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와 참여연대, 생활정치실천의원모임이 함께 '나는 세입자다' 기사 공모를 실시합니다. 가슴 아픈 혹은 깨알 같은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기사를 기다립니다. 세입자와 관련된 사례라면 어떤 것이라도 좋습니다. 반지하나 옥탑방 이야기도 좋고 해외에서 경험한 사례도 환영합니다. [편집자말]
부동산 앞에 내걸린 물건 광고
 부동산 앞에 내걸린 물건 광고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어디서 살 때가 제일 좋았니?"

아직도 어수선한 이사짐 속에서 앉을 자리만 대충 치워놓고 나머지는 내일 하자며, 저녁을 먹고 둘러앉은 자리에서 눈은 아내를 보며 애들에게 물었다. 신혼 시절 이 빌라 단지 앞을 지나다니면서 아내와 나는 이 분위기 좋은 빌라를 너무 좋아했고, 20여 년이 지난 오늘 드디어 이곳에 집을 장만한 것이다.

'좋았니?'라니…. 나는 내가 묻고도 머쓱해져서 짐짓 딴 곳을 쳐다보았다. 생전 아이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준 자신 있는 기억도 별로 없는 주제에 마치 계속 행복한 가족이었던 것처럼 말하는 것이 스스로도 쑥스러웠다. 대학에 다니는 두 아이는 서로 웃으며 마주 보더니 마치 입이라도 맞춘 듯 같은 대답을 했다.

"거기, 이 집 전전 집 있잖아요? 그 반지하 집."

하도 많이 이사를 다녀서 우리끼리 대화를 해도 '어느 집'이라고 하면 금방 떠오르지 않아서 주변 약도나 혹은 어떤 사건을 같이 설명해야 한다. 결혼하고 지금까지 열한 번, 첫아이를 낳고도 열 번을 이사했으니 다 기억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런데 또 이상한 것이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그 모든 집들이, 순서는 다소 헷갈려도 다 생생히 기억이 나는 것이다.

결혼 23년 만에 처음 집을 샀는데 아이들은 별로 감흥이 없다. 하기야 나도 별로 감흥이 없는데 아이들이야 말할 나위가 없으리라. 오직 아내만이 감동에 젖어 이리저리 벽도 쓸어보고 바닥도 두드려보며 황홀한 얼굴이다. 사실 집을 사려고 마음을 먹고 은행 대출까지 생각했으면 진즉에 마련할 수도 있긴 했다. 아파트 투기 광풍이 불어 너도 나도 은행 대출받아 집을 살 때도 우리는 남(은행)의 돈까지 빌려가며 집사고 싶지는 않아서 전세살이를 계속했다.

중간에 몇 번 '남들도 다 그렇게 하는데, 돈 모아 집 사려면 평생 못 산다'하며 하수 주제에 아내에게 훈수도 둬봤지만, 남의 것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아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야말로 원시인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가장인 내가 의지를 가지고 추진하면 또 못할 바도 아니었으나 나 역시 집 사는 문제에서는 심드렁해왔다. 몇 번의 사업 실패로 충분한 돈도 없었지만 주위에서 이리저리 융통하여 집 장만을 해보라는 권유를 받아도 '내가 살면 내 집이지 뭐' 하는 식이었다.

못된 주인 안 만나봐서 모른다고? 내게도 설움이 왜 없었을까

결혼 초에는 거의 1년에 한 번씩 이사를 다녔는데 집주인하고 분쟁이 있어서가 아니라 거의 우리 쪽 사정에 의해 옮겨 다녔다. 다행히 애들이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부터는 한 곳에 사는 기간이 길어지기 시작했고 이사를 가도 그 동네를 떠나지 않았다. 소꿉친구나 동네 개구쟁이 친구가 없다는 것은 적지 않은 상실감일 것 같았다.

부득이한 경우가 없어서였을까, 아이들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같은 동네에 산다. 두 아이 다 같은 병원에서 태어났고 같은 초등학교, 중학교를 나왔으며 동네 친구들과도 아주 친하게 지내서 자기들 스키 타러 가는데 나보고 같이 가자 해서 같이도 갔다 왔다. 나도 아들 친구들이 좋다.

지금이야 포장이사라고 하여 편하게 힘 안 들이고 전화 한 통으로 이사들을 하지만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소형 트럭 한 대 불러 놓고 친지들이나 친구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이사를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평소 남들 이사 다닐 때 자장면 먹는 재미로 품앗이를 많이 다닌 덕에 그 많은 이사를 다니면서도 따로 일꾼을 불러본 적은 없었다. 내 기억으로는 마지막 두 번의 이사만 포장 이사를 한 것 같다.

항상 이사 가기 전에 이사 갈 집을 찾아다니고 둘러보는 것도 내게는 참 재미있던 추억으로 자리잡고 있다. 평소에도 '역마살이 있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이리저리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한 군데서 수십 년을 산다는 게 안정감보다는 싫증이 더 클 것 같았고, 살다가 싫증이 날 만하면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가는 것이 새롭고 좋았다. 어떤 술자리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가 '아직 못된 주인을 안 만나봐서 세입자의 설움을 모른다'는 말을 들었다.

수십 년 동안 열 번이 넘게 이사를 다니면서 왜 세입자의 설움을 안 겪어 보았겠는가? 아이 둘을 데리고 주인과 한 거실을 쓰는 문간방에도 살아보았으니 설움이라고 할 만한 일들은 많이 겪어 보았으나, 그 사건들이 내 가슴으로 들어와 설움이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해프닝이었고 작은 오해였으며 지나가고 나니 추억이었지, 설움까지는 아니었다. 설움으로 받아들이는 아내에게 그것은 서러워할 일이 아니라고, 사실을 객관적으로 보자고 이야기하곤 했다.

어수선한 이사짐 한가운데 떡하니 버티고 서서 '절대로 벽에 못 박지 말라'고 경고를 해대는 주인을 보고 눈 흘기는 아내에게 '당신도 집 사서 남에게 세 주면 똑같아'라든가 '실제로 외국에서는 방 뺄 때 못 자국 하나에 10달러씩 벌금을 받는다'라며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길 종용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내가 너그러운 사람이라거나 인내심이 남보다 강한 것은 절대 아니다. 성질 급하니 참을성 없고 속도 좁은 편이라 삐치기도 잘한다. 단지 집 문제에 있어서는 남의 소유인 집에 산다는 것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고 내가 사는 이 집이 집주인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재산이라는 것을 자연스레 받아들였을 뿐이다.

'내 집'이 있어야 한다는 강박... 그것만 버리면 어디서든 행복하다

아이들이 중1, 고1일 때 온 가족이 유럽여행을 갔다. 8500만 원짜리 전세 사는 주제(?)에 한 달 동안 유럽 9개국을 돌아다닌 것이다. 남들이 뭐라기도 전에 먼저, 한 푼이라도 집 사는 데 보태야지 가당치도 않다고 펄쩍 뛰는 아내에게, 그 여행 자금을 3년 동안 어떻게 마련했으며, 이미 항공권도 렌트카 예약도 다 해놓았으니 무를 수도 없다고 버텼다.

며칠 동안 자기와 자기 몫의 돈은 빼고 가라며 돈을 뺏지 못해 탄식하던 아내는, 아이들의 시위에 마지못해 따라나섰다. 물론 우리 짐 속에는 거의 한 달을 먹을 식량이 아내의 손에 의해 김치까지 포장돼 있어서 항공사 직원이 "이민 가세요?" 할 지경이었다. 왜 아니었겠는가. 짐수레 두 대에 텐트에 코펠, 버너, 침낭에다 휴대용 식탁까지, 각종 살림살이가 산더미같이 쌓였으니.

유럽 캠핑장을 섭렵하며, 우리는 거의 경악할 만큼 저렴한 비용이긴 했으나 한 달 동안 유럽을 누비고 다녔다. 가장인 내가 '집'이라는 물건에 대한 한국인 특유의 끔찍한 사랑(?)이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후에 우리 집 사정을 잘 모르는 어떤 애들이 "쟤네 집 부자라더라"했다는 소리를 아들한테 듣기는 했다. 8년이 흐른 지금 그 여행은 우리 가족에게 이 집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하고도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다.

아이들에게 왜 그 집이 제일 좋았는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나도 그 집에서 살 때가 제일 행복했으니까. 예술가였던 주인이 직접 설계한 멋진 집이었지만, 반지하였던 우리 집은 방 두 개가 나란히 붙고 거실도 없이 방문 앞이 바로 부엌이던, 지금 생각하면 아주 좁은 집이었다.

나와 두 아이들은 매일 저녁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사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리 재미가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그 좁은 집을 뒤집어 놓으면서 놀았다. 아내가 남편 없이 애 셋을 키우는 셈이라고, 너무 힘들다고 부부동반 자리에서 푸념을 할 정도였다. 시끄럽게 떠들어도 뛰어다녀도 아내 말고는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큰애가 중학교에 들어가자 집이 좁아져서 이사를 하게 되었을 때, 너무 서운해서 내 집을 뺏기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집의 주인은 우리가 이사를 나오기 직전 어느 날 아침, 평생 모아 마련한 그 집 문을 나서며 죽고 말았다. 늦게 집을 장만한 집주인은 집을 끔찍하게 예뻐했다. 자신이 직접 설계하기도 했지만 남이 보기에도 집이 참 예뻤다. 아내의 배웅을 받으며 출근하다 말고 그는 그해 봄에 만든, 대문 위의 작은 정원을 손질하다 앉은 채 뒤로 떨어졌다. 그는 병원에 실려갔으나 그날 밤 결국 운명을 달리 하고 말았다.

지금도 장례식을 치르고 허탈하게 문 앞에 앉아 있던 여주인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이미 이사 날을 받아 놓은 우리에게 이사 가지 말고 여기서 살면 안 되겠느냐고, 전세금은 그냥 빼주겠다고 하는 청을, 애들이 너무 커서 이제 각방을 써야 한다며 사양했던 기억이 힘들게 남아 있다. 우리 아이들을 많이 예뻐했다.

내 이름으로 등기부에 올라간 '내 집'을 꼭 가져야 한다는 우리의 강박증을 바꾸지 않는 한, 자기 집에 살아도 세입자보다 더 힘든 하우스 푸어이고, 그 강박증에서 자유로우면 세입자로 살아도 내 집같이 편안하고 행복하다. 집은 그저 각종 건축 자재로 버무려진 구조물일 뿐, 정말 좋은 집은 그 안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나는 세입자다' 공모 응모글입니다



태그:#세입자, #사람이 먼저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글쓰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싶었으나 꿈으로만 가지고 세월을 보냈다. 스스로 늘 치열하게 살았다고 생각해왔으나 그역시 요즘은 '글쎄'가 되었다. 그리 많이 남지 않은 것 같기는 해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많이 고민한다. 오마이에 글쓰기는 그 고민중의 하나가 아닐까 한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