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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한 때 호떡을 구워 팔아 우리를 먹여 살리셨지요.
▲ 호떡 어머니는 한 때 호떡을 구워 팔아 우리를 먹여 살리셨지요.
ⓒ 변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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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물(?) 앞세워 아들 불러들이는 어머니

지난 9일 토요일 오전, 시내에 살고 계시는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아들, 와서 달걀 좀 가져 가거라."

어머니는 별로 잘나지도 못한 아들이 보고 싶은가 봅니다. 그동안 저는 지난 2000년 7월에 현대자동차 사내 하청에 들어가 일할 때 주·야 맞교대로 돌아가고 토, 일 특근이 많아 자주 못 찾아뵈었습니다. 그러다가 2010년 3월 중순경 그렇게 10여 년을 다니던 일자리를 정리해고로 잃은 후엔 다른 일자리를 찾는다는 이유로 자주 못 찾아뵈었습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맏아들이자 한 집안의 가장인 저의 고충을 이해해 참아보다가 도저히 아들이 보고 싶어지면 그렇게 전화를 합니다.

그냥 "아들아, 보고 싶으니 한 번 왔다 가라"고 하면, 분명히 아들은 "시간 없어 못 간다"는 반응을 보일 것이 뻔하므로 뇌물을 앞세우며 아들을 그렇게 유인(?)하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저는 "바빠 시간이 없는데…"라고 하면서 마지못해 가는 척합니다. 남목서 버스를 타고 가면 이래저래 한 시간은 족히 걸립니다. 버스를 한 번은 더 갈아타야만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 갈 수 있습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생각합니다. '오늘은 엄마랑 산을 한번 탈까?' 울산은 지금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올랐습니다. 쑥이 한창 올라올 때이기도 합니다. 어머니가 계신 집에 가서 대뜸 말했습니다.

"엄니, 이곳 산에 쑥 많이 나는 데 있어요? 쑥떡이나 쑥버무리 해 먹고 싶어서요."

저는 이날 어머니랑 쑥을 뜯기로 했습니다. 어머니는 다른 사람이 다 뜯어 갔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면서 쑥이 많이 난다는 앞산의 그 장소로 가보았습니다. 다행히도 그곳은 쑥이 뽀송뽀송하게 많이 자라나 있었습니다. 어김없이 봄이 온 것입니다.

며칠 전 일본 원자력 발전소 파괴로 인한 방사성 비가 울산에도 내렸다는 소식을 듣긴 했지만, 미국이 1945년 8월 일본 히로시마에 핵폭탄을 떨어뜨렸을 때 유일하게 자라난 식물이 바로 쑥이었다는 정보를 누구에겐가 전해 들은 저는 쑥의 끈질긴 생명력에 대해 믿어 보기로 했습니다.

"아들아 기억나나? 엄마가 너희들 어렸을 때 봄이면 쑥을 뜯어다 쑥버무리 많이 해 먹였었지."

엄마는 뜬금없이 그런 말을 쑥 뜯다 말고 했습니다. 저는 쑥을 뜯으면서 추억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네, 기억나지요. 기억나고 말고요. 어머니가 해 준 그 쑥버무리에 대해선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요. 제가 어려서 어머니 속을 무지하게 썩여 드린 기억은 생생히 나지요.'

생각해 보니 저는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린 경우는 한 번도 없었고 마음 아프게 해 드린 경우가 참 많았습니다. 제가 당시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5학년, 남동생이 3학년 시절로 돌아가 봅니다.

지금처럼 봄으로 기억되는 어느 날 시작한 어머니의 호떡장사

어머니는 자식들과 함께 먹고살려고 부던히도 노력했습니다. 남의 집 농사 일도 하고, 일명 고무 다라이(대야)를 이고 다니며 조개를 구해 팔기도 했고, 산에 가서 마른 나무를 한 단 해다가 팔기도 하며 살았습니다.

제가 국민학교 5학년이 되던 해 봄으로 기억됩니다. 어머니는 리어카 하나를 얻어다 포장마차로 개조해 호떡을 만들어 팔았습니다. 호떡 만드는 방법을 모르던 어머니는 동네방네 호떡 장사를 찾아다니며 밀가루 반죽 만드는 방법과 호떡 속 만드는 방법, 굽는 방법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보며 배웠습니다. 어머니는 오래 전 호빵 장사는 해본 적이 있어 잘하지만, 호빵 만드는 방법으로 호떡을 해보니 호떡이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호빵과 호떡은 들어가는 재료부터가 다르다고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글을 모르는 어머니는 머리로 인식하고, 나머진 집에서 계속 반복 연습을 하며 호떡 반죽과 만드는 법을 터득해 나갔다고 합니다. 그렇게 한 달간 연습한 후 이만하면 되었다 싶어 드디어 장사를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포장마차는 대부분 차량이고 전기를 사용하고 가스불을 때서 음식을 만들지만 그 당시엔 리어카에다 나무로 엮어 만든 포장마차였습니다. 리어카형 포장마차도 맞춤형이라 쇠를 엮어 만들므로 아주 튼튼합니다만 어머니의 포장마차는 그렇게 튼튼하지 못했습니다. 또 밤에 밝히던 불빛도 카바이드라는 물에 녹는 물질을 깡통에 넣어 불을 밝혔고 호떡 만드는 기구를 뜨겁게 달구는 연료통도 연탄불이었습니다.

요즘은 마춤형 포장마차로 튼튼합니다.
어머니가 호떡 장사 하려고 만든 포장마차는 나무토막에 못을 박아 만들어
튼튼하지 못했습니다. 요즘은 가스통 놓고 호떡을 굽지만 그 땐 연탄불로 호떡을 구워 팔았습니다.
▲ 리어카형 포장마차 요즘은 마춤형 포장마차로 튼튼합니다. 어머니가 호떡 장사 하려고 만든 포장마차는 나무토막에 못을 박아 만들어 튼튼하지 못했습니다. 요즘은 가스통 놓고 호떡을 굽지만 그 땐 연탄불로 호떡을 구워 팔았습니다.
ⓒ 변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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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고무 다라이에 절반 정도 반죽을 해서 따뜻하게 이불로 하루 종일 감싸 두면 오후엔 부풀어 올라서 한가득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그렇게 만든 재료를 리어카에 싣고는 3킬로미터 정도의 길을 끌고 다녔습니다. 지금은 현대백화점 건물이 멋지게 서 있는 동구지역 큰 길가 옆에다 리어카를 세워두고 호떡을 구워 팔았습니다.

장사는 오후 5시부터 시작해서 오후 10시가 넘을 때까지 했습니다. 손님이 있을 때는 오후 11시가 넘기도 했습니다. 갑자기 단속을 하면 경찰이 와서 리어카를 압수해 가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중공업이라 하지만 당시엔 조선소라는 대기업이 있어 저녁만 되면 회사원들이 많이 다녔습니다. 어머니가 호떡을 맛있게 구워 그런지 시간이 지날수록 장사는 잘되었습니다.

요즘 우리 동네 버스 차비는 950원 하고 호떡 한 개 500원 합니다만, 그땐 버스 차비가 25원, 호떡 한 개에 20원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돈이 조금 부족해도 주었고 많이 사면 덤으로 더 주어서인지 인심이 좋다며 단골도 많이 생겼습니다.

남동생과 저는 학교 마치고 집에 가면 어머니를 도왔습니다. 밤에 장사를 마무리할 때쯤 동생과 함께 어머니께 가면 어머니는 남은 호떡을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우리는 어머니가 주신 호떡을 맛있게 먹은 후, 어머니는 리어카를 끌고 우린 뒤에서 밀며 집으로 올라갔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이 조금 오르막인지라 무거운 짐이 실린 리어카를 어머니 혼자 끌고 다니기엔 무리가 따랐습니다.

조선소 직원들 사택으로 쓰던 건물을 지나 산속 앞까지 리어카를 끌고 들어가야 했습니다. 가난했던 우리 가족은 사원 주택이 있던 뒷산 속에 포장 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문도 포장문이라 둘둘 말아 올리면 문을 열어 놓은 것이고 내려 펼치면 문을 닫은 상태였습니다.

호떡을 팔고 집에 가면 어머니의 앞치마는 언제나 10원짜리 동전과 100원짜리 동전으로 두둑했습니다. 어느 날부터 어머니는 호떡 장사가 힘드신지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동전이 가득히 들어 있는 앞치마를 머리맡에 풀어놓고는 이내 곯아떨어지곤 했습니다.

저는 언제부턴가 어머니의 앞치마에 손을 대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가 잠들었다 싶으면 표시 나지 않게 조금씩 동전을 훔쳐내어 저만이 아는 나무 아래 흙을 파고 숨겨두기 시작했습니다.

"동생아, 우리 내일 시내로 영화 보러 같이 가자!"

저는 어머니에게 훔친 돈이 수북해지자 순진한 동생을 꾀어 함께 행동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그 돈으로 맛있는 것도 맘대로 사 먹고 싶었고 영화도 보고 싶었습니다.

엄니가 호떡 판 돈 훔쳐 영화 보고 가출까지

그날 아침 우리는 태연하게 가방을 들고 학교 가는 척했습니다. 조선소 담벼락 옆으로 큰 하수구가 있었습니다. 그 하수구 다리 아래로 내려가면 한 사람 정도 다닐 수 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곳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서 동생과 저의 책가방을 숨겨두고는 곧바로 버스를 타고 옥교동으로 갔습니다.

그때는 옥교동이 제일 큰 시내 번화가로 시민극장, 울산극장, 태화극장 같은 극장이 모여 있었습니다. 우리는 거리를 쏘다니며 군것질도 하고 배고프면 자장면도 사 먹었습니다. 주머니에 두둑하게 있는 동전으로 우린 영화도 보면서 즐거운 한나절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놀다가 학교 마치는 시간에 맞춰 다시 버스를 타고 동네로 갔습니다. 하수구 다리 아래로 가서 책가방을 찾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두 개의 가방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그렇게 시내서 놀다 학교 마치는 시간에 맞춰 들어가면 어머니도 우리의 범죄(?) 사실을 모를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책가방이 두 개 다 없어졌으니 이제 큰일 난 것입니다.

저는 어머니에게 혼날 생각을 하니 겁이 났습니다. 동생도 이제 어떡하느냐며 울기만 했습니다. 하수구 속에 빠졌나 싶어 하수구 물속을 긴 작대기로 휘저어도 보았지만 사라진 가방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빈손으로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무서워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3일간 우리는 어머니랑 숨바꼭질을 했습니다. 우린 어머니가 없는 틈을 타 집에 들어가 밥을 먹고 다시 집을 나와 배회했습니다. 물론 가방이 없어 학교도 못 갔습니다. 낮엔 동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놀다가 배고프면 다시 집 주변을 어슬렁거렸습니다. 어머니가 없는 사실이 확인되면 얼른 집에 들어가 밥을 먹고는 다시 뛰쳐나왔습니다. 밤엔 동네 빈 개집에서 쪽잠을 자기도 하고 가마니를 하나 구해서 산에서 자기도 했습니다.

"아들아, 그때 일은 갑자기 왜 물어? 그때 이 어미가 너희들 땜에 얼마나 속이 썩었는지 아나? 3일 동안 (니들은) 집에도 안 들어오고 도망 다녔지. 돈을 벌어야 하니 엄만 저녁에 호떡 장사 나가면 그때 들어와 밥 먹고 또 나가고 했어. 3일 지나니까 학교에서 연락이 왔어. 학교 안 나오면 퇴학시킨다고…. 그래서 너희들을 다시 학교 보내려고 잡으려 했지. 엄마가 잡으러 가면 언제 갔는지 다른 산등성이로 가 있고, 그곳으로 가면 저곳으로 가 있고…. 나중엔 좋은 말로 했지. 아들아 이리 와라. 내 안 때리마. 학교는 가야지. 너 그렇게 가마니 끌고 도망 다니면 나중에 거지 된다."

동생은 먼저 울면서 어머니에게 붙잡혔고, 저는 무서워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나 봅니다. 어머니는 몇 시간을 그렇게 설득했다고 합니다. 결국 전 울면서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어머니는 저의 옷을 몽땅 벗겼습니다. 벌거벗은 저는 포장집 나무 기둥에 끈으로 묶였습니다. 어머니는 산으로 올라 가 싸리나무 가지를 꺾어 와 저를 핏자국이 생기도록 때렸습니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고생하면서 사는데. 큰아들이란 녀석이 이 어미 속을 왜 이렇게 썩이노. 너 커서 뭐가 되려고 어린 것이 벌써부터 도둑질이고…."

저는 주요 부위만 가린 채로 어머니께 다신 안 그러겠다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어머니는 엉엉 울면서 저를 때렸습니다. 없이 살아도 공부 못 해도 삐뚤게는 살지 말라는 매였습니다. 훔치고 사기 치는 건 나쁜 짓이니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루를 살아도 진실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그 울부짖으며 때린 한대 한대 회초리는 저에게 그런 가르침으로 온몸에 새겨지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큰아들에게 사람답게 살라는 가르침을 주기 위해 손에 힘이 없어 질 때까지 매질을 해주셨습니다.

어머니는 다음 날 시내 중고 책방을 다니며 교과서와 필기구를 구해 주셨습니다. 책가방 살 돈은 없어 당분간 보자기에다 책을 싸 어깨에 짊어지고 다녔습니다. 일주일 만에 학교에 가니 5학년 담임 선생님은 동생을 데려오라 했습니다. 선생님은 강단에 앉으라 했습니다. 그리고 지휘봉으로 발바닥을 때렸습니다. 저와 동생은 또 한 번 창피한 마음도 들고 서럽기도 하고 아프기도 해서 많이 울었습니다. 그 후 저와 동생은 절대로 남의 물건을 훔치는 일 따윈 하지 않으며 살았습니다.

계속된 불효... 결혼하고 나서야 정신을 조금씩 차리다

중학교를 마치면서도 저는 빈둥거리기만 좋아하며 성실하게 살라는 어머니 말을 거역했습니다. 10대 후반 때는 서울로 가출했다가 10개월 후 다시 집에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20대 때도 저는 매우 이기적이었습니다. 직장에 다니며 돈 벌면 어머니에게 드리지 않았습니다. 모두 유흥비로 쓰곤 했습니다.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회사에 취직해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90년대 노조활동을 하게 되면서 어머니 심정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30대 초 결혼을 하고 나서야 정신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습니다. 40대에 자식을 낳고 키우면서, 2년 후면 50이 되는 이 나이가 되고서야, 또 검은 머리가 허옇게 변하고 있는 지금에 와서야 불효만 저질러왔다는 사실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 처지가 한심합니다. 비정규직으로 전전하고 있는 인생을 살고 있고, 나이 들어 변변한 직장 하나 제대로 구하지 못하고 빌빌거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어려서부터 부모 말을 잘 들었다면 지금처럼 이런 힘겨운 삶을 살지 않아도 될 것을, 지지리도 부모 속 썩인 결과가 지금의 제 인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머니와 함께 쑥을 뜯으며 문득 36년이나 지난 이야기가 생각나는 건 저도 이제 나이가 들어 간다는 것이겠지요?

쑥 뜯은 날, 저는 어머니 댁에서 저녁을 먹고 왔습니다. 어머니는 낮에 뜯은 쑥을 모두 저에게 담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계란 한 판과 함께 김, 찹쌀, 식용유, 밀가루, 김치를 한 보따리 싸 주셨습니다. 자식이 요즘 돈벌이가 힘들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렇게 먹을거리라도 챙겨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제 나이 2년 후면 50줄이고, 어머니는 70줄이네요. 살아오시면서 온몸이 골병들고 이제 나이가 있으신지 혈압도 높은 상태라 하네요. 앞으로 어머니 생이 또 저의 생이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여생이나마 호강시켜 드려야 할 텐데 그럴 수도 없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큰아들이 지금도 속 썩이나?"하는 말은 듣지 않도록 해 드리고 싶네요.

우선 어머니랑 뜯은 쑥으로 쑥떡을 해서 드시라고 갔다 드려야겠네요.

"어머니, 미안해요. 불효만 저질러 온 큰아들을 용서해 주세요!"

어머니와 뜯은 쑥으로 떡을 만들려고 쌀을 물에 불려 두었습니다.
▲ 쑥 대 쌀 어머니와 뜯은 쑥으로 떡을 만들려고 쌀을 물에 불려 두었습니다.
ⓒ 변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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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제가 제일 불효자 입니다" 응모글.



태그:#어머니, #불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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