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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오마이뉴스>와 참여연대, 생활정치실천의원모임이 함께 '나는 세입자다' 기사 공모를 실시합니다. 가슴 아픈 혹은 깨알 같은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기사를 기다립니다. 세입자와 관련된 사례라면 어떤 것이라도 좋습니다. 반지하나 옥탑방 이야기도 좋고 해외에서 경험한 사례도 환영합니다. [편집자말]
밤 10시. 건물 사이 작은 공간에서 벌써 몇 시간째 휴대전화를 누르고 있다. 전화가 온다. 혹여 그 친구일까? 전화를 쥔 손이 바르르 떨린다. 심호흡을 하고 액정화면을 봤다. 아니다. 그가 아니다. 아내의 전화다. 어떡하나. 마지막 한 군데 더 전화를 했다. 아예 받지도 않는다. 맹수가 사냥감을 물어뜯듯 컴컴한 어둠이 한 가닥 희망마저 갈기갈기 찢어 숨통을 끊어 놓는다.

눈물이 핑 돈다. 겨우 진정한 뒤 무너질 듯 집으로 들어갔다. 널브러진 이삿짐을 이리저리 피해 안방으로 향했다. 문을 여니 보따리들 사이에 아내가 웅크리고 있다. 얼굴을 무릎 깊이 파묻고 있어 또 다른 이삿짐으로 착각할 정도다. 나를 보더니 고개를 돌리며 옷소매로 얼굴을 가린다. 울고 있구나.

"괜찮을 거야! 왜 청승을 떨고 그래!"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아내. 시선을 바닥에 떨어뜨린 채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내의 어깨가 들썩인다. 참았던 눈물을 다시 흘리며 신음처럼 몇 마디를 토해낸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제발 도와주세요!"

교회나 절에도 나가지 않는 아내가 '하나님'을 부른다. 난 더 무너지지 않으려고 되레 역정을 냈다.

"괜찮을 거야! 왜 청승을 떨고 그래!"

다시 집을 나왔다. 어떡하나. 내일 아침 10시까지 집을 비워줘야 한다. 주택보유자에서 무주택자가 되는 날이다. 하지만 세입자가 될 수 있는 준비를 마치지 못했다. 도통 보증금이 구해지지 않는다. 은행에서 빌릴 처지도 아니었다. 운영하던 회사의 파산으로 이미 신용불량자가 됐고, 아내 역시 회사와 관련된 보증을 서는 바람에 그녀 또한 신용불량자 리스트에 이름이 올랐기 때문이다.

한때는 꽤 좋은 집에서 좋은 차를 굴리며 살았다. 지방도시지만 법원과 시청이 길 건너에 있어, 그 도시의 '강남'이라고 불리는 '금싸라기' 지역의 넓은 평수 아파트 소유주였다. 중소기업 운영을 맡아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성공을 일궈낸 CEO가 되고 보니 내 사업이 하고 싶었다. 그래서 적지 않은 돈을 투자 받아 번듯한 사업체를 꾸렸다.

다 떠나고 남은 건 아내와 두 아이, 그리고 부채

성공이 부른 자만일까? 그 짝이 나고 말았다. 회사가 어려워지고 직원들의 급여를 줄 돈도 없어 주주들에게 도움을 요청해도 '더 이상 투자는 안 된다'며 등을 돌리는 상황까지 갔다. 명색이 사장인데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집을 담보로 돈을 빌리고, 주변의 지인들에게 돈을 구해 급한 불을 꺼 나갔다. 버틸 수 있는 방법을 모두 동원했다.

주변에서는 미련하다고 손가락질을 했다. 사업을 하다 안 되면 얼른 빠져야 한다며 "회사가 거덜 나도 사장은 멀쩡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왜 그러느냐"고 핀잔을 주었다. 망해도 양심적으로 망하고 싶었다. 그대로 밀어붙였다. 하지만 회사는 끝내 회생하지 못하고 산산조각 났다. 그러면서 다 떠났다. 집도, 자동차도, 적금통장도, 명예도, 신뢰도 모든 게 사라졌다. 남아 있는 건 적지 않은 부채와 아내, 그리고 두 아이뿐이었다.

다시 집을 나와 근처를 배회했다. 빼곡한 아파트 단지가 눈에 들어온다. 집이라는 게 뭘까? 분신처럼 늘 있어왔기에 당연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왔던 게 집이었다. 등기부등본을 날리고 나니 '집'이라는 게 참 달라 보였다. 내일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어디로 가야 하나? 저 많은 짐들은 다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억장이 무너진다. 공들인 회사를 접을 때도 이렇지는 않았다. '억장이 무너진다'는 게 바로 이런 건가!

기막힌 '천사'... "친구 형님이 하나님인가봐!"

꼬박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아내의 눈은 퉁퉁 부은 채다. 아이들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절망과 체념의 수렁에 깊이 빠져 있을 바로 그때 전화가 왔다. 월세보증금을 도와주겠다는 전화였다. 얘기를 듣더니 아내가 또 운다. 이번엔 웃으면서 운다. 기막힌 '천사'는 다름 아닌 친구의 형님이었다. 이삿짐을 마저 꾸려야 한다며 용수철처럼 튕겨 일어나는 아내에게 농을 걸었다.

"친구 형님이 하나님인가봐."

아무튼 아내는 그 하나님이 고맙다며 지금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세입자가 되면 두 가지 걱정에 시달린다. 잦은 이사와 보증금을 올려달라는 집주인의 성화를 달고 살아야 한다. 우리 부부도 그간 여러 번 이사를 했다. 집을 날리고 무주택자가 됐을 당시에는 많이 힘들었다. 상실감도 컸다. 낙심이 되면 자책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깨닫기 시작했다. 집이 없다는 게 이런 거구나!

나락까지 가봤기 때문일까? 졸지에 세입자 된 데에서 오는 상실감을 극복한 이후부터 우리 부부에게는 새로운 버릇이 생겼다. 새롭게 이사 갈 집이 결정되고 이삿날이 잡히면, 그날을 기억하기 위해 하는 일이 있다. 현관 번호키 비밀번호를 이사 온 날로 맞춘다. 가령 9월 30일에 이사를 했다면 현관 비밀번호는 '0930'이 되는 식이다. 벌써 이 비밀번호가 세 번째 바뀌었다.

"이사 온 날을 기념하는 세입자, 멋지지 않아요?"

들고나며 이삿날을 입력하니 하루에 적어도 두 번 이상 이삿날을 기념하는 셈이다. 이삿날을 기념한다고 얘기하면 이상하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왜 그딴 걸 기념하느냐고 되묻기도 한다. 기념하는 이유는 감사하고 고마워서다.

이사 갈 집 전세금이나 보증금을 준비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이유는 충분하다. 비록 세입자이지만 가족이 일정기간 거주할 수 있는 집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부터 생긴 버릇이다.

얼마 전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 왔다. 이삿날 우리 부부는 버릇대로 현관 번호키 비밀번호를 바꾸고 있었다. "세입자면 어때? 이사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데!"라고 말하자 아내가 웃으며 되묻는다.

"주인같이 사는 당당한 세입자, 이사 온 날을 기념하는 세입자, 잦은 이사를 귀찮아하지 않고 감사하는 세입자, 이 정도면 멋지지 않아요?"

덧붙이는 글 | '나는 세입자다' 응모 글



태그:#세입자, #현관 번호키, #보증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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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시사 분야 개인 블로그을 운영하고 있는 중년남자입니다. 오늘은 어제의 미래이고 내일은 오늘의 미래입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미래를 향합니다. 이런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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