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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일본 기행 중에 본 아오모리현 오이라세 계곡의 고목. 나도 저 고목처럼 세대와 세대, 계층과 계층, 남과 북, 나라와 나라 사이의 우의까지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고 싶다.
 일본 기행 중에 본 아오모리현 오이라세 계곡의 고목. 나도 저 고목처럼 세대와 세대, 계층과 계층, 남과 북, 나라와 나라 사이의 우의까지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고 싶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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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신고가 늦은 까닭

이즈음 들어 내 손전화에는 친지의 부음 문자가 자주 뜬다. 특히 친했던 친구가 운명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는 한동안 먹먹해 지면서 다음은 '내 차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아무튼 이제는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적게 남은 것은 분명하다. 이것이 지금 내가 처한 현실이다. 다음 문장부터는 옷깃을 여미며 가능한 누에가 실을 뽑듯이 내 지난 삶의 얘기를 진솔하게 토해 보고자 한다.

 구미초등학교 2학년 때 필자(1953. 12.)
 구미초등학교 2학년 때 필자(1953. 12.)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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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45년 11월 6일(음력)에 경북 선산군 구미면(요즘 구미시) 원평동 115번지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내 주민등록상에는 출생연도가 1946년으로 돼 있다. 그 까닭엔 여러 사연이 있다.

하나는 젖먹이 시절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아 언제 죽을지 모르기에 출생 신고가 늦었기 때문이라고 하고, 둘은 내가 태어날 때는 해방 직후 혼란기로 미처 출생신고를 할 겨를이 없었다고 하고, 셋은 6·25전쟁 때 구미면사무소가 미 공군 B-29 폭격기의 융단 폭탄세례로 홀딱 불에 타버려 호적을 새로 만드는 과정에서 생긴 착오 때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그 정확한 사유를 잘 모른 채 살아왔다. 아마도 그 셋이 다 맞는 듯도 하고, 또 한두 개는 틀린 듯도 하다. 아무튼 나는 해방공간 어려운 시기에, 부실하게 태어나서 자란 것만은 사실인 듯하다.

나는 출생부터 우리나라 근현대사와 맞물렸다. 1944년 여름방학 때 일본의 한 중학교 상급반(요즘 고교)인 아버지(朴基弘)가 귀국하자 곧 할아버지가 서둘러 결혼을 시켰다. 어머니(李季善)는 이웃 금릉군(현, 김천시) 어모면 처녀로 신랑과 동갑인 18세였다.

태평양 전쟁 막바지인 그 무렵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곧 학병으로 끌려갈지 모른다는 우려로 2대 독자인 아들에게 집안의 대라도 이을 씨라도 남겨두고 가라고 그렇게 결혼을 서둘렀다.

또 외할아버지는 막내딸이 행여 정신대로 끌려 나갈까 노심초사하던 중으로, 사돈 간에 서로 이해가 맞아 맞선조차 보지 않은 채 아버지는 귀국 일주일 만에 혼례를 치렀다고 한다.

할아버지(朴龍海)는 아버지가 결혼하자 일본으로 보내지 않고, 곧 당신 고향인 선산군 도개면의 한 산골마을로 피신시켰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마을에서 일본인 지서주임에게 발각이 됐다. 전시에 젊은이가 빈둥빈둥 놀고 있다며 도개 보통학교 임시교사로 근무하게 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도개 보통학교 교사로 재직 중에 해방을 맞았다. 일본말을 하지 않는다고 고향 제자들에게 매를 들지는 않아 해방 직후 친일 교사로 몰려 배척당하진 않았다 하셨다. 오히려 그 일로 해방경축식장에서 면민들 무동을 타셨다는데, 그때 받은 감동으로 당신 인생길이 파란만장했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집안이 기울다

아버지는 해방 직후 도개보통학교에서 곧 당신의 모교인 구미 보통학교 교사로 전근하고 재직 중에 내가 태어났다. 그때는 미군정기로 교사들 봉급은 쌀로 줬다는데, 득남 기념으로 쌀 한 가마니를 더 받았다는 얘기를 나는 할머니(康始善)에게 여러 번 들었다.

내가 첫 돌도 되기 전에 대구 경북 일대에 10·1 항쟁이 소용돌이쳤다. 아버지는 그 항쟁에 연루되어 교사직 사표를 내는 조건으로 유치된 지 3주 만에 경찰서 유치장에서 풀려났다. 이후 아버지는 분단된 나라에서 더 이상 살기 싫다고, 제3국으로 간다며 밀항하고자 부산으로 내려간 것이 그만 그곳에서 마도로스로 정착하는 계기가 되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어쩔 수 없이 아들과 며느리의 신접살림을 부산으로 떠나보냈지만, 손자는 당신들이 키운다고 두고 가게 하여 나는 조부모 슬하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 나는 할머니 품에서 자랐는데, 이불 속에서 여러 번 들은 얘기가 있다.

10·1 항쟁 때 신문사 지국장(朴相熙)은 충청도에서 내려온 경찰 총에 맞아 거적때기에 둘둘 말려 형곡동 가는 고개 옆 공동묘지로 갔다는 얘기와, 도개 마을의 한 여인(金好男)은 구미 상모동에 사는 까맣고 쪼고만 신랑(전 朴正熙 대통령)한테 소박맞았다는 이야기다.

 102학훈단 시절의 필자(1968. 3.)
 102학훈단 시절의 필자(1968. 3.)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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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 집 마당 한가운데서 빤히 바라보이는 금오산을 보시며 산세가 좋다고 저 산기슭에서 인물이 날 거라고 너새니얼 호손의 '큰바위 얼굴'처럼 말씀하셨다.

그런 탓인지 나는 어려서부터 이야기꾼으로 우리나라 산하, 특히 내 고장에 유래된 애달픈 이야기를 찾아 쓰고 싶었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도 안 돼 집안이 기울었다. 가장 큰 까닭은 아버지의 국회의원 출마 때문이었다. 그것도 경상도 감자바위라는 선산에서 야당인 민주당 공천으로 입후보했기에 애초부터 당선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 무렵 밥술이나 먹는 집 아이들은 중학교를 대부분 대구나 김천으로 갔지만, 나는 고향 구미중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고교는 뜻밖에도 서울로 진학하게 됐고, 실력 부족으로 후기인 중동고교를 다니게 됐다. 하지만, 고 1학년 때 5·16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 여파로 나는 학교를 한 해 쉬는 아픔을 겪었다.

고교 시절 첫 시간부터 국어 선생님(박철규)에게 발탁되어 교내에서 글로 꽤 이름을 날렸다. 고교 졸업 때 선생님과 어머니의 권유로 학교 선생님이 되고자 서울사대 국어교육과에 응시했으나 실력 부족으로 낙방하여 1965년 그해만 후기였던 고려대학교 국문학과에 요행히 입학할 수 있었다. 

 광주보병학교 시절의 필자(1969. 5.)
 광주보병학교 시절의 필자(1969. 5.)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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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가 되다

대학 재학 중에 군대 문제로 많이 고민하다가 사병으로 가면 매를 맞고 집에 돈을 가져다 써야 된다고 하여, 그럴 집안 형편이 되지 않아 학훈단(현 학군단)에 지원했다. 그러면서 대학 졸업 후 꼭 교단에 선다고 교직 과목을 이수했다.

나는 대학 졸업과 동시 육군 소위로 임관 후 전방 보병사단의 말단 소총소대장으로 2년 남짓 복무했다. 나는 군에서 전역을 하자마자 경기도 한 시골중학교(현 여주제일중) 국어교사로 발령받았다.

그때 한 끗발 있다는 고향 후배가 당시 한 중진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추천하는 걸, 세상 물정 모르는 나는 창피하게 국회의원 따가리(비서) 노릇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고 귀를 씻었다.

일찍부터 문단의 문을 두드렸으나 내 실력 부족과 나의 교만, 오만으로 낙방의 고배를 숱하게 마시다가 1992년 48세의 나이로 문단 말석에 겨우 고개를 내밀었다.

문단 데뷔 첫 작품으로 호기 좋게 대뜸 장편소설 <사람은 누군가를 그리며 산다>를 상하 두 권 펴냈지만 내 정성과 실력 부족으로 베스트셀러 근처에는 가지도 못했다. 내 아이에게 들려주려고 펴낸 <아버지는 언제나 너희들 편이다>는 반응이 좋았다.

이 책을 본 어느 변호사가 그 자리에서 300권을 사줄 뿐 아니라, 중국대륙에 흩어진 항일 유적지 답사를 권했다. 그러면서 모든 답사비용을 당신이 다 후원해 주셔서 나는 훌륭한 독립운동가 후손 이항증(석주 이상룡 증손, 현 광복회경북지부장) 선생과 김중생(일송 김동삼 손자) 선생의 알뜰한 안내를 받으며 중국 대륙의 항일유적지를 보름 동안 누볐다.

나는 그 길에서 내 고향 구미 출신의 한 파르티잔(허형식 장군)을 만나 그 이듬해 나 혼자 북만주 벌판을 헤매었고, 그 일로 당시 대한매일신문 특집부 차장인 정운현 기자를 만났다.

나는 그분에게 차 한 잔 대접하지 않았는데도, 그때 내가 쓴 책 <민족반역이 죄가 되지 않는 나라(현, 항일유적답사기)>의 리뷰를 박스 기사로 크게 실어주고, 나중에는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인도해 주었다. 

 이대부고 퇴직 직전의 필자(2003. 12.)
 이대부고 퇴직 직전의 필자(2003. 12.)
ⓒ 윤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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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꿈

사실 나는 고교 시절 세 가지 꿈을 지녔는데, 교사·작가·기자가 되고 싶었다. 아무튼 교사와 작가 두 가지 꿈은 이뤘지만, 마지막 기자의 꿈은 실력도 되지도 않거니와 교직과 병행할 수도 없어 일찍 포기했다. 그런데 정말 뜻밖에 정운현씨 덕분에 시민기자가 되어 이제까지 숱한 기사를 썼다.

학비를 벌어야 했던 나는 고교 시절 <경향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 신문배달원이었다. 신문발행이 늦는 날은 광화문 본사로 가서 막 쏟아지는 뜨끈뜨끈한 신문뭉치를 어깨에 메고 보급소로 가서 그걸 나눠 갖고 배달 구역으로 뛰어갔다.

내가 3년 동안 배달한 구역은 서울 북촌의 가회동·계동·원서동·안국동 그리고 서촌의 사직동·누하동 등지의 한옥이 많은 동네였는데 그때는 개들을 엄청 길렀다.

내가 문틈으로 신문을 넣고 돌아서면 집안의 개들이 후다닥 달려 나의 바지를 찢거나 발뒤꿈치를 할퀴었다. 정말 개들은 사람을 차별했다. 그래서 나는 달려드는 개에게 워커 발로 주둥이를 한 방 날리면서 고함쳤다.

"야! 이 개새끼야. 사람차별하지 말아. 난 이 다음에 학교 선생님이 되고, 작가가 되고, 신문사 기자가 될 사람이야!"

그런 다음 날이면 그 개는 나만 보면 꼬리를 내리고 슬슬 피했다. 나는 팔자에 있는 <오마이뉴스> 시민기자가 된 이래 정확히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1300여 꼭지의 기사를 쓴 것 같다.

그동안 기사를 쓸 때마다 프로 야구 마무리 투수처럼 전력을 다해 썼다. 그 가운데 겁 없이 쓴 기사도 꽤 있다. 2004년 2월 10일자 "워싱턴 D.C. 백악관 앞에서"라는 기사가 기억에 남는다.

[관련기사] 워싱턴 D.C. 백악관 앞에서

 백범알살진상규명차 도미 당시 미국 워싱턴 덜레스 공항 입국장에서 환영 나온 재미동포들과 함께 기념촬영(가운데 왼쪽 권중희 선생, 오른쪽 필자. 2004. 1. 31.).
 백범알살진상규명차 도미 당시 미국 워싱턴 덜레스 공항 입국장에서 환영 나온 재미동포들과 함께 기념촬영(가운데 왼쪽 권중희 선생, 오른쪽 필자. 2004. 1. 31.).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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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교단에서 꼭 32년 8개월을 근무하고 정년을 5년 남긴 채 서울을 떠나 강원도 산골마을로 내려왔다. 그동안 38권의 책을 펴냈다. 올해도 한 권을 더 펴낼 생각이다. 지난해에는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장편소설 <약속>을 혼신의 힘을 다해 펴냈다. 이 작품은 한 가정의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룬 작품으로 장차 통일대상을 목표로 쓴 작품이었다.

누군가 나에게 '성공한 인생'이라고 과찬을 하는데, 사실 나는 못난이로 실력도 없고, 모난 교사로 여러 학교를 전전했고, 계속 실패만 했다. 나는 실력이 부족하여 고교도, 대학도 모두 전기에 떨어져 후기를 다녔고, 작가가 되고자 신춘문예 공모에도 아마 스무 번 정도는 떨어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훌륭한 스승님을 만났다. 고교시절 박철규, 김영배, 홍준수 선생님, 대학시절 조지훈, 정한숙 선생님 그리고 뒤늦게 만난 이오덕 선생님…. 그 어른 덕분에 교사로, 늦깎이 작가로, 기자로 살아왔다. 나는 숱한 실패를 통하여 겸손을 배웠으며, 세상사와 사물을 가장 낮은 곳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저승사자가 지금 당장 불러도

흔히들 세대에 따라 세월이 빠르다고 한다. 30대는 시속 30킬로미터, 40대는 시속 40킬로미터, 60대는 시속 60킬로미터로 나이가 들수록 그에 비례한단다. 정말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10대 때는 빨리 어른이 되어 담배도 마음대로 피우고, 청소년 출입금지 극장도 마음대로 가고, 머리도 마음껏 기르고, 와이셔츠에 넥타이도 매고…. 그래서 아버지의 옷을 몰래 입고 어른 흉내를 내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 언제부터인가 나이를 세기도, 누군가 나이를 물으면 대답하기 싫게 되었다. 하지만 흐르는 세월을 그 누가 막으랴. 나는 이제 어쩔 수 없이 70대로 들어섰다. 일찍이 두보는 그의 시 '곡강(曲江)'에서 "사람은 예로부터 70세를 살기가 드물다(人生七十古來稀)"고 읊었다.

하지만 이즈음에는 생활수준 향상과 의료기술의 발달로 인생은 60부터니, 70은 아직 청춘이네, 심지어는 '9988234' 로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2, 3일 앓다가 죽는 게 바람직하다는 말까지 유행어로 돌고 있는 세태다. 하지만 이건 과욕이다.

사람의 수명 연장은 그 사회조차 노화시키고, 활력을 잃게 할뿐더러 지구 환경에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 적당한 나이가 언제인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이즈음 세태로 보면 나는 70 전후를 적정기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내 나이가 그 데드라인에 이르렀다. 나는 저승사자가 지금 당장 불러도 조금도 억울해 하지 않고 얼른 대답하고 따라갈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

"야, 박도! 저승 행 열차에 승차!"
"잘 알겠습니다. 그동안 불러주지 않은 걸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나는 후딱 저승 행 열차 승강대로 오를 것이다. 사실 나는 지금까지 큰 병이나 큰 수술 한 번 받지 않고 이 세상에서 이나마 건강하게 살아온 것만 해도 부모님에게, 하늘에 감사할 일이다.

나는 평생 평교사로, 별 볼 일이 없는 작가로, 시민기자로 살아왔지만, 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오늘까지 살아왔음에 하늘과 조상님과 세상 사람들에게 감사드린다. 이제 나는 남은 인생은 덤으로 생각하면서 건강하게 살아 있는 한 이제까지 내가 체험하고 깨달은 모든 진리와 진실과 지혜들을 다음 세대에 남기고자 계속 붓을 들 것이다.

고사목(枯死木)이 되고 싶다

몇 해 전 일본 여행길에서 제 명을 다한 고사목(枯死木)을 보았다. 그 수명을 다한 나무는 시내를 가로질러 쓰러져 뭇 생명들의 다리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제 나도 그런 고사목으로 내 마지막 임무를 다하고 싶다. 세대와 세대를, 계층과 계층 간을 잇고, 지역과 지역을 이어주고, 남과 북을 이어주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우의까지 이어주는 그런 다리로.

내 이야기를 이즈음에서 마무리해야겠다. 미리 다 얘기하면 다음 회에 쓸거리도 없거니와 독자들이 읽어주지 않을 테니까.

나는 아직도 이야기 속 소년처럼 '9회 말 굿바이 홈런'을 치고 싶지만, 아내는 이제 그만 꿈에서 깨어나 저 세상 갈 공덕이나 쌓으라고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늙은 남자가 어찌 아내의 말을 소홀히 할 수 있으랴. 나는 그때마다 아내에게 그러겠다고 대답하지만 어찌 사람이 살아있는 한 꿈을 버리고 살 수 있겠는가.

나는 아직도 나의 꿈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 그 첫째는 내가 쓴 장편소설 <약속>을 비롯한 작품들이 언젠가 이 땅에 제정될 '조국 통일 문학상'을 수상하는 날을 꿈꾸고 있다.

그 둘째는 내가 가르친 제자 가운데 분단된 조국의 평화통일을 이끄는 지도자가 되는 꿈이다. 그가 고도의 정치력을 발휘하여 8천만 겨레의 소망인 조국의 통일을 마침내 이룬다면, 그때 나는 꿈을 이룬 감격에 둥실둥실 춤을 출 것이다.

그 셋째는 내가 공들여 쓴 기사가 젊은이들의 영혼을 깨우치는 보양식으로, 이 나라가 더 도덕적이고 건강한 나라로 나아가는데 이바지하고 싶다. 그리하여 <오마이뉴스> 50주년 또는 100주년 기념식장에서 역대 가장 영향력 있는 시민기자의 한 사람으로 특별상을 받고픈 꿈을 지니고 있다.

 거리의 가난한 화가가 그린 나의 캐리커처
 거리의 가난한 화가가 그린 나의 캐리커처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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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방둥이의 삶과 꿈", 이 연재기사는 제Ⅰ부 초록색 견장(전방 소총소대장으로서 28개월의 푸른 제복시절 이야기)로 시작하여 제Ⅱ부 교단일기 초(32년 8개월의 교사시절 이야기), 그리고 제Ⅲ부 작가 및 시민기자 생활을 솔직 담백하며 정직하게 쓰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지금 예정으로는 제Ⅰ부 20회 내외, 제Ⅱ부 20회 내외, 제Ⅲ부 30회 내외로 모두 70회 정도로 얼개를 짜고 있다.

등장인물은 가능한 실명으로 하겠지만 부득이한 경우는 가명이나 아무개, 또는 그 인물의 직책으로 쓰겠다. <오마이뉴스> 연재는 어디까지나 기사이기에 팩트(Fact)를 생명으로 삼겠다. 사실 나는 그동안 글이나 기사 작성에 어떤 인물의 좋은 점만 써왔는데 이번 연재에서는 내가 본 인물의 진면목도 그려볼 참이다. 진실만이 독자에게 감동을 주고 후세에 교훈이 되기 때문이다.

독자 여러분의 성원과 애정 어린 꾸중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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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어린이 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 <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 <독립운동가, 청년 안중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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