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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량항에서 바라본 고금대교. 1999년 착공해 2007년 6월 완공한 고금대교는 마량과 고금도를 잇는 다리로 이미 완공된 고금과 약산의 연도교를 이어 77번 국도를 연장시켰다.
ⓒ 김준
다리를 지나자 길목 빈터에 휴가 대목을 보려는 노점상들이 자리를 잡고 손님을 맞는다. 앞서던 차들이 멈칫멈칫 하더니 갓길에 차를 멈춘다. 선글라스를 쓴 남녀 두 쌍이 내린다. 좌우를 살피며 도로를 건너 다리 난간을 붙잡고 포구를 내려 보며 탄성을 지른다.

노을이 강진만을 쓸고 마량포구로 쏟아진다. 반짝이던 물비늘에 물을 들이던 노을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는 선외기에 산산이 부서진다. 아름답다. 다리를 지난 차들은 77번 도로를 따라 고금도를 지나 약산대교로 내달린다. 다리 위에 올라서자 임진왜란 당시 수군사령부가 있었다는 덕동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충무공과 함께하는 고금도의 역사

고금도와 약산도는 해남 우수영을 지나 서북진하는 중요한 항로이며 조운로였다. 그럼에도 백제와 통일신라시대에 중앙권력이 미치지 못했다. 어쩌면 장보고와 같은 해상세력이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임진왜란에 앞서 1555년 대규모 왜적이 침입하여 서남해역을 약탈하는 달량진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후 해남 남창에 있었던 달량진은 이후 인근 이진으로 옮겨져 완도, 해남, 진도 일대의 수군진을 관할하였다. 당시 인근에는 이진진(해남 북평 이진), 가리포진(완도읍 군내리), 마량진(강진 대구면 마량), 어란포진(해남 송지면 어란리), 신지진(완도 신지면 송곡리), 진도 금갑도진(진도군 의신면 금갑리) 등이 설치되었다.

강진현의 부속도서였던 고금도가 중앙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과 깊은 관련이 있다. 명량해전에서 승리한 충무공이 이듬해(1598) 수군 8천명과 인근 지역 1500호를 모집하여 고금도 덕병에 수군진을 구축하였다.

덕동에는 '충무리'라는 마을과 이순신을 모신 사당 '충무사'가 있다. 고금면 노인회에서 매년 충무공 탄신일(음, 4·28)에 조촐한 음식을 마련해 올리고 있다. 정치적 목적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헌창사업에 비하면, 정비가 되지 않는 충무사와 흑백사진처럼 정감이 간다.

사당 앞에는 충무공 사후 처음으로 모셨다는 가묘가 있다. 마지막싸움 노량에서 유탄에 맞고 전사한 충무공을 아산 선영으로 모시기 전 80일간 안장한 곳이라고 전한다.

▲ 약산대교에서 바라본 덕동마을,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 이후 휴식을 취한 후 최후의 전쟁을 위해 고하도에서 수군진을 옮겼던 마을이다. 해로상 중요한 길목에 위치한 탓에 임진왜란 이후 고금도, 신지도, 청산도 등 인근 도서지역에 해안지역 방어를 목적으로 수군만호진 설치를 논의하기도 하였다.
ⓒ 김준
▲ 덕동리 충무리에는 이순신을 모신 사당 '충무사'와 노량해전에서 유탄에 맞아 전사한 후 처음으로 모신 '가묘'가 있다.
ⓒ 김준
"고금도는 강진만 어귀로, 서쪽으로는 완도의 청해진에 가깝고 북쪽으로는 장흥·강진의 육지 날뿌리가 닿을 듯이 가까웠다. 섬의 동쪽으로 다시 작은 섬들이 수없이 포개져 있어 물길은 복잡했고, 먼 바다에서 안쪽이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작은 섬의 날뿌리들이 좁은 바다를 두고 포개져 있어 물길은 굽이굽이 뒤틀렸다. 적이 쳐들어오기도 어려웠고, 설사 쳐들어왔다 할지라도 빠져나가기도 어려운 포구였다. 섬의 해안은 산으로 막혀 있어 해안 단애는 날카로웠고 섬의 안쪽으로는 농토가 넓었다. 거기서, 순천의 적까지는 물길로 백리였다. 적의 인후를 겨눌 수 있는 자리였다."

눈치 빠른 사람은 금방 알아차렸을 것이다. 김훈의 <칼의 노래>에서 이순신이 수영(수군진)을 목포 고하도에서 고금도의 덕동으로 옮긴 이유를 적어놓은 대목이다. 광양만이 내려다보이는 순천 회룡면 신성리에 왜성을 쌓아 두고 퇴로를 모색하는 적과 부산과 울산에 있는 적의 본진을 추격하기 위해 선택한 임시 수영이다.

고금도는 완도에서 가장 많은 농지를 갖춘 섬이다. 일단 식량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 게다가 갯벌이 발달해 소금을 만드는 일도 가능했다. 지금처럼 염전을 조성해 소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갯벌을 이용해 염도가 높은 물을 만든 다음 가마솥에 넣고 끊여서 수분을 증발해 만든 소금이었을 것이다. 이를 '자염' '화염' '활염' '육염' 이라 한다.

병졸들만 이동했던 것이 아니라 백성들도 따라 들어왔다. 왜구나 해적들의 잦은 출몰로 섬을 비워야 했기 때문에 이들이 고금도에 합법적으로 정착한 최초의 백성들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후손들이 지금 고금도를 지키는 사람들이 아닐까.

완도 식량을 책임졌던 섬

섬이라고 모든 주민들이 고기를 잡는 것은 아니다. FTA로 쌀농사가 위기라지만 섬사람들은 여전히 벼농사에 기대어 살고 있다. 고금도는 완도 본섬(체도)에서 제일 가깝고 큰 섬이다. 완도에서 농지가 가장 많은 고금도. 그래서 '완도 출신치고 고금도 쌀을 먹지 않고 큰 사람이 없다'는 말이 있다. 체도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고등학교가 있는 것도 농지가 많았기 때문이다. 고등학교와 농지가 뭔 상관이 있느냐고 물을지 모르지만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살만한 땅이 있었다는 것이다.

▲ 대개포 간척사업으로 항동마을 앞 갯벌에는 호수와 논이 만들어졌다.
ⓒ 김준
회룡방조제와 항동방조제가 생기면서 전국의 섬 중에서 농사로는 빠지지 않는 섬이 되었다. 농사가 천하의 근본이던 시절 고금도는 부자 섬이었다. 이제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항동방조제가 막히면서 4년 전부터 대개 농지에 농사를 짓고 있다. 전형적인 어촌마을 항동은 농촌마을로 변했다. 굴양식으로 겨우 어촌 체면치레를 하고 있을 뿐이다.

대개포간척지 인근 척찬리·항동리·도남리 주민들은 농촌공사로부터 간척농지를 임대해 농사를 짓고 있다. 아직 분양이 이루어지지 않아 '가경작' 상태다. 섬사람들 대부분 나이가 많아 좋은 땅도 농사를 짓는 것을 싫어해 얼마나 농지 분양신청을 할지 의문이다. 간척농지의 경우 주민들이 참여하지 않을 경우 외지 큰 자본이 들어와 농지를 분양받는 경우도 있다.

농사가 전혀 없던 항동리의 경우 60여 호 중 10여 호가 농사를 짓고 있다. 막히지 않았다면 칠순 팔순의 노인들도 갯가에 나가 고막·낙지·바지락을 채취했을 것이다. 농지로 변해버린 대개포간척의 갯벌은 고막·낙지·바지락·감퇴·고동 등 안 나오는 것이 없는 황금갯벌이었다. 이곳 갯벌낙지는 완도의 명품이었고, 일년이면 500여만 원의 소득도 거뜬했다. 지금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 되어 버렸다.

상정리 '개'를 여는 날

▲ 인근 주민들이 농사를 짓고 있는 대개포간척지.
ⓒ 김준
고금면 소재지 석치(돌고개)를 지나 농상리와 회룡리를 지나 고개를 넘자 아담한 마을과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상정리다. 고금도에서 어장이 가장 좋아 굴과 바지락양식이 발달한 곳이다. 굴과 바지락은 식물플랑크톤과 유기물을 먹이로 하는 친환경 어업자원이다. 아직까지 바지락과 굴양식을 한다고 사료를 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상정리 앞 갯벌에는 100여 명의 어머니들이 바지락을 파고 있다. 내려꽂히는 폭염과 갯벌에서 올라오는 열기로 어머니들 얼굴이 새빨갛다. 사우나실에 들어앉아 있는 듯 얼굴에서는 땀이 뚝뚝 떨어진다. 여름 들어 두 번째로 '개를 텄다'. 봄철에도 두 차례 개를 열었다.

몸빼 바지에 꽃무늬가 그려진 하얀 셔츠를 입고 색이 바랜 노란 수건을 머리에 썼다. 바지락 망을 묶은 끈을 몸빼 바지가 내려가지 못하도록 허리춤에 질끈 묶었다. 부지런히 호미질을 하던 할머니가 '추석에도 며칠간 열어라'며 참견을 한다. 여름철에 개를 여는 것이 휴가철 고향을 찾는 자식들을 위한 것이라면 추석에 여는 개는 명절을 쇠기 위한 것이라 한다.

'개'는 갯벌이나 바위(여) 등 해조류나 패류가 서식하는 마을공동어장을 말한다. 마을주민들은 개인이 사고 팔 수 없는 바다와 갯벌을 공동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다양한 규칙들을 만들었다. 법으로 정한 규칙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마을주민들은 규칙에 따라 갯벌에 들어가고 정한 양만 채취했다.

상정리 역시 바지락 작업은 규칙에 따라 부녀회를 중심으로 한 집에서 한명씩 참여할 수 있다. 부녀회원들의 하루 물때 작업량은 못하는 사람이 20여㎏, 보통은 30㎏를 넘어 40㎏을 캐는 사람도 여럿 있다. 1㎏에 2500여 원씩 셈을 해 보면 하루 작업으로 8만~10만 원 벌이를 한다는 이야기다.

냉장고에 넣어두고 반찬거리로 이용하는 사람도 있지만 인근 마량으로 가져가 판다. 상정리 가구 수가 130호 정도라고 하니 일을 할 수 없는 집을 제외하고는 모두 바다로 나온 셈이다.

▲ 상정리 어머니들이 뙤약볕 아래서 바지락를 캐고 있다.
ⓒ 김준
ⓒ 김준
1970년대의 고금도 주요 어업소득은 김 양식이었다. 회룡리·상정리·도남리·척찬리·항동리·가교리·세동리 등 고금도를 빙 둘러 발달한 갯벌에 말목을 받고 김발을 묶었다.

1980년대에 김으로 재미를 보기 힘들자 미역양식이 시작되었다. 1990년대까지 이어진 김 양식과 미역 양식은 간척사업으로 대부분 중단되었다. 양식의 성패를 결정하는 것은 물길이다. 바닷물이 얼마나 원활하게 소통하느냐가 김과 미역 양식에 매우 중요하다.

간척이후 항동리·척찬리·도남리·농상리·상정리 등 김과 미역 양식은 중단되었다. 모두 물길이 변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상정리·척찬리·항동리·덕동리 등 고금도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굴양식을 하고 있다. 봄·여름철에는 농사를 짓고, 찬 바람이 나면 굴양식을 한다. 생산한 굴은 겨울철 알 굴로 판매하고 있다. 마을 갯가에는 포자를 얻기 위해 나무 기둥을 세우고 굴 껍질을 주렁주렁 매달아 놓았다. 이렇게 일 년이 지나면 포자가 붙는다. 이 껍질을 줄에 굴비 엮듯 묶어 깊은 바다로 옮긴다. 이것이 수하식 굴양식이다.

▲ 고금도의 대표적인 바닷일인 굴 양식을 위해 포자를 붙이고 있는 전경.
ⓒ 김준
바지락밭 밖에는 굴양식을 위한 종패들이 햇볕에 온 몸을 들어내고 일광욕을 즐기고 있다. 갯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바지락을 캐는 어머니들은 찬바람이 나면 굴막에서 조새로 굴을 깔 것이다. 일 년 농사짓는 것보다 잠깐 하는 갯일이 훨씬 소득이 낫다며 줄줄 흐르는 땀을 훔치며 시원한 얼음물을 벌컥벌컥 들이킨다.

모정에서 더위를 피하는 남자들과 대조적이다. 잘 정리된 대개포 간척지가 한눈에 내려 보이는 항동리 모정에 주민들 너 댓이 모였다. 말썽을 부리던 마을회관 수도를 고친 후 삶은 돼지로 점심 겸 술자리가 마련된 것이다.

한 순배 술잔이 오고가자 간척 전 황금갯벌에 대한 추억이 끝없이 이어진다. 마을에서 가장 젊다는 50대 초반의 개발위원장의 "갯벌은 우리 것이지만 막아지는 순간 넘의 것이제"라는 말이 돌아오는 길 내내 귀전을 맴돈다.

덧붙이는 글 | 2007년 7월 29일 고금도를 방문했습니다


태그:#완도, #고금도, #갯벌, #간척, #바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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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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