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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최초로 자신에게 맞는 직업을 알아낼 수 있다고 홍보한 아사히TV의 아이큐테스트 방송. 아이큐테스트 도중 스폰서의 광고를 내보내고 문제로 활용해 상업적 속성을 여실히 드러냈다.
ⓒ TV아사히 홈페이지
"다음 영역 문제는 곧이어 방송될 광고를 잘 보고 푸는 문제입니다. 광고 속에 문제가 숨어있습니다. 잘 보시기 바랍니다. (광고 나간 뒤) 광고가 나온 순서를 나열하시오. 다음 중 광고에 나온 카피가 아닌 것은?"

2005년 11월 28일 일요일 저녁 7시, 일본의 대표적 민영방송 중 하나인 'TV 아사히'가 생방송으로 내보낸 '2005년도 신판 전국 아이큐테스트'의 일부분이다. 스튜디오 출연자와 시청자가 실시간으로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인 이 프로그램은 우뇌, 좌뇌는 물론 전두엽과 후두엽의 능력을 측정해 자신에게 적합한 직업을 알 수 있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하며 시청자를 끌어들였다. 그러나 이 방송의 목적은 결국 '광고'였다.

일본에는 공영방송인 '일본방송협회(NHK)'와 민영방송인 후지TV(FNS), TV아사히(ANN), TBS 도쿄방송(JNN), 니혼TV(NNS), 관동 중심의 TV도쿄(TXN)가 공존한다. NHK는 수신료만으로 운영되는 순수한 공영방송이며 민영방송은 광고수입 등 부대사업의 수입으로 운영되는 철저한 상업방송이다.

최근 일본은 공영과 민영 할 것 없이 위기 또는 변화를 겪고 있다. 민영방송들은 인터넷 기업의 매수합병 공격을 방어해야 했고, 공영방송인 NHK는 정부 내에서 민영화론까지 대두되는 등 공영방송으로서의 존재자체에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NHK 수신료 거부 128만 건, 왜?

▲ 2005년 11월 현재 NHK에 대한 수신료 거부 건수는 128만 건에 이르고 있다.
ⓒ 후지TV 화면캡처
전국 수신료 미납 399만 건. 이중 수신료 거부 128만 건.

2005년도 예산안 가운데 96.3%를 수신료 수입으로 책정한 공영방송 NHK의 2005년 11월말 현재 수신료 징수 실적이다. 위 수치에 미계약 건수 958만 건을 합하면 계약대상의 30% 가량이 미지불 상태란 결론이다. 그 결과 2005년도 수신료 수입은 예산안 대비 약 500억 엔 갸량 줄었다. 현재 NHK에 대한 시청자들의 불신과 불만의 정도를 잘 말해주는 수치들이다.

2004년 7월 이래 잇따라 터진 직원비리 및 횡령사건에 더해 2005년 1월 유력 정치인의 NHK방송개입설이 보도되면서 수신료 거부가 확산되고 있다. 수신료로 지탱해온 NHK가 시청자를 무시하고 유력 정치세력에 결탁해 권력을 행사해온 데 대한 시청자들의 항의 표시다. 결국 2005년 1월25일 '에비정일(북한의 김정일에 빗대어 독재자란 뜻의 별명)'로 불리던 에비사와 가츠지 NHK 회장이 떠밀리 듯 퇴임하긴 했으나, 시청자들의 불신은 가시지 않은 상태다.

사실 NHK와 정치의 밀월은 오랜 역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가와사키 야스시 교수는 그의 저서 < NHK와 정치>에서 NHK의 탄생배경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 '수신료 거부'가 확산되면서 'NHK의 독재자'라 불리던 에비사와 전임 회장은 여론에 밀려 결국 퇴임했다. 에비사와 전임 회장은 퇴임 다음날 NHK 고문에 오르면서 또 한 차례 여론의 거센 반발로 사퇴, 거취가 주목되던 가운데 최근 요미우리 신문 조사연구본부 고문으로 취임했다. 사진은 <마이니치신문>의 관련보도.
1925년 라디오 방송을 시작한 도쿄, 나고야, 오사카방송국을 통합해 1926년 사단법인 '일본방송협회'가 탄생했다. 민간기업이었지만 방송의 중요성을 인식한 정부에 의해 전쟁 시에는 방송을 통해 전쟁수행에 전면 협력하는 등 사실상 국영방송의 역할을 했다. 전후 GHQ(연합국최고사령관총사령부)의 관리 하에 방송의 민주화를 내걸고 특수법인 일본방송협회(NHK)로 재출발하게 되면서 NHK의 전쟁책임 명확화, 전쟁 전의 관료적 체제의 청산 등 민주화 의지를 보였으나 점차 GHQ의 점령정책 수행용으로 전락하면서 과거를 청산하지 못하고, 전쟁 전의 관리지배체제를 이어간다. 1950년 전파삼법이 만들어져 방송의 틀이 생겼지만 그중 방송법에 의해 NHK의 조직, 기구, 운영 등은 정권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했다. NHK가 정치와 특별한 관계를 지속시켜온 데는 이른바 55년 체제 속에 정권의 교체 없이 자민당의 사실상의 '일당체제'가 계속되어 온 영향도 크다.

NHK를 둘러싼 최근 논란들

NHK 사태의 발단은 2004년 7월 NHK 방송총국의 책임 프로듀서(CP)가 이벤트기획회사에 제작비를 과다청구하게 한 후 그 일부를 자신이 돌려받는 방법으로 수신료를 거액 횡령한 사실이 발각되면서부터다. 이후 다른 프로듀서에 의한 거짓출장, NHK 서울지국장의 부정경리처리, 음향디자인 직원의 거액착복, 방송에 소개된 기술과 제품의 전시회를 열면서 해당기업에 자료 및 협찬금을 요청한 사건, 싱가포르지국의 부정경리처리 등이 줄줄이 드러났다.

ETV 2001에 정치가 압력 있었나

2005년 1월12일자 <아사히신문>은 NHK 프로그램에 대한 일부 정치가의 압력설을 제기했다. 2001년 1월30일 방영된 ETV 2001 <시리즈-전쟁을 어떻게 재판할 것인가>(전4회) 중 제2회 <전시성폭력을 묻다>의 내용 일부가 아베 신조 당시 관방부장관과 나카가와 쇼이치 의원의 요구에 의해 삭제 편집되어 방송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보도 다음 날인 13일 방송제작에 참여했던 나가이 사토루씨가 당시에 압력을 느꼈다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했다.

이에 두 의원은 "방송제작자를 불러 공정보도를 요청한 것은 사실이지만 정치적 압력은 아니었다"고 해명했고, NHK도 압력은 없었다고 반론을 제기했다. 여기서 압력의 유무를 떠나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공영방송 NHK 직원이 방송을 앞두고 유력 정치인에게 '사전설명'을 하러 다닌다는 사실.

이를 둘러싼 논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일부에서는 국회에서 NHK의 예산심의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유력 정치가의 '공정한 보도' 발언은 정치적 압력에 다름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일부에서는 <아사히신문> 기자의 넘겨짚기 식 유도질문으로 작성된 기사이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주장하고 있어 '사실'과 '윤리'가 대립하는 상황이다. / 장영미
이런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회장 선임권을 쥔 경영위원회 위원 승인, 예산심의, 수신료 인상안 승인 등 NHK의 주요 승인권 대부분은 국회 다수를 차지한 자민당에 종속돼 있다. 여기에 자민당의 장기집권은 NHK로 하여금 '자주규제'라는 방법으로 정권의 비위를 맞추게 해왔다. <주간 금요일>은 2005년 1월14일자에서 NHK와 정치를 둘러싼 주요사건 연표를 두 페이지에 걸쳐 소개하기도 했다.

특히 2003년 5월12일 방송예정이었던 <클로즈 업 현대, 끝나지 않은 전쟁(가제)> 불방사건은 '자주규제'의 전형으로 거론된다. 이 방송은 이라크 전쟁을 전하는 NHK의 보도가 '미국 쪽 시각에 의한 편향보도'라는 비판이 일면서 이라크 쪽의 시점으로 전쟁의 현실을 전하자는 기획이었으나 당시 '클로즈 업 현대'를 담당하던 모로호시 마모루 이사에 의해 갑자기 중지 명령이 내려졌다. 기획회의를 거쳐 취재, 편집까지 마친 방송을 윗선에서 중지시킨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또 고이즈미 개혁을 상징하는 도로공단의 문제점을 다룬 NHK 스페셜 <조사보고 일본도로공단>도 공단의 비리를 파헤친 역작이었음에도 당시의 참의원 선거에 영향을 고려한 듯 선거가 끝난 후에야 방송되었다. 이외에도 국정선거 등에서 NHK의 여론조사나 출구조사 결과가 정치가에게 전해지는 것은 관계자들 사이에도 유명한 얘기다.

그래도 상업방송 보다는 낫다?

그러나 여전히 일본인들은 큰 뉴스가 터지면 NHK를 본다. NHK가 여러 문제를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영방송에 비하면 그나마 낫다고 보기 때문이다.

최근 몇년간 민영방송사들은 점성술사, 영매, 초능력자를 내세운 방송에 열을 올렸다. 급기야 일본인들은 이미 널린 알려진 점성술사 호소키 카즈코의 "30년 후 일본이 없어진다", "차기 수상은 다케베 간사장"이라는 2006년 대예언(?)을 들으며 새해를 맞이해야 했다.

▲ NHK 수신료 거부가 확산되면서 인터넷에도 수많은 NHK안티 사이트가 생겼다. 사진은 '반 NHK 연합'이라는 사이트의 홈페이지.
일본의 민영방송이 인권의식 희박, 흥미본위, 상업적, 선정적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는 이면엔 방송사간의 치열한 '시청률 경쟁'이 있다. 지난 2003년 10월 니혼 TV의 프로듀서가 2000년 3월부터 2003년 7월까지 시청률을 조작했던 사건은 최근의 대표적 사례. 그는 흥신소를 통해 비디오리서치의 시청률 조사대상 세대를 알아냈고 앙케트 등을 빌미로 자신의 방송을 보게 한 후 사례하는 방법으로 시청률을 매수한 것이 발각되어 파문을 일으켰다.

민영방송들은 2005년에는 경영권 방어로도 골머리를 앓았다. 연초부터 '후지 TV'는 IT 기업인 '라이브도어'의 매수·합병 공격에 맞서 싸워야했고, 10월엔 'TBS (도쿄방송)'가 인터넷 쇼핑몰로 유명한 '락텐'의 공격을 받았다. 그동안 성역처럼 여겨지던 방송에 인터넷을 결합시켜 새로운 사업 분야를 개척하겠다는 인터넷 기업들의 주식시장을 통한 대대적 공격이 벌어진 것. 현재 후지TV와 라이브도어는 업무·자본 제휴에 합의해 화해했고, TBS와 락텐은 업무·자본 제휴를 위해 휴전 중이다

민영방송의 시청률 경쟁에도 불구하고 스포츠와 오락 부문에서는 민영방송이 우위지만 뉴스보도 부문은 NHK가 차지하고 있다. 2004년 '연간고세대시청률30'에 든 9편 모두 NHK가 차지했으며 2005년에도 3편 중 2편이 NHK의 것이었다. 매해 마지막 날에 방송되는 NHK의 '홍백가요대전'은 매년 고시청률 1, 2위를 다투는 NHK의 간판프로그램이고, 대하드라마도 매편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일본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밖에 교육방송 및 교양, 건강프로그램 등 공영방송으로서의 NHK의 영향력은 아직 건재하다. 일본 민영방송들이 상업적, 선정적 프로그램에 맘 놓고 매진할 수 있는 것도 공익적인 부분은 NHK가 확실히 맡고 있다는 전제에 기반한다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다.

개혁하거나, 민영화되거나

▲ 하시모토 신임 NHK회장은 "수신료 제도는 공영방송을 위한 이상적인 제도"라며 벌칙조항 신설, 스크램블화 등이 거론되고 있으나 현행 수신료 제도를 바탕으로 NHK의 개혁에 힘쓰겠다고 밝혔다.
ⓒ 후지TV 화면캡처
현재 NHK가 공영방송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여부는 수신료 제도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년 전, 에비사와 전 회장의 후임으로 취임한 하시모토 NHK 회장은 "수신료는 가장 이상적인 제도다. 수신료 제도 안에서 개혁에 힘 쓰겠다"고 밝히고 개혁의 대부분을 수신료 수입의 증대에 맞춰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제껏 일본에서 TV 수신료는 당연히 내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었다. 그러나 최근 NHK에 대한 불신과 수신료 제도의 불공평성, 공짜 상업방송 등의 영향으로 수신료 징수에 대한 반발이 확산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게다가 NHK 수신료는 '지불의무제'로 벌칙조항을 두고 운영하는 다른 나라와 달리, '계약의무제'이면서 벌칙조항을 두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강제 징수 방법이 없다는 것도 문제.

벌칙조항 신설 및 스크램블화(수상기에 특별한 기계를 설치해 유료로 방송을 볼 수 있게 하는 장치) 등 여러 개선안이 나오고 있지만 정보격차 및 정보약자를 만들 수 있으므로 NHK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방침이다. 대신 '민사절차에 의한 지불독촉' 등을 검토하고 있으나 '개혁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국민들의 반응은 냉담하다.

그렇다면 NHK는 과연 재생 가능할까.

하시모토 회장은 2005년 9월20일, '시청자 중심'의 방송을 하겠다는 '신생계획'을 발표한 뒤 이를 위해 조직 및 업무의 대개혁과 슬림화 (직원의 10%인 1200명 삭감), 수신료 공평부담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어 이달 24일 적자개선책을 비롯한 '경영비전'을 발표하고 개혁에 박차를 가한다는 계획이다. 또 수신료 하향조정, 위성채널의 삭감, 임원 및 직원의 급여 삭감, 인원삭감, 자회사의 통폐합 등을 논의 중이다.

유연한 방송편성, 교육방송의 충실, 재난방송, 위성방송 및 디지털방송 등 새로운 방송기술의 개척 등 NHK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할 부분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NHK는 공영방송이 경계해야 할 여러 문제점을 총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만일 NHK가 자체 개혁에 실패할 경우 일각에서 일고 있는 민영화 주장이 현실로 다가올 수도 있다.

하이비전 사업이 NHK 재정타개책?

70년대 초반 TV 수상기 보급 포화상태로 수신료 수입이 정체됐을 때, NHK가 재정위기를 타개한다는 명목으로 추진한 '외부 위탁제도 도입' '자회사에 의한 부차수입 확대' '하이비전(고화질) TV 보급 촉진' 등도 NHK의 거대화 및 상업화를 불러와 오히려 NHK의 공영성을 훼손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현재 NHK는 NHK출판, NHK엔터프라이즈21, NHK소프트웨어 등의 21개 자회사와 관련공익법인 및 관련회사 13개 회사를 거느리고 있다. 이들 34개 회사의 2003년 매상고는 2671억 엔으로 주요 민영방송에 필적하는 수준이다. 그러나 이들 자회사들이 2003년에 NHK에 환급한 금액은 58억 엔에 불과했다. 정부관련 기업 대부분이 그런 것처럼, NHK도 자회사가 잘 돼야 퇴직 후 낙하산 인사로 갈 곳이 생기므로 자회사를 잘 키우는 것이다. 자회사 임원의 70%가 NHK출신이라는 사실이 이를 잘 대변해준다.

하이비전 사업도 국민 부담을 가중시킨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 NHK는 차세대 수입원으로서 정부의 국책사업인 위성 및 하이비전 사업에 주도권을 쥐고 총력을 기울여왔다. 그러나 지상파 방송이 전면 디지털화 되는 2011년 이후에는 현재의 아날로그식 텔레비전이 무용지물이 되며 고가의 새로운 수상기 구입이나 변환기를 설치해야 한다는 것을 국민들에게 전혀 알리지 않고 있다. 앞으로 6년 뒤에 벌어질 상황임에도 작년에 출하된 텔레비전의 86%가 아날로그 식이었다는 게 그 증거다. / 장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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