진에서 얼어붙었던 것입니다. 모리스는 닉슨이 지쳐버린 민심을 교묘히 파고들었다고 정리했습니다. 깨어 있는 시민의식이 마비된 곳에는 냉철한 시민의식이 발휘될 수 없지요. 결국 미국은 최악의 대통령 중 한 명인 '닉슨'을 선출하게 됐습니다.

정작 꼭 필요한 대목에는 침묵을 하고, 또 이야기를 하더라도 모호하게,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닉슨 후보를 보면서 2013년 대한민국의 데자뷰를 보는 것 같다는 느낌을 드는 것은 비단 저만의 느낌은 아닐 것입니다.

'노예해방', 정말 링컨의 입장이었을까
링컨은 정말 '노예해방'을 자신의 정치적 신념으로 삼았을까요? 이에 대한 논쟁은 아직도 지속되고 있는 모양입니다. 저난 모리스의 <파워게임의 법칙>에 의거해 판단하고자 합니다. 모리스는 그의 제 6전략 '원칙이 아니라 싸우는 방법을 바꿔라'를 통해 링컨의 당시 상황을 부연 설명합니다.

링컨은 1860년 11월 6일, 미합중국의 제 16대 대통령으로 당선이 됩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 1861년 3월 4일 대통령 취임연설을 통해 "노예를 부리는 여러 주의 노예제에 대해 직접이건 간접이건 간섭할 의도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반은 노예제, 반은 노예해방의 땅이라는 이런 상황은 참을 수 없다"고 이야기 했던 인물이 취임 연설을 통해 사실상 노예해방에 대한 관심 자체를 부인하고 나선 꼴이 된 것입니다.

링컨의 취임 한 달 뒤, 남군의 공격으로 남북전쟁이 발발합니다. 링컨의 북군은 처음에는 불리했지만 1862년 9월 22일, 노예제 폐지를 공언한 '노예해방예비선언'을 통해 국내외 여론을 유리하게 이끌게 되면서 전세가 역전됩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이 눈길을 끕니다. 한 가지는 1862년 7월 22일의 '각료회의'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해 8월에 있던 링컨의 '편지사건'입니다. 7월 각료회의에서 노예해방 문제를 토의한 후, 노예해방 결정을 한 링컨은 각료들에게 초안을 낭독했습니다. 하지만 발표는 국무장관인 윌리엄 시워드가 '남부에 대한 결정적 승리가 있은 뒤'에 하는 것이 좋겠다는 건의를 받고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보류한 것이지요(실제로 저 유명한 애티텀 전투에서 승리하고 나서야 보류됐던 노예해방예비선언이 발표되지요). 그해 8월, 급진 공화당원이자 신문편집인인 호러스 그릴리(Horace Greeley)가 노예해방을 호소하는 '2000만 명의 기도'라는 논설을 쓰자 링컨은 편지를 보내서 자신의 우선적 목표가 어디에 있는지를 밝혔습니다.

"이 싸움에서 내가 가장 높이 받드는 목표를 연방을 구하는 것이지, 노예제의 유지나 폐지 문제가 아니다. 만일 어떤 노예도 자유롭게 함이 없이 연방정부를 구할 수 있다면, 나는 그렇게 할 것이다."(My paramount objet in this struggle is to save the Union, and it is not either to save or destroy slavery. If I could save the Union without freeing any slave, I would do it.)

1861년 대통령 취임연설에서 헷갈리는(?) 연설을 한 링컨, 우리가 아는 그 사람이 맞을까요. 노예를 해방하자고 논의했던 '각료회의'와 '편지사건'의 링컨은 같은 사람이었을까요? 그 다음 9월 22일 '노예해방예비선언'은 또 무엇인가요? 결국은 1863년 1월 1일, 링컨은 역사적인 선언문인 '노예해방 선언'문에 직접 서명을 하면서 인류사에 큰 획을 긋게 됩니다. 대체 이 흐름은 무엇인가요?

물론 지금도 흑인작가이며 학자이고 사회역사학자인 Lerone Bennett가 2009년 CNN 인터뷰에서 링컨에 대해서 "'위대한 노예해방의 아버지 링컨'이란, 광신적인 추종자들이 만들어낸 수백 년 동안의 거짓말"이라고 퍼붓기도 했으니 우리가 흔히 배웠던 '노예해방의 아버지 링컨'이라는 단순한 언명으로 표현하기 곤란할 수도 있겠습니다.

모리스는 이에 대해 이렇게 언급합니다.

"역사학자들은 이런 점에 대한 많은 논란을 벌였지만, 그가 취임할 당시 연방 보존의 필요성이 워낙 절박했기 때문에 링컨의 머릿속에 있는 다른 문제들이 모두 하찮게 비쳤을 것이란 점에는 의견이 합치되고 있다. (중략) 링컨은 (원칙을 유지하되) 메시지를 바꿈으로서 성공을 거두게 됐다."

링컨은 1863년 1월 1일, 연방정부에 대항하던 10개의 남부 연합주에 노예해방 선언(Emancipation Proclamation)을 하게 되고 이 해방령에 따라 탈출한 거의 20만 명의 흑인들이 모두 북부군에 입대를 하게 됩니다. 또 흑인병사들은 노예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형제나 동료들의 대규모 탈출을 도움으로써 남부의 영농기반을 뒤흔들게 됩니다. 결국 1865년 4월 9일, 남군 사령관 로버트 리 장군이 항복하면서 남북전쟁은 끝나게 되지요.

덧붙이는 글 | 갈라치기가 쉽게 끝나지 않네요. 그만큼 중요하고 예민한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글은 닉슨을 마무리 하면서 2013년을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정치인들을 한 번 살펴볼까 합니다. 정치인들이 의도적으로 우리 유권자들에게 갈라치기 전략을 구사해도 거기에 당하지 않는 '깨어있는 시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태그:#정직한 모사꾼, #닉슨의 침묵, #딕모리스, #갈라치기, #분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최요한, 1969년 서울 산(産), 2000년부터 방송에 관심 있어 주변을 맴돌다 2005년 우연히 얻어 걸린 라디오 전화인터뷰부터 시사평론 방송시작, 2014년부터는 경제 Agenda에 집중, 시사경제평론을 하면서 몇몇 경제채널 출연하고 있음, 어떻게 하면 쉽게 이야기 할 수 있는지 종일 고민함.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