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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여름 <인간연습>에서 '밥 먹는 철학'의 중요성을 일깨우며 이데올로기란 결국 인간의 문제임을 설파했던 조정래님이 만개하는 새 봄과 함께 <오 하느님>(문학동네)을 외치며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오 하느님', 언뜻 조정래의 기도로 듣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그 일성이 궁금하여 소설을 읽기 시작하였다.

소설을 다 읽고 말미에 있는 해설과 작가의 말을 읽고 나서야 이 소설이 실화를 바탕으로 하여 써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세계 2차 대전의 분수령이었던 연합군의 노르당디 상륙작전 당시 미군에 붙잡힌 독일군 포로 중에 동양인이 있었고 그들 중에 또한 한국인이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미공수부대의 증언을 바탕으로 제작된 TV 시리즈물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원작자이자 전쟁사학자인 스티븐 앰브로스는 자신의 저서 'D-DAY'에서 한국인 독일군 포로에 대하여 언급하였고, SBS는 2005년 12월 'SBS 스페셜' 21회와 22회에서 이를 소재로 그것이 사실인지 그 한국인이 누구인지를 추적한 바 있다는 것이다.

몇 편의 기사에 의하면 한국인 독일군 포로를 증언하고 있는 사진 속의 인물은 신의주 출신의 양경종이며 전쟁이 끝난 후 미국에서 살다가 죽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것도 여러 개연성에 근거한 추측일 뿐 확실하지 않다. 한 장의 사진이 던져주는 충격과 의문은 소설 바깥에서 기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민족 수난의 역사를 증거하고 있는 이 불우한 운명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분명한 것은 그가 누구이든 그는 일제에 의하여 징용(전쟁위안부 등 여전히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일본에 의하면 지원이겠지만)되어 일본군으로는 북만주전선에서 소련군과 싸웠고 소련군의 포로가 되었으며, 다시 소련군이 되어 대서양전선에 배치되어 독일군과 전투를 치렀고, 이번에는 독일군 포로가 되어 독일군복을 입고 연합군의 노르당디 상륙작전의 방어 임무를 수행하다 미군의 포로가 되었으며, 그가 코리언이었다는 사실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개인이 증거하는 민족의 역사

▲ "이 남자는 1939년 소련과 일본의 만주전선에서 일본군으로 참전하였고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붉은 군대에 소속되었고 다시 독일군과 싸우다 붙잡혀 독일군으로 대서양전선에 투입되었다가 미군의 포로가 되었다. 누구도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는데, 그는 한국인으로 밝혀졌다"고 전하고 있는 기사.
ⓒ Osprey
조정래의 대하장편 3부작(태백산맥, 아리랑, 한강)과 일련의 역사소설들이 가지는 소설적 힘은 무엇보다 공식역사로써 편입되지 못한 일개인의 역사, 혹은 기록으로 다루어지지 않는 기층 민중들의 얼룩진 삶을 통해 역사로 기록된 어떤 역사적 사실보다 더욱 강하고 깊은 울림으로 당대와 그 역사적 진실들을 증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조정래의 역사는 공식적인 역사에서 탈락하고 배제된 민초들의 역사이며 그가 소설양식을 빌려 복원해내는 시대와 그 시대를 살았던 인간들은 역사라는 기록의 행간과 여백에서만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그 행간과 여백의 역사는 어떤 기록에서도 증거하지 못하는 생생한 역사적 진실들을 들려준다.

공식적인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당대의 삶과 고난을 유추하는 것이 아니라 당대의 시간과 사건 속에 던져진 개인의 삶과 시간의 궤적을 쫓아 역사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굳이 '문제적 개인'이랄 것도 없이 그 시대를 살았던 거의 다수가 겪었음직한 역사의 격랑 위에서 저항하지 못하고 스스로 결정하지도 못하는 운명의 개인은, 그래서 그 시대의 온갖 수난을 모조리 겪어내야 한다. 그것만이 살길이므로.

소설 속의 주인공 신길만 역시 어떤 역사의 기록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한 개인에 불과하다. 함께 등장하는 다른 조선인 동료들 또한 그렇다. 농사짓다 끌려왔든 머슴 살다 끌려왔든, 함경도 출신이든 전라도 출신이든, 고향에 자식과 아내가 있든 없든, 그들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전쟁 통에 끌려가 돌아오지 않는 그들의 이름을 부르다 제대로 눈도 감지 못했을 그들의 부모 아내 역시 이제는 혼으로 구천을 떠돌 뿐이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에게, 역사에게 가져다주는 의미는 심상치 않다. 그들에게 독립과 광복은, 많은 선구자들이 치적처럼 내세우는 민족의 새날과 미래를 위한 투쟁의 결과물일 수 없다. 광복이란 살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본능적 열망 하나에 불과하다. 그래서 참호를 파고 또 파고 혹독한 수용소 생활을 견디며 군복을 바꿔 입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들은 강대국에 빌붙어 외교력에 의한 광복이 첩경이라고 내세우지 않는다. 무장투쟁을 통한 해방만이 능사라고 우기지도 않는다. 민족자결주의가 무엇이고 볼세비키가 무엇인지 알 겨를도 없다. 굶주림에, 송곳처럼 파고들어 뼈까지 얼리는 추위에 정신을 놓지 않아야 하고 쏟아지는 포탄을 죽기로 피해 다녀야 한다. 적과 아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사느냐 죽느냐 생존의 문제만이 있을 뿐이다.

오 하느님, 우리 모두 신길만인 것을요

"알지야? 호랑이한테 열두 번 물려가도 정신만 채리면 살아난다는 말."
"총알 피해 댕겨라."


도무지 말 같지도 않은 어머니, 아버지의 이 당부가 신길만에게는 어떤 구원의 복음보다 값지고 절실하다. 그래서 그들은 일본군으로 소련군으로 독일군으로 총을 들었지만 그들이 쏜 총알은 적을 죽이기 위한 총알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이 살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공식적인 역사가 많은 독립운동과 식민지배의 만행을 기록하며 내일의 귀감으로 삼고자 할 때, 그들은 숱한 고난과 수난의 역사를 몸으로 기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삶보다 더욱 생생한 민족 수난의 현장이 어디 있으며 냉엄한 세계 질서의 재편 기록이 어디 있을까. 지도의 동쪽 귀퉁이 한 약소국의 신민으로 태어난 죄밖에는 없는 그들에게서 기자는 가혹한 역사의 통곡 소리를 듣는다. 몸이 찢겨나갈 것 같은 아픔과 분노를 느낀다. 해방과 공영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강대국들의 무참한 범죄와 학살에 몸서리를 치지 않을 수 없다.

조정래의 냉엄한 펜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소설을 읽으며 비록 다 망가진 삶의 강토에 광복의 날이 밝았음으로 신길만은 집으로 돌아갈 줄 알았다. 그러나 앳된 한국인 병사는 시리도록 차가운 북간도의 동토 위에서 누가 난사하는 총알인지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체 생죽임을 당한다. 집에 돌아가는 줄만 알았을 그의 눈은 감기기는커녕 그 억울함에 총알처럼 튀어나왔을지도 모른다.

이데올로기와 종교와 수치스런 셈법으로 다른 민족 고유의 삶을 제 맘대로 쥐락펴락해야 직성이 풀리는 인종들을 나라들을, 또한 그들을 추종하며 제 민족의 살을 바르고 뼈를 자르는 살인마 같은 무리들을 그의 눈알이 저 위에서 보고 있을 것이다.

'오 하느님, 아이고 하늘님! 아직도 우리를 이 지옥에 그대로 두시렵니까. 모든 비인간적이 것에 저항하라니요? 저항할 수 있다면야…, 우리 모두 신길만인 것을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U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 <오 하느님>/조정래/문학동네/9500원


오 하느님

조정래 지음, 문학동네(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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