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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청자(일본 도쿄 국립박물관 소장. 2012. 6. 12. 촬영).
 고려청자(일본 도쿄 국립박물관 소장. 2012. 6. 12. 촬영).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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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2021년 2월 19일 오후 6시 6분]

할아버지


나의 할아버지는 한학자로 천문지리에 조예가 깊었다. 밤하늘의 별빛과 달무리를 보시고 다음 날 일기예보를 하셨는데 거의 맞추셨다. 할아버지는 일찍이 구미 금오산에 매료됐다. 구미에서 낙동강 건너 오십 리나 떨어진 도개마을에서 사시다가 아예 구미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그것도 금오산이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원평동에 정착했다.

때때로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금오산이 낳은 수많은 인물 얘기와 선산 구미는 예로부터 '학문과 충절의 고장'이라고 귀에 익도록 일러줬다. 고려 말 야은 길재 선생과 조선시대의 사육신 하위지, 생육신 이맹전, 그리고 김숙자, 김종직 등의 선비를 예화로 드셨다.

그런 말씀과 함께 나에게도 글 쓰는 선비가 되라고 일러줬다. 그러시던 할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5년 때 돌아가셨다.

그때 나는 담임 선생님에게 결석계와 편지를 써서 친구 편에 보냈다. 할아버지 장례를 치른 뒤 닷새 만에 등교했다. 담임 선생님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씀했다.
  
 나의 모교인 구미초등학교와 금오산
 나의 모교인 구미초등학교와 금오산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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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임 선생님의 칭찬

"박도, 너 편지를 참 잘 썼더구나. 내가 네 편지를 보고 감탄한 나머지 그날 교직원 회의 때 낭독했다. 그랬더니 모든 선생님들이 박수를 치시더구나."
"네에?"


나는 그때 편지를 담임 선생님에게 보낸 기억은 난다. 하지만 편지 문안은 어떻게 썼는지 전혀 기억에 없다. 아무튼 내가 쓴 글로 칭찬을 받기는 이 세상에서 처음이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는데, 그때 담임 선생님의 칭찬은 나에게 어떤 자부심을 갖게 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3년도 안 돼 집안이 풍비박산됐다. 그러자 그 많던 식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때 나는 구미중학교 1학년생으로 상구미 방천 밑 큰고모 댁에서 지냈다. 그때 학교 수업이 끝나면 꼴망태를 메고서 토끼풀을 뜯으러 다녔다.

그 무렵 대구의 이윤복이라는 한 초등학생이 목동으로 '저 하늘에도 슬픔이'라는 책을 펴내 수십만 권 팔렸다는 얘기와 함께 영화까지 만들어 화제가 됐다. 나도 그 소년과 같은 일기를 쓴다고 날마다 호롱불 밑에서 일기를 썼다. 구미중학교 재학 때 시를 배우면서 거의 암송했다.

1961년 서울 중동고등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곧 가정사정으로 휴학을 하고는 신문배달을 시작했다. 그 당시 신문들은 하루에 두 번씩 발행하는 조석간제였다. 조간 배달 후 석간 배달 때까지 종로2가 탑골공원 앞에 있었던 종로도서관에 자주 갔다. 거기서 많은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책은 톨스토이의 <부활>, 고미기와 준페이의 <인간의 조건>, 황순원의 <카인의 후예>, 레마르크의 <개선문> 등의 소설과 소월 시집 <진달래꽃>, 한하운의 <보리피리>, 그리고 <한국현대시인전집> 등이었다.

그러면서 나도 틈틈이 대학노트에다 시를 쓰곤 했다. 그때 나는 습작을 겸해 박정희 당시 최고회의 의장이 할아버지가 말씀하던 금오산이 낳은 인물이라는 생각으로 그분에 대한 글도 썼다.

곁에서 지켜보던 아버지는 어느 날 살아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함부로 글을 쓰지 않는다고 충고했다. 그래서 그분 얘기는 나중에 쓰기로 하고 중단, 여태껏 탈고치 못하고 있다.      
 공초 오상순 선생. 임응식 작가 작품 '오상순'(1954). 젤라틴 실버 프린트, 33×25.7cm.
 공초 오상순 선생. 임응식 작가 작품 "오상순"(1954). 젤라틴 실버 프린트, 33×25.7cm.
ⓒ 임상철/임응식포토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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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초 오상순 옹

어느 하루 아버지는 내 습작노트를 보고는 시를 참 잘 썼다고 말씀했다. 그러면서 당신이 인사를 나눈 바 있는, 공초 오상순 시인을 사사케 한다면서 명동의 '청동' 다방으로 데려갔다. 그 자리에서 오상순 옹은 내 습작시를 보면서 문재가 보인다고 격려의 말씀을 했다.

그 뒤 나는 청동다방에서 오상순 시인을 몇 차례 더 만났다. 공초 옹은 담배 왕골초로 그분 손에는 담배가 늘 떠나지 않았다. 나는 그분이 돌아가시기 직전 적십자병원에서 외로이 투병 중일 때도 자주 찾아뵈었다. 내가 찾아가면 공초 옹은 그렇게 반가워 하실 수 없었다. 평생 총각으로 한 점 혈육이 없었기에 그러셨던 모양이다.

중동고교 시절, 국어과 박철규 선생님은 나를 문학의 길로 인도했다. 나는 그분을 1961년 중동고교 입학 시험장에서 처음 만났다. 그것도 첫 시간 국어시험 때였다. 나는 답안지의 빈칸을 다 메운 뒤 감독 교사를 바라보았다. 훤칠한 체구, 남색 양복 차림으로 약간 곱슬머리에 얼굴의 윤곽이 굵은 멋쟁이 미남 선생님이었다.

물론 그때 나는 그분의 존함도, 담당 과목도 몰랐다. 이듬해 복학 후, 첫 국어시간에 그분이 교과 선생님으로 들어왔다. 나는 몹시 반가웠다. 그 무렵 고1 국어 교과서 첫 단원은 이하윤의 '메모광'이란 수필이었다.

박 선생님은 그 글을 학생들에게 읽히고는 독후감을 발표케 했다. 첫 번째로 출석부에서 이름이 외자인 내가 지명되었다. 나의 심한 경상도 사투리로 교실은 웃음바다가 됐다. 여러 명의 발표자 중 선생님은 유독 나를 칭찬해주었다.

그런 뒤 마치 노래자랑대회에서 최우수로 뽑힌 가수처럼 다시 발표를 시키며 경청해주고, 내 이름을 학급 학생 가운데 가장 먼저 기억해주었다.
  
 무서리가 내린 뒤에 핀 황국화로 장모님의 유품이었다(2008. 10. 28. 안흥 집 뜰).
 무서리가 내린 뒤에 핀 황국화로 장모님의 유품이었다(2008. 10. 28. 안흥 집 뜰).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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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국화꽃 필 때면'

고1 때 교내 백일장이 삼청공원에서 열렸다. 그때 나의 시가 차하로 입선되었고, 그 이듬해 교내문예 현상모집에서 내가 쓴 단편소설이 소설 부문에 당선됐다. 그때 곽종원 문학평론가의 심사평이다.
 
소설부의 당선작 박도의 '국화꽃 필 때면'은 문장이 간결 선명하고, 장면 장면이 독자의 머릿속에 확실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이 작품은 문학의 본바탕인 낭만이 밑받침이 되어있다. 누구나 습작기에는 낭만적인 작품을 쓰기 마련인데, 이것은 흠 될 것이 없다. 상상의 날개를 한껏 펴는 것이 낭만이라면, 소설의 첫째 조건은 낭만에서 출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고등학생 작품으로서 이만한 수준도 드물 것이다. - 『中東』 교지 제9호 125쪽

이 작품이 교지에 실리자 생후 처음 한 여성독자로부터 팬레터를 받았다.

그 편지가 학교로 우송되는 바람에 학교 친구들에게 알려졌다. 친구들의 많은 부러움을 샀다. 친구들은 그때부터 내 이름 대신에 "시인" "소설가"라고 불렀다.

그래서 고교 재학 중 여러 선생님과 친구들의 기대와 사랑을 한껏 받아 옆도 돌보지 않고 고려대 국문학과에 진학했다. 집안의 가난은 계속돼 대학 재학 중 글을 쓸 여유조차 없었다. 적당한 가난은 낭만일 수 있으나, 그때 우리 집안 형편은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당장 생계에 급급한 나머지 글을 쓰는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다.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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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어린이 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 <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 <독립운동가, 청년 안중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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