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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추운 계절이 다가왔습니다. 이 맘 때면 누구보다 몸과 마음이 시린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홀로 지내는 어르신들입니다. 이 분들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과 몸 누일 방도 필요하지만 더욱 필요한 것은 이야기 나눌 사람입니다. 긴 세월 이어온 그 분들 생엔 한 시대가 고스란히 스며 있습니다. 사회복지법인 '우양'(www.wooyang.org)과 함께 그 분들을 찾아나섭니다. 어르신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으로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 [편집자말]
서른중반 젊은 시절의 유옥진 할머니
 서른중반 젊은 시절의 유옥진 할머니
ⓒ 유옥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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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어머니는 나한테 왜 그리 모질게 굴었는지 몰라. 가르치지도 않고 일만 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욕하고, 때리고... 지금도 어머니가 꿈에 보이면 무서워서 도망치다가 깬다우."

지나간 시절의 기억은 모두가 아픔뿐이라 되돌려 생각하면 눈물만 난다는 유옥진(77) 할머니. 그래도 부모님께 사랑받던 어린 시절이 있지 않았겠느냐는 말에 진저리를 치듯 고개를 저으신다. 가난한 집안의 맏딸로 태어나 어머니 구박 속에서 동생들을 돌보고 집안일을 했던 기억이 악몽과도 같다는 것이다.

"내 아래로 두 살, 세 살 터울로 태어난 동생들이 다섯이 됐는데 그 아이들 돌보는 건 모두 내 몫이었어. 대여섯 살부터 동생들을 업고 다니면서 집안 일도 하고 그랬지. 친구들 학교 갈 때도 나는 동생들 업고 집안 살림 하느라 학교는 꿈도 꾸지 못했어. 우리 어머니가 책 같은 것도 다 아궁이에 불쏘시개로 던져버리고 그랬거든."

학교라고는 일제시대 초등학교 2년을 다닌 것이 전부라는 할머니. 학교만 다녀오면 어머니의 불호령이 떨어지는 바람에 더 다니고 싶어도 다닐 수가 없었다.

"왜정 때 방학초등학교를 다녔는데 그나마도 2학년 다니다 말았어. 학교 가면 일본말 못한다고 선생님이 때리고 집에 오면 일 안 하고 공부한다고 어머니가 때리고... 내 나라 말도 아니고 남의 나라 말인데 숙제도 하고 집에 와서 복습도 해야 늘지. 그런데 학교 갔다 오면 책가방 열어볼 새도 없이 동생 업고 나가서 어머니 일을 도와야 하니 언제 배워."

아직도 어머니가 왜 그리 큰 딸인 자신에게 모질게 굴었는지 이해 할 수 없다는 할머니. 이웃사람들마저 어머니에게 계모도 아니면서 왜 그리 딸에게 모질게 구느냐고 할 정도였다니 어린 마음에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을까.

"일 못한다고 때리고, 게으르다고 욕하고, 눈치 없다고 꼬집고... 어린 시절부터 한 번도 기를 펴고 살았던 적이 없는 것 같아. 그런데 어린 시절부터 너무 기를 죽여 놓으니까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도 바보가 되더라구. 억울하게 누명을 씌워도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대꾸 한번 못 해보고, 욕을 해도 같이 욕을 한번 해보지 못 하고... 그저 속으로만 삭이고 살다보니 사람들도 나를 아주 바보 취급을 하는 거야."

동생들 돌보랴 집안일 하랴, 살림밑천이라는 맏딸 노릇을 하느라 어떻게 스무살이 되었는지도 모르는 어느 날 할머니는 결혼을 한다.

"어머니 말이 애가 셋 딸린 홀아비인데 재취자리이긴 해도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을 테니 시집을 가라는 거야. 요즘 애들 같았으면 처녀에게 재취자리가 무슨 말이냐고 난리를 쳤겠지만, 난 대꾸 한 번 하지 않고 어머니 시키는 대로 시집을 왔지. 어머니가 너무나 무서워서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살던 시절이었으니 더한 자리에 가라고 해도 두 말 않고 갔을 거야."

결혼하자마자 생긴 세 아들

단란해 보이는 가족사진이지만 숨겨진 슬픔이 있었다고
 단란해 보이는 가족사진이지만 숨겨진 슬픔이 있었다고
ⓒ 유옥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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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불호령이 무서워 생각할 겨를도 없이 치른 결혼식. 정말 결혼을 하고 보니 다섯 살, 일곱 살, 여덟 살짜리 아들들이 새까만 눈을 깜박이며 새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집을 가니 첫날부터 빨래가 산더미더라구. 홀아비에 아들만 셋이니 오죽하겠어. 하루 종일 애 셋 씻기고, 먹이고, 입히고, 바느질에, 빨래에 일은 왜 그리 많은지. 하다 보면 어느새 저녁이야. 그러면 그냥 지쳐 쓰러져 잠이 들면 또 아침이고... 남편이라는 사람은 결혼만 했지 자기 일에 바빠 나한테는 신경을 쓰지도 않고..."

할머니는 당신 소생 자식이 없다. 아무리 무심한 남편이라고 한들 스무살 꽃다운 신부를 얻었는데 둘 사이에 아이가 없다는 것이 이상했다.

"임신을 해 본 적이 없어. 결혼 전부터 어머니가 그러시더라구. 남편 될 사람이 이미 아이가 셋이나 있어서 배다른 아이를 원치 않는다고. 그러면서 나보고 '아나보라'(여성용 경구 피임약)를 꼭 먹으래. 어머니가 시키는대로 그 약을 먹었지. 몸에 좋은지 나쁜지도 모르고 그냥 어머니가 먹으라니 먹은건데 남편 죽기 전까지 먹었으니 17년은 먹었는가봐."

여성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기본적 본능인 임신과 출산의 욕구마저 약으로 잠재우며 살아야 했던 17년의 결혼 생활. 남편과 정은 좋았냐고 물으니 대답 대신 남인수라는 가수가 부른 청춘고백이라는 노래를 아느냐고 물으신다.

"내가 살아보니 말에는 거짓이 있어도 노래에는 거짓이 없는 것 같아. 나는 남인수의 <청춘고백>을 들으면 정말 내 심정인 것 같아서 눈물이 나. 어느 날 밤 가요무대에서 <청춘고백> 노래가 나오는데 그만 설움이 북받쳐 펑펑 울었네. '봉오리 꺾어서 울려 놓고 본체 만체 왜 했던가'(눈물) 이게 바로 내 심정이야."

<청춘고백>

헤어지면 그리웁고 만나 보면 시들하고 몹쓸 것 이내 심사
믿는다 믿어라 변치 말자 누가 먼저 말했던고
아~ 생각하면 생각사록 죄 많은 내 청춘

좋다 할 때 뿌리치고 싫다 할 때 달겨 드는 모를 것 이 내 마음
봉오리 꺾어서 울려놓고 본 체 만 체 왜 했던고
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죄 많은 내 청춘

할머니의 결혼 생활은 비록 경제적으로 궁핍하진 않았지만 알맹이가 빠진 포장과도 같은 것이었다. 남편이 필요했던 건 아내가 아니라 어머니를 잃은 세 아들의 육아와 집안 살림을 맡아 할 착한 여자였기 때문이다.

"아이들이야 엄마가 없었으니 오죽했겠어. 처음부터 낯을 가리지 않고 '엄마, 엄마' 부르며 잘 따르더라구. 애들 아버지 살아 있을 때만 해도 말썽 부리지 않고 착하게 잘 컸어. 하지만 남편은 사업한다 하면서 밖으로만 돌고... 정이라고는 모르고 살았어. 그러다가 애들 조금 키워놓고 나니 먼저 가 버리고, 나이 서른일곱에 혼자 되었어."

서른일곱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한 할머니. 비록 배 아파 낳은 자식은 아닐지라도 지금껏 키워 온 세 아들이 있기에 홀로 된 인생 역시 남은 세 아이들을 위해 살다보면 좋은 끝이 있겠지 생각했었다. 

"남편이 갑자기 떠나고 나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거야. 아이들은 여전히 학교를 다 마치지 못한 상태고. 그래서 가지고 있는 것을 하나씩 팔아서 애들 학교 보내고 먹고 살았지. 가진 것도 많지 않았지만 있는 거 빼먹고 사는 거 오래 안 가. 금방 형편이 어려워지더라구."

지나간 시절을 돌이켜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는 유옥진 할머니
 지나간 시절을 돌이켜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는 유옥진 할머니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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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큰 아들이 직장을 구하고 결혼도 해서 걱정에서 놓여나는가 했지만 그것도 바람대로 되지 않았다. 친어머니가 아니라는 것 때문인지 고부간 갈등이 심해 도저히 더 이상은 함께 살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때부터 집을 나와 홀로 살기 시작한 것이 어느새 30년이 다 돼간다.

"내 배 아파 낳은 자식들도 부모를 버리는 세상인데 낳지도 않은 자식에게 뭘 바라겠어. 그저 한때 내가 같이 살았고 나에게 어머니, 어머니 했던 애들이 있었다고 생각하며 사는 거지. 키워준 공 생각하면서 서운한 맘 먹으면 나만 더 괴로운 거야. 다 잊고 살아야지."

빈 주먹으로 아들집을 나와 당장 살 길이 막막했던 할머니는 주변 사람 도움으로 인형공장에 취직을 하게 된다. 가진 돈이 없어 보증금 없는 월세를 살던 때였기에 인형공장에서 한 달 일하고 받은 월급 35만원은 큰돈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월급을 받으니 살겠다 싶더라구. 그 돈 받아서 방세 내고 조금씩 모아서 보증금도 마련하고, 제품공장에 시다도 몇 년 했고... 전에는 이 근처에 공장이 많아서 일을 하러다니기 좋았는데 이제는 공장들이 다 문을 닫아서 우리 같은 사람은 일할 데가 없어."

이십년 넘게 다니던 인형공장과 제품공장이 사업 부진으로 문을 닫게 되니 당장 먹고 살 거리를 마련하기 위해 봉투라도 접어야 했다는 할머니. 몇 년 동안 봉투 접는 일을 하다 보니 손이 다 닳아 지문이 반질반질해질 정도다.

"봉투 100개 접으면 150원이야. 하루에 300개도 접고 400개도 접고... 늙으면 잠도 없잖아. 봉투를 접다 보면 잡념도 없어지고... 봉투가 없을 땐 목동복지관으로 수의도 만들러 가는데 점심값도 부담이 되더라구. 점심값이 천오백원인데 그것도 열흘이면 벌써 만오천원이잖아. 오고가는 차비하고 점심값 하고 나면 별로 남는 건 없지만 그래도 노는 것보다는 낫지."

지난 가을까지 봉투 접기며, 수의 만들기며 적은 수입이지만 일을 쉬지 않았던 할머니. 하지만 당분간은 다시 일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지난 11월 중순 친구 딸의 초청을 받아 호주에 가서 무릎관절 수술을 받고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랑 어릴 적부터 친한 동네 친구야. 젊은 시절 친구네 집이 가난해 애들하고 옥수수가루만 먹고 살았는데 내가 남편 몰래 쌀도 퍼다 주고... 이렇게 저렇게 도움을 좀 줬어. 나중에 내가 도움을 받으려고 그렇게 한 건 아니었는데... 고맙게도 그걸 잊지 않고 호주 사는 친구 딸이 날 데려다 이렇게 관절 수술을 시켜줬네. 수술하고 바로 돌아왔는데 물리치료를 받아야 한다지만 그것도 하루에 5천원이나 하니 다닐 수가 있어야지."

부모 덕도, 남편 덕도, 자식 덕도 없다는 할머니. 하지만 늘그막에 외로운 처지를 동병상련하며 같이 울어 줄 수 있는 친구들이 있어 그나마 위안이 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젊어서 호강 필요 없어. 젊을 땐 힘들게 살아도 늙어 호강을 하면 끝까지 호강한 게 되는 거잖아. 요즘 들어 해로하는 노부부들 모습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어. 길에서 할아버지가 앞서 가면서 뒤에 오는 할머니에게 '어서 와' 이러면서 손짓하는 걸 보면 너무 보기가 좋아서 눈물이 나. 그러면서 난 왜 저런 복이 없어 이렇게 외롭게 늙어가나 한탄도 하지..."      

유옥진 할머니는?
서울시 강서구 화곡동 반지하방에 거주중이다. 노령연금 8만4천원과 우양에서 지원하는 쌀7kg이 수입의 전부이다. 건강할 땐 지역 복지관에서 수의자활이나 봉투접기 자활 등을 통해 생활비의 일부를 충당했지만 무릎 연골 수술 후에는 당장 병원비가 없어 재활치료도 제대로 못 받고 있는 상황이다. 

수술 후 재활치료는 물론 제대로 된 식사조차 잘 하지 못하셨다는 할머니는 영양결핍으로 피부질환까지 생겨 얼굴이 붓고 각질이 심하게 일어나고 있다. 무릎관절 수술은 받았지만 재활치료를 열심히 받지 않으면 또 다른 후유증이 생기는 걸 알기에 병원비를 걱정하시는 할머니 상황이 더욱 안타깝기만 하다.

덧붙이는 글 | * 어르신들 친구가 돼주세요.

이 글을 읽고 어르신들에게 답글을 보내주세요. 사회복지법인 우양(www.wooyang.org/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460-1, 02-324-0455)으로 편지나 이메일을 보내주시면 어르신들에게 전해드리겠습니다. 한 끼 식사보다, 하루 잠자리보다 더 큰 선물이 될 것입니다. 어르신들을 위한 후원은 사회복지법인 우양으로 부탁드립니다.



태그:#유옥진할머니, #독거노인, #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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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아줌마가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바라 본 '오늘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 손엔 뒤집게를 한 손엔 마우스를. 도마위에 올려진 오늘의 '사는 이야기'를 아줌마 솜씨로 조리고 튀기고 볶아서 들려주는 아줌마 시민기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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