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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름 : 나무를 안아 보았나요

- 글 : 조안 말루프

- 옮긴이 : 주혜명

- 펴낸곳 : 아르고스 (2005.11.7.)

- 책값 : 9800원

 

 

 (1) 아기를 꼬옥 안아 보았나요

 

 요 며칠 사이, 인천에서 전철을 타고 서울로 일하러 가는 길에 뜻하지 않게 자리에 앉고 있습니다. 굳이 자리에 앉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으나 저한테까지 자리가 나기 일쑤이고, 또 다른 사람들이 빈자리가 있어도 안 앉아서 제가 앉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 빈자리에 앉은 다음 '왜 다른 사람들이 여기에 안 앉으려 했는지'를 깨닫습니다. 제 옆에 앉은 다른 사람들이 다리를 쩍 벌리거나 화장품 냄새를 너무 짙게 내거나 엉덩이가 팔꿈치로 밀거나 하면서 고달프게 하기 때문입니다.

 

 참고 견디다 못해 슬쩍 눈을 찌푸려 보기도 하지만 못 본 척입니다. 이럴 바에는 그냥 서서 가자며 자리에서 일어나 서서 책을 읽습니다. 이렇게 제가 앉던 자리가 비며 제 앞서 서 있던 이가 앉곤 하는데, 이분들은 좁거나 말거나 끝까지 잘 앉아서 가시고, 또 이내 잠들며 곯아떨어집니다. 저로서는 딱히 내 자리를 내어준다는 생각이 있지도 않습니다만, 제 앞에서 빈자리 얻는 분들 가운데 고맙다는 말 한 마디 건넨 사람은 아직 없습니다.

 

 아침저녁 미어터지는 때에 아기나 어린이를 데리고 타는 분이 드물게 있습니다. 어이하여 이런 때에 이 전철을 타시나 싶어 안쓰러운데, 이분들은 틀림없이 이분들 다른 일이 있어서 이때에 꼭 타야 했겠지요. 이때 제가 자리에 앉아 있다면 얼마든지 내어드리겠지만, 아기나 어린이를 데리고 타는 어머니나 어버이를 마주칠 때에는 으레 서 있곤 합니다. 아이들이며 어버이며 답답하고 힘들겠구나 싶어 걱정이 되지만, '자리에 앉은 다른 분'들 가운데 힘들지 않은 분이 없을 테니, 아기를 안고 있든 다리 아파 괴로워하는 어린이 손을 붙잡고 참으라고 말하고 있든 마음써 주는 모습을 보기는 더없이 힘듭니다. 도시 문명을 탓할 일은 아니지만, 이만큼도 안 되나 싶어 속이 쓰립니다.

 

 하기는. 찻길 건널목에서 푸른불을 기다리고 있을 때, 푸른불이 들어와도 버젓이 가로지르는 자동차나 버스가 퍽 많으니까요. 건널목 가운데쯤을 지나고 있어도 부웅 지나가는 차가 꽤 되니까요.

 

 그렇지만, 자가용을 살금살금 모는 이 또한 많고, 골목에서 아이들을 널리 헤아리면서 아주 천천히 달리는 이 또한 많습니다. 빵빵거리지 않고 느긋하게 기다리는 이 또한 많으며, 멈춤줄에 잘 멈추며 건널목이 빨간불로 바뀌어도 곧바로 달리지 않고 더 기다려 주는 이 또한 많습니다. 이웃을 헤아리지 못하는 매무새일 때에는 두 다리로 걸으나 전철과 버스를 타나 자가용을 몰거나 자전거를 끌거나 마찬가지가 되어 볼썽사납습니다. 이웃을 헤아리는 매무새일 때에는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반갑고 거룩하고 아름답습니다.

 

 숨쉴 틈 얼마 없이 미어터지는 지옥철에서도 공짜신문을 쫙 펼치면서 옆사람이나 앞사람 머리통이나 얼굴이 신문으로 긁히도록 하는 사람들한테 치이며 광화문 한글학회로 온 오늘 아침, 등판과 얼굴에 흐르는 땀을 훔치면서 조용히 생각에 잠기면서 하루일을 엽니다. '그 사람들은 당신 아기이든 아는 사람 아기이든 안아 본 적이 있을까?' '그 사람들은 당신 어린아이가 어른들 틈바구니에 끼여 옴쭉달싹 못하고 있을 때 그예 밀어붙이기만 할 수 있을까?' '그 사람들은 너덧 살짜리 아이는 서서 가도록 하고 당신들은 오래오래 자리에 앉아 갈 수 있을까? 아버지로서, 또는 어머니로서?' '그 사람들은 당신 아이를 어떻게 사랑하고 무엇을 사랑하며 왜 사랑하고 있을까?'

 

 

 한참 셈틀에 눈을 박고 일하자니 눈이 아픕니다. 화면을 끄고 뒷간으로 가서 오줌을 누고 낯을 씻은 다음 창밖을 내다봅니다. 바람이 퍽 거세게 부는 오늘은 서울하늘조차 꽤 파랗습니다. 파랗고 높은 하늘에 하얀구름 조금조금 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늘 파랗고 구름 하얀 날은 골목마실 하면서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어느 사무실이든 건물 안쪽에 깃들어 있고, 어느 사무실이든 한낮 햇살 따갑고 눈부시게 들어오는 때에도 형광등 불빛을 환하게 켜 놓고 있습니다. 낮밥 때가 되어 이때만이라도 불을 꺼 놓고 도시락을 먹으려고 하니, "사람이 있는데 왜 불을 끄고 있어?" 하면서 다시 불을 켜고는 낮밥 먹는다며 밖으로 나가십니다. 다른 일꾼들이 모두 나가고 난 뒤 슬며시 다시 불을 끕니다. 다문 삼십 분이나 한 시간 만이라도 한낮에는 창문으로 햇살을 받으면서 책을 읽거나 쉬거나 단잠을 자거나 일을 하고 싶습니다. 이 가을을 이 가을답게 느끼고 이 파란하늘을 이 파란하늘로 느끼며 이 거센 바람을 거센 바람으로 제 살결이 받아들이도록 하고 싶습니다.

 

 

 (2) 《나무를 안아 보았나요》 읽기

 

 지난 9월 22일부터 읽고 있던 《나무를 안아 보았나요》라고 하는 199쪽짜리 책을 다 읽습니다. 하루면, 아니 몇 시간이면, 아니 인천에서 서울로 가거나 서울에서 인천으로 오는 전철길이면 큰 어려움 없이 다 읽을 만한 부피인 작은 책인데, 금세 읽어치우자니 몹시 아쉬워서 읽고 쉬고 읽다가 멎으면서 10월 19일 아침에 끝을 봅니다.

 

 이 책을 처음 만나 읽던 지지난주, 책 한귀퉁이에 몇 마디 생각부스러기를 끄적였습니다. "하루아침에 읽어치울 수 없습니다. 누군가는 이 놀랍도록 반갑고 기쁘며 좋은 책을 하루아침에 써냈을는지 모르는데, 이러하다 하여도 우리는 이이가 온삶에 걸쳐 배우고 삭이고 가르치고 나눈 끝에 어느 하루 온힘을 모아 책 하나를 써냈음을 헤아려야 합니다. 그리고, 웬만한 거의 모든 책은 몇 해에 걸쳐 조금씩 꾸준히 쓰는 가운데 한 권으로 모두어집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여러 해, 또는 여러 열 해에 걸쳐 피와 땀이며 사랑과 믿음이며 깃든 책을 하루아침에 읽어치울 수 있겠습니까. 하루 동안만 반가움과 기쁨을 맛보기에는 참으로 아쉽고 아깝고 슬프지 않습니까. 여러 해, 또는 여러 열 해에 걸쳐 아주 조금씩, 차근차근 읽고 또 읽고 다시 읽으며 내 마음을 채우고 덥히고 북돋워야지 싶습니다."

 

 대학교에서 생물학과 환경학을 가르친다는 글쓴이 조안 말루프 님은 생물학이라는 학문을 책에 갇히거나 연구실에 매인 지식으로는 다루지 않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와 내 이웃과 우리 터전인 자연을 꾸밈없이 들여다보는 매무새로 생물학을 가르치고, 사람과 자연이 도시나 시골에서 슬기롭게 어울리는 길을 일러 주는 환경학을 가르치겠구나 싶습니다.

 

 이 책에 처음 붙은 이름은 "Teaching the Trees, Lessons from the Forest"라고 합니다. 이 이름을 우리 말로 옮기며 "나무를 안아 보았나요"로 고쳐썼는데, "나무를 가르치고, 숲한테서 배우기"로 나아가는 첫걸음은 나무를 꼬옥 안아 보는 데에서 뗀다고 합니다. 나무를 온몸으로 껴안아 보지 않고서는 나무를 가르치거나 배울 수 없으며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나무를 온 가슴으로 느껴 보아야 비로소 나무를 가르치거나 배울 수 있다고 합니다.

 

 그지없이 마땅한 소리입니다. 나무란 사람과 같은 목숨인데, 나무를 안아 보지 않고 어찌 나무를 말할 수 있을까요. 나무란 사람과 마찬가지로 온 우주가 깃든 목숨인데, 나무를 안아 보려고 다가서지 않으며 나무를 배운다든지 다룬다든지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들은 나무를 나무 그대로 바라보지 않습니다. 나무를 껴안는 일도 드뭅니다. 나무라는 낱말은 다 알고 있겠지만 나무라는 삶과 목숨은 제대로 모릅니다.

 

 이와 비슷하게 책을 살포시 껴안는 사람이 얼마나 될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자전거를, 흙길을, 물과 바람을, 어린이를, 할매 할배를, 무지개를, 비와 구름을, 산과 들을, 논과 뻘을, 바다와 시내를, 골짜기와 들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잘 모르겠습니다. 아쉬우나마, 또 모자라나마 이 같은 작은 책이라도 한 권쯤 읽으면서 우리 생각과 마음과 넋과 얼을 새롭게 추스르거나 다독일 수 있으면 좋겠다고 느낍니다. 우리들 걸어갈 앞길에 좋은 마음벗을 사귀고 좋은 마음스승을 모실 수 있으면 반가우리라 생각합니다.

 

 

 (3) 슬쩍 들여다보기

 

 책을 덮고 나서 다시 한 번 들춥니다. 책을 읽으면서 가슴으로 한 줄 두 줄 스며든 대목을 차근차근 되짚으면서, 이 알맹이를 섣부른 지식조각이 아닌 마음밥으로 잘 받아먹자고 다짐합니다. 밑줄을 긋거나 별을 그린 몇 대목을 옮겨적어 봅니다.

 

 

[15~16쪽] 숲에서는 특별한 향기가 난다고 늘 생각했던 나였지만 그날은 숲에 들어가기도 전에 숲 향기를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자연림이 사라지기 전, 그러니까 나무와 이끼, 새와 곤충이 함께 호흡을 섞던 그 먼 과거에는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이 땅에서도 이런 향기가 나지 않았을까? … 우리는 숲을 잃고도 우리가 진정 잃은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30, 33쪽]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요즘 아이들은 사람이 아닌 어떤 대상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걸 불편하게 여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그것이 보호해야 되는 대상이라면 불편해 하는 마음은 더 커지는 것 같다. 내가 학생들에게 나무는 지키고 보호해 줘야 하는 대상이라고 말을 하면 학생들은 금방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면서 몸을 비튼다. 그러나 나는 그들 모두가 깊이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고자 애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내가 살아숨쉬는 이 세상을 소중히 여기듯이, 그들은 자신이 소중하게 여겨야 할 무엇인가를 기다리며 여전히 방황하고 있다 … 짚신벌레, 뱀, 나무에게서 누가 경이로움, 경외감, 존경 따위를 느낀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학생들에게 이들도 경이로운 존재이며, 이들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44∼45쪽] 나는 양버즘나무에만 전적으로 의존해서 사는 아홉 마리의 곤충들을 알고 있다. 그 외에도 아마 내가 모르는 곤충들이 더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양버즘나무 한 그루를 벨 예정이라면 어쩌면 그 나무 위에서 자신의 꿈을 찾게 될 아이 하나와 최소한 다섯 종의 곤충들을 잃게 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어느 날 내가 내 친구에게 이런 사실을 설명해 주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 나무는 환경을 이루는 한 요소가 아니라, 나무 자체가 환경이구나."

 

[55쪽] 사람들은 곰을 먼저 죽이고, 그리고 나서 너도밤나무 숲을 죽인다. 친구와 내가 다시 숲을 찾았을 때 나무는 대부분 벌목을 당한 후였다. 그날은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벌목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말할 수 없는 고요함 때문에 숲은 더 슬퍼 보였다. 막 잘려나간 나무 밑동은 수액으로 젖어 있었고 남아 있는 나무들은 무력하게 잘려나갈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잘린 나무들이 집이나 가구를 만들 목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도 아니다. 이들은 짓이겨져서 버려지거나 태워 없어진다. 그나마 가장 나은 건 나무 판지를 만들기 위한 펄프로 가공되는 경우다. 이 숲의 주인은 이렇게 나무를 통째로 내어줘도 아주 적은 돈을 받을 뿐이다. 그런데 왜 나무를 베냐고? 그것은 너도밤나무가 가치 있지 않기 때문이다(물론 이것은 자본주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다). 앞으로 40년이 지나도 이 너도밤나무들은 지금보다 더 자랄 뿐, 여전히 가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주인은 나무를 베어내는 것이다.

 

[61, 69, 73쪽] 그 순간 우린 우리의 잘못을 깨달았다. 죽은 나무는 하늘다람쥐가 가장 좋아하는 보금자리였던 것이다. 이후에도 나는 하늘다람쥐의 보금자리라는 것을 모르고 죽은 나무를 베어버렸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다. 우리에게 아무 쓸모없는 죽은 나무들조차 생태계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고 지내는 것이다 … 더 슬픈 것은 이곳이 이 근처에 남은 마지막 활엽수림이라는 사실이다. 이곳에 있던 나무들이 베어지던 날 이곳에 살던 새들과 동물들은 더 이상 갈 곳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숲 주위에 이들이 거처를 옮길 만한 곳은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 하지만 산림 관리원이 당신에게 말해 주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도룡뇽과 도마뱀, 그리고 소나무좀을 유용한 양식으로 보는 새들이 함께 어우러져서 사는 건강한 숲에 사는 소나무좀은 절대 소나무에게 심각한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76, 78∼79쪽] 딱따구리가 둥지를 만드는 데에는 보통 1년에서 6년이 걸린다 … 놀랍게도 이들이 주로 먹는 먹이는 바퀴벌레였다. 우리는 바퀴벌레를 먹어 주는 이 새를 사랑해야 한다 … 다만 내가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점은 우리가 나무를 단지 자원으로만 보고 있다는 점이다 … "이제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늙고 아름다운 나무는 없어." 그렇다. 노목들은 죽음이 얼마 안 남았지만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줄 수 있는 나무들이다 … 나는 아이들과 젊은이들만 살고 있는 도시에는 살고 싶지 않다. 그런데 우리가 숲이라고 부르는 곳에는 어린 나무와 젊은 나무만 있을 뿐이다.

 

[91∼92쪽] 바구미의 일생이 경이로운 이유는 누군가 그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인내심을 가지고 이 곤충들의 행동을 쫓아서 그것을 기록한 사람은 누구일까? 그 사람은 성충바구미가 나오는 것을 보기 위해서 얼마나 오래 참나무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을까?

 

[112쪽] 내가 꽃밭에 아카시아 나무를 두기를 원하느냐, 원치 않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어머니 자연은 그것을 두기로 결정했고, 자연의 선택이 가장 옳다는 걸 안다. 나는 나무와 싸우기를 멈추고 그냥 물러서서 두고보았다. 그냥 내버려두자 나무는 놀라울 정도로 빨리 자랐다. 이제는 15미터가량이 되어서 정원의 한 구석을 든든히 지키고 있다. 나무는 이제 나의 쉼터다.

 

[127, 129, 140쪽] 종이를 값싸게 얻기 위해 숲을 아름답게 수놓는 붉은꽃산딸나무 꽃을 포기할 것인가? 나는 더 이상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기를 바란다 … 나는 내 손 안에 있는 종이가 나무뿐만 아니라 딱정벌레와 아름답게 지저귀던 새들과 벌레를 잡아먹던 박쥐 같은 다른 생명들이 사라진 대가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이 이 작은 도시에 단지 나 하나라는 사실이 몹시도 슬프고 외로웠다 … 우리는 아이들의 교육과 노후를 대비하는 데에는 많은 돈을 쓰고 있지만, 정작 후대에게 물려주어야 할 숲과 산호초와 강을 파괴하고 오염시키는 일에는 무신경하다.

 

[159, 160쪽] 공원 조성 책임자는 자연과 생태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스스로 숲길을 걸어 본 적이 별로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결국 그는 그곳의 나무들을 판 돈으로 공원 조성에 필요한 자금을 충당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숲이 지금 그대로 보존되길 바라는 나로선 그들의 결정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 나는 사람들이 나처럼, 울창한 숲길을 걸으면서 행복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 드디어 어느 날 경고도 없이 벌목 기계가 나타났다. 물론 그것은 합법적인 일이었다.

 

[173∼174쪽] 나는 남성을 혐오하는 사람도 아니고, 남성이 우리의 모든 환경 문제를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폭력적인 사람들은 지구와 나무들에 대해서도 폭력적인 경향을 보인다는 것은 사실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나무를 안아보았나요

조안 말루프 지음, 주혜명 옮김, 아르고스(2005)


태그:#책읽기, #환경책, #생태책, #나무,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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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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