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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는 아이건강국민연대와 함께 '한국의 아이들이 위험하다' 기획기사를 내보냅니다. 영양불균형, 가공식품 섭취, 체력 약화, 실내 위주 생활 등으로 아이들의 몸과 마음이 병들고 있습니다. 아이들 건강 문제는 이제 손 잘 씻고 이 잘 닦는 옛날식 사고방식으로는 해결할 수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오마이뉴스>와 아이건강국민연대는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에서 아이들 건강 문제가 폭넓게 논의돼 국정지표로 선정되기를 바라는 취지에서 이번 기획을 마련했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편집자말]
아이들이 아이들답지 않다, 호기심도 없고 도전욕구도 없다, 귀찮은 것은 아주 싫어한다.
장래희망이 뚜렷한 아이들이 없다, 매사에 의욕이 없다.
아이들이 힘든 것을 매우 싫어한다. 편하게만 하려고 한다.

어느 때인가부터 상담을 하는 부모님들이나 선생님들이 흔히 하시는 말씀들입니다. 지난 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비행청소년이나 약물청소년들에 대한 상담이 주를 이루었다면 최근에는 이렇게 무의욕, 무도전, 무희망과 같이 '결핍'을 호소하는 상담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더 풍요로워지고 더 윤택한 생활을 하고 있는데도 왜 이리 아이들의 결핍을 이야기하고 있을까요?

저는 사회심리라는 측면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자 합니다. 물론 저는 사회학자가  아니므로 제 임상 경험에만 근거해 사례 중심으로 말하겠습니다(기회가 있다면 사회학자들에게서 아이들이 결핍감을 느끼게 만드는 기제를 자세히 들어보고 싶습니다).

아이를 아예 내보내기도

우선 가정 구조의 변천이 미친 영향입니다. 최근 서울시에서 조사한 서울의 세대별 가구수 현황을 보면 서울에서 '나홀로' 사는 가구 수가 20%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 작년에 조사한 한국의 세대별 인구 수는 3명 (3.29명)을 가까스로 넘었습니다. 핵가족을 넘어 '극핵가족'이라 불리는 '초미니' 가정이 점차 늘고 있습니다.

가정의 중요성을 간혹 부인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발달학자나 정신의학자가 보는 관점에서 이런 극핵가족, 초미니 가정은 의미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런 초미니 가정의 부모가 모두 지지 기반이 취약한 맞벌이 형태의 취업을 하고 있다면 더 큰 어려움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철수는 어머니, 아버지와 산다. 두 분은 모두 맞벌이고 동시에 늦게 오는 날도 많다. 그런 날이면 학원을 갖다온 후 혼자서 밥먹고 인터넷 게임하다 잠들어 버린다. 어느 날부터 학원을 가지 않거나 학교에서 무단조퇴를 하여 아이를 데리고 왔다. 아이는 매우 무기력하고 의욕이 없었으며 자신의 관심분야도 아주 축소되어 게임과 그에 관련된 친구들 이외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부모들은 교육욕구도 높지만 상대적으로 자신들의 자아성취 욕구도 높았다. 그런 부모들로서는 아이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갈등이 깊어졌다. 하지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주변 친인척이 없었다. 아이는 아주 불행하지도 않지만 아주 행복하지도 않다고 이야기했고, 부모와는 정서적으로 상당히 멀어져 있었다."

한국의 도시에서는 이런 가정이 허다합니다. 학교와 학원이 아이를 키우고, 부모는 아이의 생활을 기획(방과후 시간을 보낼 장소를 짜주는 것, 대부분은 사교육에 아이를 보내는 것임)하거나 모니터 하고(좋게 말했을 때 그렇고 나쁘게 말하면 방치라고 할 수  있음) 경제적으로 지원(돈을 내고)합니다. 그러면서 몸으로는 어쩔 수 없지만 마음으로는 애써 신경(이 신경쓴다고 하는 시간이 부모의 높은 기대를 담은 잔소리를 해대는 시간임)을 쓰려고 합니다.

설상가상으로 부부 사이까지 나빠 집에 들어오기 싫어하고 아이에 대한 책임을 미룬다면 이런 가정에서 사는 아이들은 살아갈 맛을 잃기 쉽습니다. 쉽게 말해 오랜 시간 친해진 사람이나 가까운 사람들과 의사소통하면서 의지를 갖게 되지, 하루 중 가끔 보는 권위적 대상의 감동없는 지겨운 잔소리에는 동기 부여를 못 받는다는 것입니다.

살아가는 데 가장 큰 에너지가 가족 간의 관심과 사랑입니다. 이 본질적인 영양소가 결핍한 상태에서는 의욕적이고 도전적인 아이들이 나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런 가정의 결핍이 주는 결과를 처절하게 경험하고 있습니다. 지지 기반이 미약한 맞벌이, 극핵가족에 대한 사회의 관심과 대책이 절실한 때입니다.

(저는 심지어 아이를 아예 내보내서 지내는 가정들도 보았습니다. 기숙사도 아닌 원룸에서 혼자 혹은 과외교사인 대학생들과 보내게 하는 것은 생물학적 가족은 유지하되 사회적 가족으로서의 역할은 포기한 것이라고 봅니다)

이런 형태의 가족들이 어려움을 이겨나갈 수 있는 방안과 결핍의 위험을 예방할 수 있도록 가족들 간에 협력하고 관심을 보이는 네트워크가 필요합니다. 소규모 가족 공동체를 통한 돌봄 품앗이 같은 대안을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공부'말고는 없나요?

무기력과 무의욕을 양산해내는 또 다른 큰 이유는 빈약한 사랑에 기대어 살아가면서도 쏟아부을 관심이 그저 '공부'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공부도 개성에 맞고 흥미로운 다양한 공부가 아니라 오직 '입시'와 관련한 공부입니다.

아이를 명문대에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부모가 다수인 한국에서 아이들은 유치원부터 끊임없는 평가에 시달립니다. 유치원에서부터 영재테스트, 기능시험, 과목경시대회를 치르고는 초등학교에서도 시험, 경시대회, 학원에서 개최되는 다양한 등급시험들과 마주합니다.

예전에는 학교시험만 쳐도 되었는데 지금은 영어, 수학, 한자, 과학, 최근에는 한국사 자격시험까지 봐야 합니다. 문제는 이런 여러 평가들이 자신의 흥미에 기초해서 스스로 점검하는 기회로 활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총력전으로서 입시를 향한 훈장 모으기처럼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이미 크기도 전에 수많은 평가를 받아서 직감적으로 자신이 무엇을 하는 것이 더 나은지 스스로 알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들은 (좋게 말했을 때) 아이들을 더 격려해서 아이들의 평가가 더 향상될 수 있다고 믿으며 오직 한 방향, 입시공부로만 아이들을 몰아갑니다. 사실 아이들은 두렵습니다.

"정말 공부하기 싫어요. 평가받는 것이 두려워요. 자식이라고는 저 하나인데. 어머니나 아버지가 저는 그렇지 않은데 자꾸 제 소질이 공부래요. 저는 만화를 그리고 싶어요. 부모님들은 그게 먹고살 만 한 일이 절대 될 수 없다고 해요. 제가 좋아하는 일은 굶어죽을 일이어서 무조건 공부를 해서 일류대학을 가야한데요. 그것이 냉혹한 현실이래요. 그러면서 공부도 잘하고 미술도 잘하는 어머니 친구분의 자녀를 예로 드는데 저는 그런 소리 듣는 게 죽기보다 싫어요. 차라리 그냥 포기하고 지낼래요. 내가 좋아하는 것도 하지 않는 대신 부모가 좋아하는 것도 하지 않을래요."

한 여고생의 말인데 이 아이는 자해의 상흔이 선생님에게 발견되어 저와 상담을 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불행한 삶을 살아가는 아이였습니다. 획일적 평가체계 탓에 아이는 그냥 꿈을 닫아버리고 살고 있었습니다.

희망을 잃고 지내는 것에 익숙해진 아이들은 무기력해 보입니다. 의욕도 안 나고 그런 시간이 오래가면 매사가 귀찮아집니다. 접근금지 당한 꿈을 갖고 억지로 공부를 한다고 해도 그것은 공부의 소외를 나을 것이며, 그런 소외된 공부로 학벌을 쌓으면 공부보다는 엉뚱한 것에 신경을 쏟게 됩니다. 이런 소외의 악순환을 우리는 지난 몇 십년간 해왔습니다.

아동 동기분야의 전문가인 미국의 한 대학교수는 한국의 이런 동기부여과정의 손상을 우려하면서 비판한 적이 있는데, 이런 평가목표 위주의 동기부여는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든다고 하였습니다.

공부가 자신의 희망을 향한 흥미진진한 도전의 탐색로가 아니라 생존으로서의 강제노동, 일종의 집안 기대에 대한 부역이 되버린 것입니다. 아이들은 나만 바라보는 부모, 혹은 이런 부모들의 연대체인 전사회가 줄을 세우며 감시한다면 차라리 포기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이렇듯 희망의 양산이 아니라 희망의 결핍을 만드는 사회가 무기력의 큰 재료입니다.

성찰의 결핍을 만드는 미디어 매체들의 부정적 영향

끝으로 인터넷과 휴대전화 그리고 다양한 미디어의 영향입니다. 가정이 잃어버린 시간, 학교가 놓친 시간에 아이들은 속속 이 세계로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이 거대한 온라인 세계(어떤 이들은 지하세계라고도 합니다) 혹은 미디어 세계가 어찌보면 아이들의 실제적 지배자입니다.

일부 아이들은 마치 자신의 생활 중 일초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자세로 휴대전화, 인터넷, 게임기, 만화, 케이블TV, 판타지소설 등을 연달아 이용합니다. 그것도 눈을 떼지 않고 말이지요. 아이들은 그 시간과 공간 안에서 계속 접속하고 부유하고 웃고 떠듭니다.

멈춤이 없는 이 행진에서 아이들은 곧잘 자신을 성찰하거나 비판적 사고를 하는 능력을 잃습니다. 선생님들이 아이의 영혼을 되돌리려 하지만 선생님들이 열심히 준비한 ICT 수업보다 간밤에 밤새 한 게임 동영상이나 흥미진진한 전투와 공상이 훨씬 재미있거든요. '밤새 전투를 치른 전투병이 휴식할 곳은 낮동안에 학교라네'라는 제목의 시를 오래 전에 인터넷에서 본 기억이 납니다.

아이들은 이런 기분에 사는데 이것은 마약의 효과와 별반 차이가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약물에 취해 사는 사람들은 깨어있는 동안 고통스럽기 때문에 계속 약물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아이들도 미디어와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않고는 무언가 고통스럽습니다.

어느 때보다 충만함이 필요한 때

결국 사회가 아이들을 무기력하게 만들었습니다. 처음부터 게으르고 귀찮아하면서 무기력을 자신의 운명으로 선택하는 아이들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의 전적인 잘못으로 무기력을 호도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물론 아이들의 이런 결핍을 선생님들 개개인이 혼자 힘으로 막으려 해도 큰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인간은 배움의 본능을 타고납니다. 모든 만물은 행복의 본능을 타고납니다. 무기력이나 불행은 그 본능의 추구를 가로막는 사회에서 나타납니다.

지금까지 말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사람이 머리를 맞대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에는 가족공동체, 풀뿌리 공동체, 대안 사회, 돌봄 공동체, 공동육아 등 이미 실천하고 있는 방안들도 있습니다.

저는 요즘 결핍에 대항하는 말로 충만함이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충분함이 양적인 표현이면 충만함은 질적인 표현이지요. 한국의 부모나 교사들에게 '충분히는 하셨습니까?' 라고 물으면 모두 '예'라고 답하십니다. '그래서 충만함을 느꼈습니까?'라고 한번 더 물으면 갑자기 당황하면서 한참 기다리다 '아니오' 라고 합니다.

'충만함'이란 내적인 행복감과 만족을 말합니다. 충만함을 여러 번 경험하면 무기력해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의 에너지가 '빵빵'해지기 때문입니다.

"충분히 너에게 다 주었는데 너는 어떻게 이럴 수 있니?"

이 말은 희망없는, 무기력한 아이들에게 무기력한 부모들이 가장 자주 쓰는 말입니다. 결핍 사회에 대항할 충만함을 생산해낼 수 있는 우리 사회의 새로운 방식과 운동이 전개되길 빕니다.

덧붙이는 글 | - 김현수 기자는 성장학교 별 교장이자 정신과 전문의입니다.
- 이 글은 <우리교육> 9월호에도 실렸습니다.



태그:#문화, #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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