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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요하> 책사진
▲ 소설 <요하> 1, 2, 3권(나남출판사 제공) 소설 <요하> 책사진
ⓒ 나남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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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제국을 건설했던 고구려가 북방 이민족들을 로마인들처럼 우리에게 동화시킬 수 있었다면 어쩌면 현대의 중국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중원의 마지막 패자는 우리가 북방의 오랑캐로 지배했던 여진족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당연합군에 의한 통일이 아니라 고구려에 의한 통일이었다면 오늘날의 동북공정도 없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가정에 불과하지요. 역사에서 가정이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가정을 통해 우리는 앞으로의 세상을 위한 교훈은 얻을 수 있습니다. 역사적 불행의 반복이나 실수를 예방할 수 있습니다. 위도 상으로도 거의 비슷한 반도인인 우리는 로마인이 지녔던 세계인으로서의 안목이 없었기에 섬나라 일본의 군홧발에 강토를 유린당했습니다.
- 졸고 <로마인이야기> '로마인에게서 배우는 그들의 근대성' 중에서

김성한의 대하장편소설 <요하>를 읽고 맨 처음 드는 생각이 이와 같았습니다. 특히 저자 김성한의 각고의 노력과 사료의 수집으로 복원해낸 백제와 고구려의 어처구니없는 패망의 전모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역사의 가정에 사로잡히게 만들고 그 억울함에 두고두고 통분을 금치 못하게 합니다. 그만큼 소설 <요하>는 우리의 가슴 속에 빼앗긴 대륙, 잃어버린 대륙의 혼을 다시 지피고 활활 타오르게 합니다.

그나마 두 동강 난 반도의 역사를 사는 우리에게 고구려는 언제나 살아있는 대륙의 지배자이자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위대한 역사입니다. 그러기에 역사의 가정은 안타까움을 넘어 차라리 한(恨)이 됩니다. 저자가 서문에서 인용하고 있는 백낙천의 장한가 일절처럼 "이 한, 면면히 이어져 다할 날이 없"을 것이지요. 저자는 소설을 통해 광활한 대륙의 지배자였던 고구려를 오늘에 되살리고 그 패망의 생생한 현장까지 주저 없이 그려냄으로써 역사의 실패를 경고합니다.

소설로 되살려낸 생생한 역사의 현장

소설 <요하>는 수양제(隋煬帝)가 1백여만 대군으로 요하를 건너 고구려를 침공했던 서기 612년부터 평양성이 나당(羅唐) 연합군에 함락되던 668년까지, 56년간의 고구려를 역사적 사실과 허구의 소설적 형식을 빌려 보여줍니다. 저자가 이미 말했듯이 허구와 사실(史實)과의 거리는 독자들의 몫일 뿐, 그 안의 역사는 그대로 고구려의 역사라 해도 무방합니다. 소설의 주인공 능소와 그의 아들 도바는 비록 허구의 인물일망정 그들이 겪은 전쟁과 정치적 사건들, 그들과 당대를 함께한 인물들은 역사에 기록된 이름들인 것이지요.

책의 제목인 '요하'는 오늘날 랴오허강으로 불리는 강의 이름입니다. 고구려가 지배했던 대륙의 지명인 요동(요하의 동쪽)은 바로 그 강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 강을 사이에 두고 고구려와 중원의 패자는 끊임없는 전쟁을 치러야 하는 것이 역사의 운명이었습니다. 중원의 패자에게 요동은 한사군(漢四郡) 이후로 회복해야할 중원인의 땅이었고 고구려에게 그것은 한 때의 치욕스런 실지(失地)였을 뿐 요동은 그들이 나라를 건국한 조상들의 땅이었고 한민족의 본향이기도 했습니다.

싸움은 피할 수 없습니다. 소설 <요하>는 수·당과의 그 피할 수 없는 싸움터로 독자들을 이끕니다. 말발굽 소리가 대륙을 진동하고 팽팽히 당겨진 활시위에서는 바람의 비명소리가 들립니다. 아비규환의 전쟁터에 내몰린 당대의 백성들이 울부짖고 있는 것이지요. 중원의 패자에게 잃어버린 자존심 회복 혹은 제 나라의 흉흉한 인심을 돌리기 위한 방편인 것이 고구려 백성에게는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한 목숨을 건 생존입니다. 고구려인의 굴강한 기개나 전승의 신화는 바로 그런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그러나 무엇보다 소설 <요하>가 문제적이고 매력적인 것은 당대의 전쟁을 생생히 보여주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주인공 능소와 상아, 그의 아들 도바와 백화의 사랑 같은 절절한 연애 이야기는 더더욱 아닙니다. 상아를 두고 능소와 대립하며 극악한 도발과 놀라운 배신을 보여주는 야장 지루와 그의 아들 부도의 이야기도 아니지요. 이 소설은 당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모습을 오늘의 현실로 재현해 보여줍니다. 때문에 독자들은 어느새 역사적 시간의 한복판에 서있게 되는 것이지요.

그 안에는 그저 농사나 잘되는 것이 바람의 전부인 촌부의 삶이 있는가 하면 살인적인 추위와 굶주림 같은 전장의 피로를 마다않는 고구려 무사의 혼이 있고 노심초사 그들을 기다리는 연인들의 애타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 뿐인가요. 음모와 간계가 서로를 물어뜯는 추악한 정사의 뒷마당이 있는가 하면 시기와 모함 속에서 자라난 독버섯 같은 후궁들의 암투와 내밀한 이부자리가 있지요.

소설은, 저자의 시선은 고구려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방대한 사료의 수집과 이에 근거한 탄탄한 이야기 구성, 사건의 사실적 묘사는 백제와 신라가 처한 정치적 운명과 처세, 중원의 은밀한 후원에까지 미칩니다. 수양제의 몰락에서부터 당태종의 치세, 그의 사후 벌어지는 권력의 쟁투와 후에 측천무후가 되는 무재인의 은밀하고도 악랄한 욕망, 소국의 운명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김춘추의 구걸외교까지 역사는 저자의 붓끝에서 생생한 현실이 됩니다.

저자가 되살려낸 역사의 시간 속에서 독자인 우리는 을지문덕의 고뇌를 엿보기도 하고 연개소문의 야망을 슬쩍 훔쳐보기도 합니다.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서도 '은고'(의자왕의 왕후로 우리의 사료에는 없는 것을 저자가 발굴)의 치마폭에 쌓여 나라꼴을 그르친 백제왕의 한심함에 울분을 억누르는가하면 형제간의 의심으로, 특히 장자로서 아버지의 '마리치'(재상)자리를 물려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에 투항하여 앞장서 나라를 절단 낸 남생의 대목에 이르면 치미는 분노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그 때문에 역사의 가정은 끝이 없어서 하다못해 일본에서 귀국한 백제태자 '풍'만이라도 사람 구실을 했더라면, 연개소문에게 아들이 차라리 하나였더라면 아니 차라리 경망한 남생을 도바의 후회처럼 미리 제거할 결단이라도 있었다면, 저 광활한 대륙의 지배자는 한민족이었을 것이라 원통해하는 것이지요. 신라가 외세의 개입으로 초래될 참담한 결과와 한 핏줄을 가진 민족적 동질성을 조금만 일찍 깨우쳤더라면 허망한 역사의 실패는 없었을 것입니다.

빼앗긴 대륙, 그러나 다시 빼앗길 수 없는 대륙의 역사

"그렇지요. 그러기에 나는 이 난국을 걱정하지 않소. 오히려 평화가 오는 날이 두렵소. 우리들이 다 가고 평화로운 세월이 흐르면 무슨 일이 있을지……."
"후세의 일은 후세에게 맡기는 도리밖에 없겠습지요." - 책 1권 154쪽

수양제의 침공으로부터 고구려를 구해낸 명장 을지문덕과 국상인 연개소문의 아버지 연자유의 대화입니다. 그들의 대화 속에 고구려의 역사와 운명이 다 담겨 있습니다. 을지문덕은 백만대군이 침공한 전시를 걱정하지 않습니다. 적을 맞아 국론이 통일되고 단합된 고구려는 차라리 걱정이 없습니다. 준비하고 훈련한 대로 일치단결하여 적을 섬멸하고 몰아내면 될 일이고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다만 연자유의 우려처럼 후세의 일은 그들도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꿈꾸고 희원하는 역사의 가정으로 시간을 되돌릴 수 없듯이, 앞으로의 일들을 우리의 뜻대로 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린 언제나 오늘을 살 뿐이죠. 후세의 일은 후세에게 맡길 도리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고 기록하는 이유는 역사를 통해 후세의 일들을 미루어 짐작하고 그에 따라 후세에 벌어질 비극을 막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고구려의 역사는 전대의 역사로부터 오늘과 내일의 걱정거리들을 미리 짐작하여 준비하지 못합니다. 중원의 사정은 고구려의 손으로 어찌하지 못했을지라도 수의 멸망과 당의 건국 과정 중, 즉 요동의 정세가 안정된 그 시기에 남쪽이라도 치밀한 안배를 했더라면 고구려가 그리 허망한 패망의 길을 걷지 않았을 것입니다. 을지문덕의 예견은 그대로 현실이 되어 평화로운 시기에 고구려는 자신들의 의기를 잃어버렸던 것이지요.

또 하나, 글의 서두에서 인용한 로마의 역사에서 배우듯이 고구려가 진정한 북방의 지배자로서 의연하고 대범한 길을 걸었더라면 어쩌면 오늘날까지 대륙의 패자는 한민족이었을 것이라는 역사의 가정을 지울 수 없습니다. 즉 여진과 말갈 같은 요동의 부족들을 고구려인들로 동화시킬 수 있었더라면 요동은 중원의 패자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우리 민족의 땅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란 가정인 것이죠. 그렇다면 그 후의 역사는 우리에게 전혀 다른 시간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입니다. 외세에 의한 개방과 근대화를 강요당한 우리의 근현대사는 고구려의 패망처럼 우리 역사의 무대를 반도의 좁은 땅으로 밀어 넣었고, 그마저 왜곡되고 일그러진 모습으로 우리의 역사를 농단했습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분단된 반도의 역사는 지금도 피 흘리며 우리의 삶을 질곡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지요. 대륙은커녕 반 토막 난 반도의 끝자락에서 마치 그 시절의 시간처럼 한 핏줄끼리 물어뜯고 있을 뿐입니다.

하물며 그 시절의 후세인 중원의 패자는 이제 세계의 패자가 되기 위한 거침없는 행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 시절 요하를 건넜던 백만 대군은 이제 13억이 넘는 대군이 되어 반도의 북쪽까지 지배합니다. 통일 신라의 땅보다도 못한 좁은 땅덩이에서 민족이 신음하고 있는 때에 중원의 오랑캐는 우리의 역사까지 자신들의 것으로 각색하고 아예 말살하려 합니다. 이른바 동북공정인 것이죠.

비록 땅을 빼앗겼을망정, 그 고토의 회복이 불가능할망정 대륙을 지배했던 찬란한 우리의 역사, 위대한 정신까지 빼앗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소설 <요하>는 광개토대왕이 대륙을 종횡무진 달리던 자랑스러운 역사를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소설은 오히려 부끄럽고 슬픈 패망의 역사를 오늘에 되살려내면서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이죠. 대륙까지 빼앗긴 채로 대륙의 역사까지 빼앗길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소설 <요하> 1, 2, 3권에 대해
지난해(2010년) 91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한 작가 김성한의 대하소설《요하》가 스피디한 전개와 감각적인 디자인으로 나남에서 새롭게 출간됐다. 원문의 웅장한 스케일과 치밀한 구성, 탄탄한 스토리는 그대로 살리고 기존 문어체나 다소 지루한 부분은 과감히 교정ㆍ생략, 감칠맛과 몰입도를 극대화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수나라 양제의 백만대군을 살수에서 격퇴한 역사적 사실을 통해 민족 생존을 위한 투지와 항전을 그린《요하》는 고구려史를 주제로 한 대하소설의 종결자로, 올 여름 휴가철을 강타할 대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대하소설《요하》는 1968~1969년〈동아일보〉에 1년여간 연재한 것을 이후 방대한 수정과 보완을 거쳐 3분의 2가량의 분량을 추가해 1980년에 원고지 5,500매의 장대한 소설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 과정에서 작가 김성한은 한국 측의 사료와 논문, 금석문(金石文)을 치밀하게 조사한 것은 물론 중국과 일본의 사료까지 광범위하게 조사해 소설의 사실성(史實性)에 완벽을 기했다. 예를 들어 소설에 등장하는 의자왕의 왕후 '은고'(恩古)는 한국 측의 사료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인물을 작가가 자료수집 과정에서 발굴해낸 사례다.


요하 1 - 영웅의 탄생

김성한 지음, 나남출판(2011)


태그:#김성한, #요하, #고구려, #연개소문, #살수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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