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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지나간 자리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린다. 시원한 바람보다 누군가의 온기가 그리운 계절이 왔다. 아, 어느 계절이 지나가 버린 거지……. 지루한 수업 시간, 나도 모르게 공책에 한줄 쓴다.

당신에게……

언제가 마지막이었지? 참았던 마음들이 저도 모르게 손끝으로 새어나와 괜히 날씨탓 계절탓 하며 그 동네, 그 골목길, 그 집 앞, 그 우편함을 찾아 헤맸던 날이. "라일락이 필 때쯤이면 부지런히 답신이 오고 있겠지요." 수줍게 연애편지를 보냈던 날이 언제였던가. "괜히 가을이라, 잊고 지내던 안부를 물어요." 몇 해 지나도록 고백 못한 마음을 서투른 편지에 담아 보낸 건 또 언제였던가.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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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그 다음이 뭐였더라, 맴맴,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도돌이에 또 도돌이표다. 한줄 "당신에게"는 어떤 당신을 부르고 있는 거지? 집으로 돌아와 오래 듣지 않은 오디오를 열고 1993년 김민기1집을 찾아 건다. 그저 마음만 있고 사연이 없는 편지를 쓰다 만 가을날, 1970년 최양숙이 부른 원곡보다는 1993년 김민기가 다시 부른 <가을편지>가 못다 한 편지를 이어줄 것만 같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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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고은의 시에 스무살 청년 김민기가 곡을 붙인 <가을편지>. 1971년 <김민기> 음반 출반을 주선해주었던 경음악 평론가 최경식의 동생인 가수 최양숙을 위해 고은의 시에 선율을 붙인 김민기. 샹송을 즐겨 불렀던 최양숙을 두고 써서 그럴까? 이국의 가을바람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후 몇몇 가수들이 다시 부르기를 했지만, 작곡자인 김민기가 다시 부른 곡에 비할까.

이병우의 클래식 기타 연주 속에 불혹을 넘긴 김민기가 떨리는 목소리로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라 한다. 사연이 없기는 매한가지,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길 바라는 가을편지. 먼 산에서부터 울긋불긋 내려오던 고운 단풍은 어느새 낙엽이 되고 찬바람만 부는 늦은 가을날. 지금도 활활 타오르는 고은 시인은 30여 년 전 사연이 없고, 대상이 없어도, "외로운 여자가 아름"답다 노래한다. 그러나 사연도 대상도 없는 편지를 쓰다만 나는 그만 "외로운 여자"가 되고 만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낙엽이 흩어진 날
헤메인 여자가 아름다워요

낙엽이 흩어진 날 낙엽이 사라진 날
▲ 낙엽이 쌓이는 날 낙엽이 흩어진 날 낙엽이 사라진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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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처럼 다시 돌아가는 2연, 2절. 외로운 여자가 된 나는 다시 연필을 든다. 늘 곁에 있어 익숙한 연인에게는 미안하지만, 이젠 안부인사도 건넬 수 없는 옛(짝)사랑에게 그 시절 못다 한 마음들을 노래에 기대 내려놓는다. 쌓인 낙엽이 겨울로 가는 바람에 흩어지고 있으니……. 그렇게 내려놓는 마음들은 사연은 있으나, 대상이 없어 헤매기만 한다. 고백도 못하고 돌아선 마음은 이렇게 길을 잃었어요. 그 시절 나는 당신을 찾아 "헤매인 여자"였군요.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보내드려요 낙엽이 사라진 날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무슨 마음이었을까? 손바닥으로 시린 팔을 쓸어내리기를 반복하면서도 가을 옷을 꺼내 입지 않은 건. 투명하도록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걸 보면서도 "가을이구나" 되뇌지 않은 건. 시월의 마지막 날 아침부터 내린 비에 잔뜩 웅크려진 날씨에 하얀 입김이 나오는 걸 보면서도 가을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음을 모른 척 한 건. 지난 세 계절의 이야기를 모두 비워내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겨울이 되어서도, "낙엽이 사라진" 걸 몰랐다 하려나. 그렇게 답신이 오지 않은 지나간 모든 날들을 "모르는 여자"가 되려나, 그러려나.

부치지 못한 편지가 까닭...
▲ 오지 않는 답신 부치지 못한 편지가 까닭...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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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여자"가 "헤매인 여자"가 되어 지난 어느 가을 전하지 못했던 편지를 꺼내어본다. 답신이 오지 않은 건, 내가 보내지 못한 까닭. 지난 시절, 홀로 원망 많이 한 마음의 까닭을 몰랐던 여자가 뒤늦게 가는 가을을 "보내드려요".

청아한 이병우의 서주가 무색하리만치 낮고 낮은 목소리로 노래하는 김민기. 한 글자 한 글자 조심스럽게 노래한다. 인생의 가을에 들어선 중년이 청춘의 한 자락에 보내는 떨리는 안부인사일까. 클라이막스에 해당하는 "아름다워요" 고음에 이르러선 아스라이 사라져가는 담배연기처럼 지난 세월의 한숨이 새어나온다. 기다리던 답신은 끝끝내 오지 않았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아름다워요" 노래하는 불혹의 김민기는 이병우의 서정적인 기타 연주보다 더 맑은 울림을 남긴다.

보내는 가을편지
▲ 외롭고, 헤매이고, 몰랐던 지난 시절에게 보내는 가을편지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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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 쓰고 쓰다만 편지는 외롭고, 헤매이고, 몰랐던 지난 시절의 가을 속으로 부쳐졌다. 누구의 가을을 향해 어디로 가는지는 바람에 또르르 굴러가는 낙엽이 알겠지. 그 낙엽을 보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열일곱 소녀들이 깊어가는 가을밤 긴긴 편지 대신 미니홈피 몇 장의 사진과 몇 줄의 안부로 알려주겠지, 그러겠지. 그렇게 또 하나의 가을편지가 불려지겠지.

1971년 <김민기> 음반이 그리운 이들에게


'아침이슬'이 수록된 <김민기 1집> 음반은 박정희 시대에 판금 조처당했다가 87년 민주항쟁 직후 복원판으로 다시 발매되었다.
 '아침이슬'이 수록된 <김민기 1집> 음반은 박정희 시대에 판금 조처당했다가 87년 민주항쟁 직후 복원판으로 다시 발매되었다.
많은 이들이 지금은 희귀음반이 된 1971년 <김민기>를 추억한다. 단아한 스무살의 목소리를 그리워한다.

걱정마시라. CD로 복각되어 우리 곁에 있으니. 1993년 4장의 앨범들은  동숭동에 학전 소극장  설립 및 운영자금을 위한 출반이기도 했지만, 7,80년대 보이지 않는 폭력과 싸우며 떠돌아다니느라 '김민기'라는 이름을 제대로 달지도 못했던 '자식'들을 한데 모아 당당히 이름을 달아주는 작업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10년이 흘러 2004년 <past life of 김민기>라는 제목 아래 1971년 <김민기>과 1984년 <노래일기 아빠얼굴 예쁘네요>를 복각, 1993년의 4장의 음반과 함께 묶어 여섯장 박스셋으로 출반 되었다. 더 이상 LP판이 나오지 않는 이때, 비록 6장의 CD가 들어있기는 하지만, 1971년 김민기의 얼굴이 음각, 양각으로 새겨진 LP 크기의 <past life of 김민기>는 더없이 반가운 '가을편지'가 될 것이다.

스무살 김민기가 부르는 <아침이슬>과 불혹을 넘긴 김민기가 부르는 <아침이슬>을 번갈아 듣노라면 잊고 있었던 사연들이 우수수 낙엽처럼 쌓일 테다. 외롭고, 몰랐고, 헤맸던 마음들이 어느 틈엔가 곁에 돌아와 오랜 벗이 되어있을 테다.

덧붙이는 글 | '나의 가을 노래' 응모



태그:#가을편지, #김민기,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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