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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우구스투스 평화의 제단
ⓒ 한길사
"패자조차도 자기들에게 동화시키는 방식만큼 로마의 강대화에 이바지한 것은 없다"라고 말한 플루타르코스의 말에 동의하면서,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의 개방성에 대해서 자주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설명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다. 특히 로마가 공화정에서 벗어나 제국으로 변화를 시도한 시점을 생각하면 로마는 이상하리만큼 집착과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로마는 혈통적으로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에 집착했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같은 천재적인 영웅을 경험한 로마가 어떠한 방식으로든 그들과의 인연을 계속이어가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초기의 로마 제국의 최고 지도자의 조건을 너무 쉽게 규정해 버렸고, 제국의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혈통관계를 인위적으로라도 만드는 작업이 생겼다.

로마 황제가 되는 사람은 어떠한 경우에서든지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와의 관계를 입증해야 통치의 카리스마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의 양자였다는 것이 그의 권력의 출발점이었다.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은 티베리우스 황제는 혈통적인 약점을 '공포 정치'로 극복하면서 제국을 다스렸다. 티베리우스 이후의 황제로 24세의 젊은 칼리굴라가 황제가 되는 이야기를 살펴보면 로마가 얼마나 혈통에 집착하고 있었는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다.

가능성과 위험성 안고 출발한 미성숙한 황제

칼리굴라가 황제에 오른 시점은, 로마 제국이 어떠한 황제가 자리에 앉는다고 하더라도 쉽사리 붕괴되지 않는 시스템을 확보한 때였다. 그것은 카이사르부터 시작된 작업이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를 거치면서 탄탄한 정비과정을 겪었기 때문이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의 3대 황제인 칼리굴라가 다른 황제들과는 달리 어떠한 반대에도 직면하지 않았고 전적으로 환영을 받으며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가 유일하게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혈통적으로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점이고, 혈통적인 약점을 갖고 있던 티베리우스의 (공포정치)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24세 7개월의 젊은이가 황제로 등극하였을 때 로마는 원로원에서부터 시민들, 그리고 군사들까지 모두 다 환영했다.

로마의 제3대 황제 칼리굴라는 여러 면에서 행운을 타고난 황제였다. 칼리굴라에게 주어진 행운 중의 하나는 앞선 황제들이 이루어 놓은 업적이었다. 칼리굴라가 즉위할 당시에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칼리굴라는 제국의 시스템을 위해서 별다른 수고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앞선 황제들이 만들어 놓은 시스템을 즐기기만 하면 되는 상황에 놓여있었다.

이것은 칼리굴라에게는 행운인 동시에 불행이었다. 성장기를 거쳐 황제에 오르는 과정에서 특별한 어려움을 겪지 않았던 칼리굴라는 가능성과 동시에 위험성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었다. 기본만 유지하면 그 어느 누구보다 뛰어난 황제로 성공을 거둘 가능성도 있었지만, 순탄한 출발은 오히려 면역성의 결핍을 가져왔다. 즐기는 것이 심해지면 방종과 방탕으로 치닫게 되어 빠르게 파멸할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칼리굴라의 출발이 꼭 그렇다.

결국 칼리굴라는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가 남겨놓은 유산을 빠른 시일 내에 소모하며 제국을 파탄으로 몰고 나갔는데, 결과적으로 대제국 로마를 경영할 수 있는 황제로서의 자격이 부족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쿠데타에 의해 그 자신은 종말을 고하고 만다.

제왕 교육의 부재

로마 제국은 역사적인 천재들이 연속으로 등장하면서 공화정에서 빠르게 제국으로 변화를 시도했고, 그야말로 로마의 통치 아래에서는 평화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는 '팍스 로마나' 시대를 단기간에 이루었다. 로마는 왕정에서 공화정 시기에 서서히 점진적인 발전을 거듭하다가 기원전에서 기원후로 넘어서는 기간에 엄청난 높이뛰기를 한 셈이다.

급속도의 발전은 그것을 유지시킬만한 자체적인 교육 시스템을 필요로 한다. 국가 전체적인 교육과 계몽도 필요하지만, 제국의 최고 통치자에 대한 교육 역시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옛날 고대의 국가들에서 후계자로 지목된 사람은 철저하게 제왕이 되기 위한 교육(제왕 교육)을 받아왔다.

그러나 칼리굴라는 정상적인 제왕 교육을 받기는커녕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 밑에서 철저하게 증오심을 키우며 성장해 왔다. 이렇게 비정상적인 교육은 대제국 로마의 초기 황제들 중에서 미성숙한 황제를 맞아들이는 결과로 발전하게 되었다.

가정에서부터 시작하는 교육은 흔히 어머니를 통해서 출발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다. 칼리굴라의 어머니인 아그리피나는 남편인 게르마니쿠스의 죽음이 당시 황제 티베리우스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녀의 증오심은 그대로 칼리굴라의 인격을 형성하는 성장기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로마인이야기>를 읽으며 그라쿠스 형제를 홀몸으로 키우며 자식들을 올바른 인간으로 키운 코르넬리아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보면, 칼리굴라의 어머니인 아그리피나는 남편의 요절에 대해 불타는 적개심으로 자식 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혈통적으로는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를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기에 충분한 그녀였지만, 자식에게 혈통적인 유산 이외의 중요한 요소들(제국을 다스리기에 알맞은 인격 형성 등)은 전혀 남겨주지 못했다.

로마 제국, 하루아침에 멸망하지는 않는다

유명한 작가 세르반테스가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로마인 이야기> 제1권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를 통해서 천년의 제국 로마의 생성과 성장 발전의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이제 막 제국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시점에서 로마는 칼리굴라와 같은 황제를 만나면서 위기에 직면하기도 했다. 칼리굴라에게서 드러난 황제로서의 미성숙함은 결국 로마 제국을 파탄으로 몰고 갔지만, 로마 제국은 어느 한 사람에 의해서 망할 정도로 나약한 제국이 아니었다. 이것은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역시 하루아침에 망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에드워드 기번은 로마 제국 쇠망사를 통해서 로마가 망하는 출발점은 가장 융성하던 5현제 시대부터 그 징조를 보이고 잇다고 설명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외적의 침입과 같은 국가적인 재난의 시기가 아닌 경우에 국가와 같은 거대한 조직은 하루아침에 쉽게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역사적으로 수없이 많은 국가들의 흥망성쇠를 살펴보면, 물론 개인이나 소수의 방탕한 행동에 의해서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는 있지만 역사적으로 쉽게 붕괴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특별히 로마 제국은 당시에 세계 전체를 의미하고 있었는데, 그러한 로마가 어떤 미성숙한 황제에 의해서 쉽게 무너질 정도로 허약하지는 않았다. 칼리굴라와 같은 미성숙한 황제로 인해서 제국이 주춤하기는 했지만 로마는 아직 젊었다. 그리고 주춤했던 로마 제국을 다시 전진시킬 수 있는 성숙한 역사적인 천재들이 많이 있었다는 것은 칼리굴라 이후 로마의 이야기를 통해서 증명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로마인이야기 글쓰기 대회' 응모작입니다


로마인 이야기 1 (1판 1쇄) -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한길사(1995)


태그:#로마인이야기, #칼리굴라, #혈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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