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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오마이뉴스>와 참여연대, 생활정치실천의원모임이 함께 '나는 세입자다' 기사 공모를 실시합니다. 가슴 아픈 혹은 깨알 같은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기사를 기다립니다. 세입자와 관련된 사례라면 어떤 것이라도 좋습니다. 반지하나 옥탑방 이야기도 좋고 해외에서 경험한 사례도 환영합니다. [편집자말]
1997년부터 일년간 태국에 살 때 경험한 일이다. 아침에 아파트를 나서는데 로비(호텔식 아파트였다)에 앉아 있던 옆집 녀석이 벌떡 일어나며 반색을 한다. 방콕에 오자마자 사귄 첫 태국인이고 태국어를 배우는 데도 적잖이 도움을 받은 터라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데도 불구하고 자주 어울리는 친구가 되었다. 시도 때도 없이 집을 들락거리는 걸 보면 출퇴근 하는 직장인 같지는 않은데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아직까지 말해주지 않았고 나도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지만 성정이 온순하고 행동도 그리 험하지는 않았다.

내 팔을 끌고 로비 구석의 소파로 가더니 나를 앉힌다. "무슨 일이야? 나 지금 바빠" 혹시 이 녀석이 오토바이를 태워줄까 하여 짐짓 시계를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오토바이 태워 줄테니 걱정하지 말란다. 버스를 타면 30분 거리가, 이 녀석 오토바이 뒤에 눈 딱 감고 5분만 앉아 있으면 사무실이다.

녀석이 주머니에서 엽서 같은 것을 한 장 꺼내 준다. 태국말로 의사소통은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태국글자는 그야말로 난공불락이라 결국 배우기를 포기한 터였는데 손으로 쓴 조악한 카드이기는 하나 그림으로 보아 무슨 축하카드 같았다. 결혼식 초대장이었다. 그것도 3일 후에…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하는 놈이 3일 후에 결혼하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니… 하여튼 나는 놈의 뒷자리에 앉아 사무실까지 가며 조금 서운하기는 했다. 조카같이 생각하고 저도 나를 삼촌같이 생각해서 따르는 줄, 나 혼자 착각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나를 내려주며 저녁에 몇시에 끝나냐며 데리러 오겠단다. 녀석에게 얘기 좀 하자고 사무실로 데리고 갔더니 녀석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2년 가까이 만나온 여자 친구와 결혼을 하려고 하는데 축사 좀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냥 참석도 아니고 축사라니! 갑자기 얼떨떨 해졌지만 곧 평정을 찾고 나는 네 여자 친구를 알지도 못하고 더욱이 3일 전에 이러는 것은 예의도 아니고 또 나는 태국말도 못하니 하객들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그리고 지금 내 감정 상태가 조금 삐쳤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 날 저녁 그가 서투른 영어까지 섞어가며 장장 두 시간을 이야기 한 러브 스토리는 나를 감동시켰고 나는 그가 부탁하는 모든 것들을 기꺼이 수락했다.

결혼식 3일 전에 부탁받은 축사... '전세'라는 말 했다가

방콕의 변두리 작은 식당에서 전통식인지 신식인지 아리송한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참석자들은 대부분 젊은 친구들이었다. 간혹 나이 든 사람들도 있었는데, 외국인은 나 하나라 다들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건네 인사를 하고 보면, 적어도 신랑신부 가족이거나 친지들은 없었다. 사전에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 이해는 했지만 공연히 안쓰러워 몇 번을 신랑 곁에 가서 가까운 어른인 척을 했다.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 꽤 시간이 흘러 이윽고 내 순서가 되었다. 어디 가서 해 본적이 없는 결혼식 축사를 외국에서 하려니 보통 일은 아니었다. 한국어 통역이 있었지만 되도록 내 스스로 태국어로 하려고 끙끙대며 이야기를 했다. 아마 이랬던 것 같다.

"며칠 전 여기 서 있는 신랑과 꽤 오랜 시간동안 이야기를 나누고서야 나는 태국의 젊은 친구들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처음 방콕에 왔을 때는 한국이 태국보다 잘 사는 줄 알았고 당연히 한국의 젊은이들이 태국 보다 더 희망차고 장래가 더욱 밝은 줄 알았습니다. 이제 일 년 가까이 시간이 흐르고 내 생각은 많이 바뀌었습니다. 아직도 잘은 모르지만 방콕의 젊은 친구들이 서울의 젊은 친구들보다 훨씬 더 많이 웃고 밝게 생활하며 인생을 즐기는 것 같고 미래에 대해 더 낙천적이며 희망적인 것 같습니다."

나만 빼고 모두 태국인인 식장의 마이크 앞에서 분명 립서비스적인 측면도 없진 않았으나 일 년 가까이 살면서 그것은 진심이었다. 태국은 아직도 급여를 주급으로 지급하는 회사들이 많다. 낙천적인데다가 도무지 미래에 대한 걱정이 없는(정확히 말하면 걱정을 하지 않는) 태국의 청춘들은 매주 금요일 저녁만 되면 방콕의 수많은 나이트클럽이나 술집들을 미어터지게 만든다.

젊은 친구들이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사랑만 있으면 되었다. 그들의 낙천적인 성격외에도 한국의 커플들이 같이 살기 위해 필요한 많은 것들이 방콕에서는 기꺼이 포기될 수 있었다. 집도 살림도 혼수도…

"한국의 젊은 커플들이 결혼할 때 집을 사는 것은 불가능하고 전세금 마련을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거기에다 혼수니 예물이니… 그에 비하면…"

한국말을 곧잘 통역하던 아가씨가 통역을 하다말고 나를 멀뚱멀뚱 보며 말을 못한다. 나도 말을 끊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나보고 '전세'가 뭐냐고 묻는데 아무리 설명을 해도 이해를 못하더니 급기야 태국말로 전세라는 단어 자체가 없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에 비슷한 설명을 하는 말도 없으니 통역이 불가능했다. 갑자기 축사 자리가 질문하고 답하는 기자회견장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그렇잖아도 한국의 젊은 친구들에 대해 이것저것 알고 싶은 것들이 많았던 청춘들에게 멍석을 깔아 주고 만 격이 되었다. 무슨 겉치레 해야 하는 격조 있는 축사도 아니고 바야흐로 무대는 한국학 시간이 되고 말았다.

그때 나는 처음 알았다. 태국에는 우리나라의 전세에 해당하는 시스템 자체가 없다는 것을. 그 제도에 대해서 얼마나 신기해하고 부러워하는지 한국의 세입자들이 들으면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도대체 집주인은 받은 돈을 그대로 돌려주면 무슨 이익이 있느냐는 질문부터 우리 태국에는 왜 저런 좋은 제도가 없느냐는 탄식까지 결혼을 앞둔 수많은 젊은 친구들의 호기심이 한국의 전세제도로 발동이 걸려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내 뒤의 축사를 할 사람 때문에 무대를 비워줘야 해서 말을 마치려는데, 모두들 합창을 하듯이 뭐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웬만한 말이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는 되는데도 뭐라고 소리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나는 무대를 내려왔다.

"내가 축사할 때 친구들이 뭐라고 한 거니?"

그날 밤을 새워 치른 피로연에 아침까지 붙잡혀 있느라고 참 많은 이야기를 해주기도 했지만 나도 선임자나 다른 한국인으로부터 들을 수 없는 많은 이야기들을 그들에게서 들었다. 신랑이 장군의 딸인 신부와 목숨을 건 사랑의 결혼식을 하느라고 치른 비용은 신혼여행 비용까지 모두 합쳐 300만 원 정도였으며, 신부는 커플링 한 쌍 사서 나누어 끼고 대학 기숙사에서 그가  사는 아파트로 들어왔다. 그리고 숟가락 하나 얹어 놓는 것으로 부부가 되었다. 그들은 내가 방콕에서 철수할 때까지 바로 내 옆 방에서 깨가 말로 쏟아질 만큼 다정하게 살았고 금요일 밤마다 친구들과 소박하게 치르는 파티에 나를 꼭 초대해서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하였다.

태국도 물론 한국같이 결혼식을 치른다. 그러나 이 땅의 젊은 친구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전세금이라는 것이 없다. 어차피 모든 집이 월세이고 방콕에서 집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니 수준 차이는 있을 뿐, 누구나 다 월세로 신혼을 시작하는 것이고 월세의 차이만 있지 보증금 자체가 또 없다. 한국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보증금 1000만 원에 월세 40만 원이 아니라 3개월치 월세를 보증금 조로 넣고 시작을 하는 것이다. 더욱이 일년 내내 더운 나라라서 겨울 옷이나 이불 등 우리네 살림살이 대부분의 부피를 차지하는 것들이 필요가 없고 아주 부자들이 아니면 평생 아예 집 살 궁리를 하지 않으니 적어도 주택에 대한 환상은 없단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내가 축사할 때 네 친구들이 태국말로 뭐라고 소리를 치던데 무슨 뜻이었냐?"

그는 잠시 자기 아내를 쳐다보고 뭐라고 묻더니 대답을 했다. 그들은 이렇게 소리쳤다는 것이었다.

"나도 세입자(전세)가 되고 싶다."

덧붙이는 글 | '나는 세입자다' 공모 응모글입니다



태그:#태국, #세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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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싶었으나 꿈으로만 가지고 세월을 보냈다. 스스로 늘 치열하게 살았다고 생각해왔으나 그역시 요즘은 '글쎄'가 되었다. 그리 많이 남지 않은 것 같기는 해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많이 고민한다. 오마이에 글쓰기는 그 고민중의 하나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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