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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 목사님에 대한 기억의 파편

 

1989년 3월, 문익환 목사님께서 평양을 방문한 것은 한국교회와 한국사회에 커다란 이슈가 되었습니다. 소위 진보진영 사이에서도 문익환 목사님의 평양 방문에 대하여 찬반 논쟁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입시교육의 틀 속에 고정된 사고를 하던 나로서는 '무모한 시도', '의도는 좋지만 상대가 김일성이기 때문에 효과가 없음'이라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대학에 입학한 후에 한국사회에 대해서 다양한 시선을 접하기 시작하면서, 막연하게 무모한 방북이었다는 입장에서 점차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내 머리 속에서는 해방 직후의 혼란한 정국에서 모든 사람의 반대를 무릅쓰고 북한을 방문한 김구 선생과 문익환 목사님의 이미지가 상당부분 교차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 이후 직접 대면한 적이 없이 멀리서 스쳐지나가면서 쌓아온 내 기억 속의 문익환 목사님은 반통일 세력이 주도권을 잡은 한국의 사회 속에서 누군가는 이야기를 해야 하고, 언젠가는 해야 하는 그 일을 하신 분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살아계셨을 때에 직접 만나뵙지도 못하고, 잘못 오해하고 있었던 죄송스러움이 마음 한 구석에 계속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장준하 선생님에 대한 막연한 기억

 

장준하 선생님은 유신 독재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분이시고, <사상계>라는 잡지를 통하여 독재 정권하에서 저항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가 일제의 학도병에 지원한 후에 탈출하여 중국대륙을 통과하여 임시정부에 합류한 것은 얼마나 조국의 독립에 대한 의지가 강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한 일화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해방 이후 격동의 한국사 속에서 무엇이 옳은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했던 장준하 선생님은 유신 철폐를 위해 노력하다가 의문의 실족사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준하 선생님께서 의문의 죽음으로 우리의 곁을 떠났다는 상황에 대해서 왜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해 모두가 공감하고 인식하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그분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에 안타까운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최근 장준하 선생님의 죽음에 대해 유골을 검식한 결과 실족사가 아니라 타살 후 추락이라는 것이 밝혀졌지만, 여전히 속시원한 해명이 되지 않고 있는 답답한 상황입니다.  

 

문익환과 장준하 추모예배

 

지난 5월 21일(화) 오후 7시에 '문익환, 장준하 추모예배'가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채플실에서 한국기독교장로회 주관으로 드려졌습니다. 문익환 목사님은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 목사였고, 장준하 선생은 한신대학교에서 공부를 하셨기 때문에 한신대학교 동문으로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한신을 빛낸 자랑스러운 사람에게 수여하는 '한신상'의 첫 번째 수상자가 장준하였습니다)

 

장준하는 유신 독재 시절 '재야대통령'으로 불리우며 박정희 정권의 독재에 가장 치열하게 투쟁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문익환 목사님은 통일 운동에 헌신한 목회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독립운동부터 시작되어 반독재와 통일 운동의 흐름을 살펴보았을 때, 문익환 목사님과 장준하 선생님은 독재와 통일에 대하여 같은 입장을 가졌던 동지이자 친구였습니다.

 

문익환과 장준하를 기억하며 두 분에 대하여 함께 추모예배를 드리면서, 한국기독교장로회는 그 주제를 "뿌리, 그 깊음에 대하여. 친구, 그 따스함에 대하여"라고 정했습니다. 두 사람의 사상의 뿌리의 깊은 곳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으며, 그들의 열정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들, 친구가 바라본 문익환과 장준하!

 

문익환 목사님의 아들인 배우 문성근 선생의 모노드라마를 통해서, 늦봄 문익환 목사님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그리움을 끄집어 내었습니다. 문성근 선생은 형식적으로는 자신의 아버지 문익환을 향해서 넋두리하듯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참여한 우리들 마음을 향해 이야기하였습니다.

 

이후에는 장준하 선생님의 아들인 장호권 선생, 한신대학교 채수일 총장, 한국기독교장로회 배태진 총무의 간단한 인사말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장호권 선생은 한신대학교 신학과 새내기인 2013학번 학생들에게서 희망을 보았으며, 이들을 통해 제2, 제3의 문익환, 장준하가 역사 속에 등장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배태진 총무는 교단 새역사 60주년을 맞이하여 새역사의 정신을 몸소 보여주었던 신앙의 대선배이신 문익환 목사님과 장준하 선생님을 함께 추모할 수 있게 되어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해주었습니다.

 

이어 첫 번째 증언에 나선 김상근 목사님은 "뿌리, 그 깊음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이 시대에 우리가 문익환 목사와 장준하 선생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를 이야기하여 주었습니다. '문익환은 우리 기장의 목사다! 장준하는 우리 한신의 선배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을 향한 외침이 아니라, 우리 내면을 향한 외침이 되어야 한다. 문익환 목사님을 우리 기장의 목사로, 장준하 선생님을 우리 한신의 선배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으려면, 그만큼 우리의 결단과 노력이 필요하다'라는 말씀을 해 주셨다.  

 

 

두 번째 증언에 나선 문동환 목사는 "친구, 그 따스함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친구, 장준하"를 향한 편지를 전하였습니다. '날이 갈수록 장 형이 더 보고 싶다'며 시작한 그는 장준하와의 첫 만남과 열정과 소신, 복음동지회와 형 문익환과의 우정, 그리고 독재정권의 타살에 이르기까지 친구로서의 감정을 편지글로 전했습니다. 문동환 목사님은 마지막으로 "장 형의 죽음은 그냥 죽음으로 끝나지 않아.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며 민족의 등불이 되어 앞날을 밝혀줄거야. 결의에 찬 늠름한 얼굴로 우리 앞에 나타나 줘. 믿겠어"라며 편지글을 마쳤습니다.

 


미국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장호준 목사님(장준하 선생의 아들)은 아버지 장준하 선생님을 향한 영상편지에서 "아버지 그토록 이 민족을 사랑하셨습니까? 아직도 사랑하십니까?"라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아버지인 장준하 선생님은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이 민족을 사랑하였는데, 그리고 유골을 보여주기까지 하셨는데, 아직도 이 세상은 다까끼 마사오(박정희)와 그의 딸, 반통일 세력이 활개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7천명을 남겨놓은 것처럼 아직 1300만의 동지들이 있기에 희망이 있을 것이며, 그 희망을 바라보고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짐을 하였습니다.

 

문익환, 장준하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부른 '임을 위한 행진곡'

 

이번 '문익환, 장준하 추모예배'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추모 행사와는 달리, 고인에 대한 기억을 함께 나누면서도 무겁지 않게 음악과 노래로 고인의 뜻을 기리는 행사가 되었습니다. 통일을 위해 평양을 방문한 것을 소재로 '서울에서 평양까지'라는 노래도 부르면서, 같은 민족이지만 함께 교류하지 못하는 아픔을 노래로 달래기도 했습니다. 특별히 문익환과 장준하를 기억하는 모두가 함께 부른 "임을 위한 행진곡"은 때가 때이니만큼 더욱 절실한 행진곡이 되어 수유리 하늘에 울려퍼졌습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 동영상을 보시려면 이곳을 클릭하세요


태그:#문익환, #장준하, #임을 위한 행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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