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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의 섬이 물살이 험하다는 임수도, 뒤에 그림자 처럼 보이는 섬이 고슴도치를 닮았다는 위도.
ⓒ 김준

이른 휴가철 잔뜩 찌푸린 하늘, 배 안이 한산하다. 봉수대가 있는 월고리산을 뒤로 하고 배가 격포 항을 미끄러지듯 빠져나간다. 부안에는 월고리산 외에 대항리 점방산, 계화도 등에 봉수대가 있다. 간신히 대나무 끝에 목만 내놓은 깃발들이 밀물에 잠길세라 위태롭다. 어부들이 그물을 넣어 두고 표시해 둔 깃발이다.

위도로 들어가는 뱃길에 떡 하니 버티고 앉은 임수도. 예로부터 이곳을 지나는 길이 녹록치 않았다. 오죽했으면 개양할미 도움을 받아 뱃길을 열어야 갈 수 있다고 했겠는가. 새만금이 막히기 전까지도 임수도의 텃세가 만만치 않았다. 물이 빠진 임수도 주변에서 문인상이 발견된 것도 뱃사람들이 성난 파도를 잠재우기 위해 처녀대신 석상을 용왕에게 바쳤기 때문이라고 한다. 심지어 심청전에 등장하는 임당수가 여기라고도 한다. 어쨌든 그만큼 물살이 세고, 파도가 높은 것은 사실이다.

▲ 개양할미를 모신 죽막동 수성당.
ⓒ 김준

섬이 모두 포구인 위도

고려시대 보안현에 속한 위도는 고군산열도와 함께 1896년 전라도 지도군에 속하였다, 1896년 2월 3일자 칙령 제 13호 <전주·나주·남원부 연해 제도에 군을 설군 하는 건>에 따르면 지도군은 나주, 영광, 부안, 만경, 무안 5군 도서 117개 호수 5184호를 관할 범위로 정하였다. 지도군은 지금의 신안군 소속의 도서들, 안마도, 송이도, 석만도, 낙월도 등 영광군 소속도서, 고군산군도, 야미도, 비응도 등 군산소속 도서, 왕등도, 위도 등 부안군 소속의 도서들이다.

지도군은 완도군과 함께 섬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군이었다. 1914년 일제의 군 면 통폐합으로 전라남도 영광군에 편입되었다. 1962년 11월 11일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해 부안군에 속하였다. 칠산바다의 중심인 위도 인근 어장에서 잡은 조기가 '영광굴비'로 불렸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위도의 지명에는 '금'이 붙은 이름이 많다. 바닷가나 강에 곳이 길게 뻗고 후미지게 휘어진 곳을 '구미'라고 한다. '구미'가 '금', '금이', '굼', '김' 등의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육지를 향해 움푹 파여 있는 탓에 배를 대기에 편하여 나루나 선창으로 많이 이용되었다. 고슴도치 모양을 한 위도에는 위도의 관문 파장금, 옛날에 소금을 구웠다는 벌금, 어살을 막았다는 살금, 해수욕장이 있는 도장금, 떡시루 모양을 한 시루금, 샘이 있었던 시암금(샘금, 정금), 치도리 옆 깊은금, 돌팍금(석금), 생금이, 논끔이, 미영금 등의 지명이 남아 있다.

▲ 위도에는 파장금, 미영금, 살막금 등 배를 정박하기 좋았던 '금'자 지명이 많다.
ⓒ 김준

풍선배를 이용해 조기잡이를 하던 시절, 위도 후미진 곳은 어디나 배를 가져다 붙일 수 있었다. 절벽 바위가 위태로운 곳이 있는가 하면 돌아서면 몽돌이나 모래해변이 숨어 있다. 작은 섬이지만 펄갯벌, 모래갯벌, 몽돌갯벌, 암벽해안과 여 등 서해안과 남해안 그리고 동해안, 심지어는 제주도 해안의 특성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섬이다. 이러한 해안특성에 따라 위도 인근 해역에는 일찍부터 다양한 어종이 서식했다.

1887년(고종 24년) 기록된 <부안지>에 기록된 '진상·공물' 20여종 중 바다와 관련된 것으로는 '마른 숭어', '숭어알', '마른 오징어', '굴비', '석난소금'(돌소금) 등이다. 특히 '마른 숭어'는 거의 매월, 굴비는 5월 진상했다. 기록에서 보듯 위도인근 어장에서 잡히는 어종 중 조기, 숭어, 갑오징어가 명품이었고, 돌소금이 유명한 것으로 보인다.

▲ 딴치도에 세워진 위령비.
ⓒ 김준
치도리 딴치섬에는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작은 위령비가 서 있다. 위령비 비문에는 '1931년 치도리 앞 칠산어장에서 조업중 3회에 걸친 강한 태풍으로 인하여 500여척의 어선이 전복되어 익사한 600여명의 어부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1932년 3월 수산당국에 의하여 건립'하였다고 적고 있다.

우리가 동네북인가

위도사람들은 칠산바다로 들어오는 고기에 기대어 살고, 조금 물때에 식구미를 갖추기 위해 섬을 찾는 뱃사람들에게 물과 나무를 팔아 생계를 이어왔다. 다른 사람 등치고 살아본 적 없고, 자연이 주는 대로 욕심내지 않고 살았던 사람들이다. 칠산바다가 무너진 것도 환경 탓만 할 수 없다. 주민들의 삶터에 외지인 들어와 바다와 인근 주민들의 생태균형을 무너뜨린 탓인지 모른다. 산과 들이 그렇듯 바다도 주민들과 함께 생활하는 공동생태계였다.

조기가 칠산바다를 찾지 않고 어획량이 줄어서 삶의 균형이 무너진 것은 아니다. 황금조기가 파시를 이루던 시절에 칠산어장은 섬 주민들의 어장이 아니었다. 조선팔도의 뱃사람들의 어장이었고, 일제와 자본의 어장이었다. 이제 겨우 집 앞 어장에서 주인행세를 하려는데 영광원자력발전소가 터진 것이다. 거리로 계산해 보상금을 주는 통에 위도주민들은 눈뜨고 앉아서 구경만 해야 했다. 보상범위에 대한 규정 탓도 있지만 어민들 사이에 행여 보상금 몫이 적을까 영역이 확대되는 것을 꺼리는 경향도 있었다. 영광원자력 피해관련 대책모임에 참석할 수 있었던 것도 최근 일이다.

새만금사업도 다를 바 없다. 인근 고군산열도의 어민들은 보상 말이라도 들어봤지만 위도는 보상금 이야기도 꺼낼 수 없었다. 이미 조류가 변하고 바닥은 펄로 쌓여가고 있는 심각한 환경변화가 나타나고 있지만 영광원전 때처럼 달리 방법이 없다. 지난 이야기지만 위도의 일부 어민들이 핵폐기장 유치에 나선 이유도 부분적으로 이 문제와 무관치 않다.

▲ 파장금으로 들어오는 고기잡이 배.
ⓒ 김준
위도는 전라북도의 '금싸라기' 땅이다. 위도 인근 칠산어장을 제외하고 전라북도 어디에서 갯것들이 나올 수 있다는 말인가. 부안, 김제, 군산 등 전라북도에 내놓으라는 갯벌과 바다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해방 전 김제 갯벌은 부족한 농지를 만들겠다고 막았다. 군산(옥구)일대의 바다와 갯벌은 일제강점기부터 시작해 최근까지 공장을 짓겠다고 바다를 막고 있다. 수평선을 자랑하던 김제갯벌은 끝없는 지평선으로 바뀌었고, 군산항에는 일본으로 가져갈 미곡이 쌓였다.

바다와 갯벌은 사라졌다. 이제 우리나라의 마지막 남은 제대로 된 하구갯벌도 기능을 잃었다. 칠산바다가 어장구실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만경강과 동진강 그리고 금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새만금 갯벌은 국책사업이라는 강압에 몇 푼의 보상금을 받고 농지로 전락할 상황에 놓여있다.

위도를 다녀온 사람들은 잘 닦여진 해안도로에 놀랄 것이다. 그곳에도 아픈 사연이 있다. 1990년대 서해훼리호 침몰사건 이후 지역보상차원에서 만들어놓은 도로였다. 그 도로위에 바다에 있어야 할 그물들이 널려 있다. 시장개방이 되면서 정부는 농민들에게 직불제 등 각종 지원정책들을 추진하고 있지만 어민들은 수입산에 쫓기고 경비정에 쫓기고 있다. 더 이상 살길이 없어 '어업포기'를 선언하는 어민들도 있다.

▲ 위도 해안도로에 건조중인 실치.
ⓒ 김준

갈 곳 잃은 물길, 살길 찾는 어민들

위도바다에 흉년이 들면 부안경제가 흔들거린다. 그 동안 위도인근 칠산바다에서 나온 갯것들이 줄포, 곰소, 격포의 경제를 좌우해왔다. 줄포에서 곰소로, 곰소에서 격포로 위도의 뱃길이 바뀔 때마다 상권의 중심이 달라졌던 것도 그 까닭이다. 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뱃길이었다. 그만큼 물길이 중요하다. 새만금 방조제가 막히면서 물길이 변하고 있다. 매일 물길을 따라 오가며 고기를 잡는 위도 뱃사람들이 전하는 경고의 메시지다.

육지 것들이야 물길 바뀌는 것이 무슨 대수냐고 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해보자 서해안고속도로가 뚫리면서 생긴 변화를, 과거의 도로들은 대부분 읍과 소재지를 지나도록 만들어졌지만 최근에 생긴 우회도로는 큰도시를 연결하고 작은 읍과 면은 지나친다. 그 결과 작은 소읍의 상권은 대형마트에 쓰러지고 펑 뚫린 도로에 죽는다. 바닷길도 이와 다르지 않다.

수군진영이 있었다는 진리 모정에 모여 더위를 피하던 노인들, 옛날이야기가 나오자 목소리가 높아진다. 전라북도가 우리에게 해준 것이 뭔가, 왜 위도를 동네북 취급하고 있는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오래된 소외와 원망의 소리가 높아간다. 지난 4월 진리는 해일로 마을이 물에 잠기는 피해를 입었지만 원인을 밝혀내지도 못하고 어떤 피해보상도 받지 못했다. 방송국에서 와 찍어 갔지만 이런저런 대답이 없다며 우리에게도 강한 불신을 나타냈다.

▲ 파장금 포구에 건조 중인 오징어.
ⓒ 김준

진리어촌계장 서봉신(52)씨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위도 인근의 '수심'의 변화다. 많은 멸치잡이 배들이 새만금 방조제 밖 비안도 인근에서 조업을 하는데 지금은 수심이 낮아져서 그물을 넣을 수가 없다고 한다. 뺑뺑이 그물이라고 하는 개량안강망을 이용하는데 그물이 펄 속에 묻히기 일쑤며 조류에 따라 그물이 돌도록 되어있는데 서로 엉겨 그물을 잃기도 한다. 건져낸 그물에서는 냄새가 나고 그물코를 막을 정도로 '떼꼽'이라고 부르는 부유물들이 엉겨 붙어 자주 건저 내 말려야 한다.

위도 어민들 중 낚시질로 10여년 전만 해도 하루에 20-30kg의 활어를 잡을 수 있었다. 지금은 5kg를 잡기도 버겁다. 활어 값도 예전에는 1kg에 5만원에서 1-2만원에 거래되고 있다. 위도에서는 '큰 우럭 한 마리 잡으면 퍼런 것을 몇 개 붙이고 올라온다'고 했다. 이곳에서 잡은 활어는 그만큼 인정을 해주고 돈이 되었다.

낚시에 이골이 난 어민들 중에는 수족관을 보고 우럭이 부족하면 우럭을 잡고 광어가 부족하면 광어를 잡았다. 그만큼 바다를 읽을 줄 알았다. 오랫동안 주민들과 함께 해온 바다이기에 파도소리에 드는 고기를 알고, 바람소리에 날씨를 읽었다. 정월이면 때배를 띄워 바다에 감사하고 풍어를 기원했다. 자연과 함께 사는 방법을 알았던 어민들이었다. 지금 위도 어민들은 물길을 잃고 헤매는 바다처럼 살길을 찾아 방황하고 있다.

태그:#위도, #새만금,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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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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