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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추운 계절이 다가왔습니다. 이 맘 때면 누구보다 몸과 마음이 시린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홀로 지내는 어르신들입니다. 이 분들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과 몸 누일 방도 필요하지만 더욱 필요한 것은 이야기 나눌 사람입니다. 긴 세월 이어온 그 분들 생엔 한 시대가 고스란히 스며 있습니다. 사회복지법인 '우양'(www.wooyang.org)과 함께 그 분들을 찾아나섭니다. 어르신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으로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 [편집자말]
가정부로 일하던 주인집을 따라 미국에도 다녀왔다. 2년의 미국생활 끝에 아들과 함께 살 작은 전세방을 마련할 수 있었다고.
 가정부로 일하던 주인집을 따라 미국에도 다녀왔다. 2년의 미국생활 끝에 아들과 함께 살 작은 전세방을 마련할 수 있었다고.
ⓒ 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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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 어린 나이에 시집, 5년 후 한국전쟁 때 남편 잃어

"내 나이 열여섯 쯤일 거예요. 장단군에서 가마니 짜기 대회가 열렸었거든요. 그때 내가 대회에 나가서 1등을 했다우. 나이는 어려도 손끝이 여물고 재주가 있어서 못하는 게 없었지. 일본군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강제로 공출을 해 가는데 우린 가마니 오백장을 내라는 거야. 그 오백장도 거의 내 손으로 다 짰어요. 자질, 바디질도 얼마나 잘 했다구."
* 자질 : 바늘대를 이용해 날줄로 쓰일 짚을 먹이는 일, 바디질 : 베나 가마니 따위를 짜는 데 바디로 씨를 치는 일

이금예(81·1929년생) 할머니의 고향은 개성시 장단. 어린 시절 추억을 들려 달라니 평생을 손에서 놓지 못하셨다는 "일" 이야기부터 들려주신다. 보릿고개를 모를 정도로 부농에 속한 집안이었지만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논일, 밭일은 물론 집안일까지 도맡아 해왔다. 그런 때문일까. "일"을 빼 놓고는 당신의 삶을 이야기 할 수 없으시단다.

"어린 시절부터 오늘까지 일을 쉬어 본 적이 없어요. 하루도 놀지 않고 열심히 일을 했지요.  논일이고 밭일이고 음식이고 바느질이고 가리지 않고.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일을 하는 게 참 좋았나 봐요. 일을 하면 밥이 생기고 돈이 생기고 또 보람도 있고... 지금도 가만히 앉아 놀고 있으면 '내가 지금 뭐 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잠시도 앉아 있거나 누워 있지 못해요."

17세 어린 나이에 한 동네 사는 다섯 살 많은 총각을 신랑으로 맞은 할머니. 지금도 남편과 함께 했던 짧은 결혼 생활을 생각하면서 눈물지을 때가 많단다. 남북으로 헤어져 생사조차 확인할 길 없는 사람을 그리며 살아온 지 60년이 다 되어가지만 아직도 굳은 살이 덜 배겼는지 떠올릴 때마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고.

"그 시절엔 신랑 될 사람 얼굴도 못 보고 결혼 할 때지만 난 혼례식 전에 남편 될 사람을 봤어요. 남편이 탄광으로 부역을 가게 됐는데 부역 가기 전에 우리 친정집에 들렀었거든요. 몇 년 살지 못할 운명이라서 그랬던가. 결혼해서도 각시한테 얼마나 잘 해주던지. 그 시절엔 지금처럼 내 놓고 표현하지 못하던 시절이었잖아요. 하지만 남편은 달랐어요. 논일을 하다가도 밭을 매다가도 각시가 보고 싶어 잠깐 다녀갈 정도였으니까. 각시를 너무 위해 줘서 어른들이 흉을 보셨다니까요."

1945년 해방이 되던 해에 혼례를 치른 할머니는 5년 후인 한국동란에 남편과 헤어졌다. 두 살짜리 아이를 남기고 사라진 남편. 새파란 청춘 스물둘에 청상 아닌 청상이 된 것이다.

"회의를 한다며 마을회관 같은 곳에 동네 청년들을 모이라고 해 놓고는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은 거예요. 회의하러 갔다는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뭐 하러 갔는지 소식을 알 수 없고 전쟁이 났지 뭐예요. 그래서 시댁식구들과 함께 난리를 피해 내려왔지요. 스물둘에 두 돌 된 아이를 업고 피난을 나와서 안 해 본 일 없이 살았네요."

꿈결처럼 짧았던 할머니의 행복은 한국동란으로 산산이 부서지고 이후로는 남편 사이에 낳은 유일한 핏줄인 아들을 위해 희생한 삶이었다.

"시아버지와 함께 살 땐 단 한 번도 내가 품삯을 받아 본 적이 없어요. 저는 사시 밥과 참을 챙겨 먹는 것으로 만족했구요. 품삯은 시아버지 몫이었지요. 얼말 받으셨는지 어디에 쓰셨는지 알지 못하고 그저 매일 일만 했어요. 배만 곯지 않아도 다행인 시절이었기 때문에 내 품삯을 시아버지가 가져간다고 해도 불만을 가져 해 본 일이 없어요."

바느질로 아들 고등학교 보내, 주인집 따라 미국생활 하기도

할머니는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야 비로소 아들과 분가를 했다.

"아들 고등학교는 보내야 하는데 돈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셋방살이 하던 집을 개조해서 조그맣게 한복집을 차렸지요. 처음엔 한 벌, 두 벌로 시작을 했는데 바느질이 좋았는지 소문이 나서 한동안 바쁘게 일을 했네요. 그걸로 아들 고등학교를 마쳤어요."

밤잠을 자지 못하고 눈에 핏발이 서도록 열심히 일을 했지만 할머니의 가난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열심히는 살았지만 워낙에 바닥이 없어서 그런지 일어서기가 쉽지 않더라구요. 그래서 바느질을 그만두고 남의 집에 가정부 일을 다니기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주인집을 따라 미국에도 가게 됐지요. 미국 워싱턴이라는데... 얼마나 좋은지, 이런 세상도 다 있구나. 했네요."

할머니의 살아온 세월을 말해주는 굵고 거친 손.
 할머니의 살아온 세월을 말해주는 굵고 거친 손.
ⓒ 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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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 문제로 2년만에 미국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할머니. 덕분에 전세방을 얻을 만한 돈은 만들어졌지만 아들 뒷바라지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는 일을 쉴 수는 없었다.

"남의 집일을 계속 다녔지요. 놀면 뭐해요. 하루 일하면 그만큼 돈을 버는 건데. 일하지 않으면 누가 돈을 주나요? 솜씨가 좋아서 그런지 부지런해서 그런지 한번 들어가면 나간다고 할까봐 다들 걱정을 했어요. 그렇게 벌어서 아들 공부 마쳐주고 결혼시키고... 아들 장가보낸 후에도 간병인을 하면서 내 생활비를 벌어 썼지요."

애지중지 키운 외아들이지만 할머니는 결혼과 함께 아들의 살림을 내주었다. 당신이 못해 본 아름다운 결혼생활을 아들이 누리길 바랐던 때문이며 그때만 해도 젊었기 때문에 자식내외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던 때문이란다.

"아들이 결혼 한 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아쉬운 말을 해 본 적이 없어요. 처음엔 그저 아들 내외 행복하게 사는 것만이 보람이었지요. 그래서 나는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고 니들 부부만 행복하게 잘 살라고 했어요. 그땐 나도 벌 능력이 되니 그렇게 말했던 건데... 정말 한 번도 생활비나 용돈을 안주데요."

젊은 시절 손톱이 닳고 손마디가 불거지도록 열심히 살아왔건만 여든 한 살 노구가 된 지금 할머니에게 남은 것은 남의 집 반 지하 냉방에서 홀로 잠을 청해야 하는 '독거노인'이라는 쓸쓸한 수식어뿐이다.

남의 집 반지하방 거주, 다른 노인 위해 봉사하며 살아

어려운 상황에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으시는 이금예 할머니. 당신의 남은 날들을 봉사하며 살고 싶다고 하신다
 어려운 상황에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으시는 이금예 할머니. 당신의 남은 날들을 봉사하며 살고 싶다고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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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있지만 몇 년 전 결혼에 실패하고 큰 빚까지 떠안게 된 상황이라 도움이 되지 못하는 데다가 오히려 호적상 아들이 있다는 이유로 당장 도움이 필요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수급자에서도 제외되었다. 차상위 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취로사업마저 끊긴다면 당상 살길이 막막한 형편. 하지만 할머니는 우울해 하거나 좌절하는 대신 밝고 당당하게 살며 오히려 다른 노인들을 위해 봉사를 하신다.

"이 동네 노인정에서 밥 해 드리는 봉사를 한 지 벌써 몇 년 되네요. 나보다 어린 할머니들도 많지만 내가 꼭 하고 싶어서요. 밥하고 반찬 만드는 일이 내가 잘하는 일이거든요. 내가 잘 하는 일로 남을 도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아요. 오히려 감사한 일이지요."

"사실 요즘 노인들 자식들과 함께 산다고 해도 세상이 달라져서 그런지 며느리에게 밥 얻어먹고 다니는 사람 많지 않아요. 노인정 와서 친구들과 놀면서 점심, 저녁 때 맞추어 금방 지은 밥에 뜨끈한 국에 먹고 나면 얼마나 든든하겠어요. 따끈하게 밥 해주지, 노인들 입맛 맞게 부드러운 반찬 만들어 주지, 할머니들이 모두 고맙다고 해요. 그게 보람이지요. 그래서 일하는 게 전혀 힘들지 않아요. 오히려 매일 매일이 신나고 재미가 있지요."

세상이 좋아져 사먹기도 하고 기계의 힘을 빌리기도 하지만 장이든 두부든 묵이든 떡이든 전통방식으로 직접 만들어 먹어야 제 맛이라는 할머니. 이쯤 되면 할머니를 거북노인정의 할머니 대장금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부지런이 반 복이다"라는 말을 좋아하신다는 할머니. 비록 관절염으로 한쪽다리가 불편하시지만 그런 중에도 일할 수 있는 건강이 있고, 일하는 재주와 솜씨가 있고, 타고난 부지런함이 있어서 복으로 여기고 사신다니 젊은 사람으로서 귀감이 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두어 시간 넘게 방바닥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할머니의 이야기에서 전해오는 따뜻함에도 불구하고 불김 없는 방바닥으로부터 올라오는 냉기는 어쩔 수가 없다.

"할머니 춥지 않으세요? 이런 날씨에는 난방을 하셔야지 감기 드시면 어쩌시려구요. 바닥이 차서 발이 시려울 정돈데...?"

"난 추위를 잘 타지 않아요. 그래서 한겨울에도 보일러를 잘 키지 않고 사는데 견딜만해요. 다행히도 좋은 체질을 타고 났지요? 그나저나 손님이 추워서 어쩌시나? 방석이라도 하나 더 깔아드릴까?"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길. 동행했던 사회복지법인 우양의 사회복지사가 귀띔 해주지 않았다면 난 정말 할머니를 강철체력으로 오해할 뻔했다.

"이금예 할머니 아까는 추위를 타지 않는다고 하셨지만 그건 듣기 좋게 하시는 말씀이구요. 당장 난방비 낼 돈이 없으니 보일러를 켤 수 없는 거죠. 그래도 워낙 씩씩하셔서 그런지 없다, 아쉽다, 도와 달라 그런 말씀은 하지 않으세요. 오히려 주변 더 어려운 노인 분들을 도와주려고 노력하시구요. 그래서 저도 이금예 할머니를 통해 배우는 점이 많습니다."

이금예 할머니는?
서울 서대문구 북가좌동 반지하방 거주. 월세(500/15만원). 1년에 서너 달은 구청에서 실시하는 공공근로에 참여 20만원의 보수를 받아 생활비에 보태고 있지만 공공근로가 중단되는 겨울 석 달 동안은 매월 사회복지법인 우양에서 제공하는 쌀 7kg이 수입의 전부다. 그동안 쓰지 않고 모아 저축해 둔 작은 돈으로 겨울을 난다고 하지만 난방비를 감당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5년 전 각막기증을 하셨고 11월 중 시신기증서에 서명을 하신단다. 이승에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늙은 몸이지만 유용하게 사용되면 보람 있겠다고 하신다.

덧붙이는 글 | * 어르신들 친구가 돼 주세요.

이 글을 읽고 어르신들에게 답글을 보내주세요. 사회복지법인 우양(www.wooyang.org/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460-1, 02-324-0455, wy-welcome@hanmail.net)으로 편지나 이메일을 보내주시면 어르신들에게 전해드리겠습니다. 한 끼 식사보다, 하루 잠자리보다 더 큰 선물이 될 것입니다. 더불어 우양에도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태그:#이금예할머니, #독거노인, #노령화, #우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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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아줌마가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바라 본 '오늘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 손엔 뒤집게를 한 손엔 마우스를. 도마위에 올려진 오늘의 '사는 이야기'를 아줌마 솜씨로 조리고 튀기고 볶아서 들려주는 아줌마 시민기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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