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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정숙

흐르는 시간과 함께 추억 속으로 아스라하게 멀어져간 친구를 떠올리게 하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가을에 흥얼거리며 불렀던 노래나 그 노래에 담긴 사연의 주인공과의 아련한 이야기가 담긴 글을 공모 중인데 추억의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그 사연을 글로 써서 보내주실 수 있나요?"

 

뜻밖의 전화를 받고 '나에게도 기사로 풀어낼 만한 추억이 있을까?'란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리곤 곧장 타임머신을 타고 25년 전으로 날아갔죠.

 

저에겐 결혼과 동시에 만남이 끊어진 절친한 친구가 있습니다. 직장 동료였는데 요즘 유행하는 말로 '코드'가 잘 맞아 쉬는 날이면 고궁, 음악다방 등을 찾아 재잘거리곤 했죠. 좀 멀리 나갈 수 있는 시간이 되면 기차에 몸을 실고요.

 

단풍이 붉게 타는 가을이 오면 단풍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어 밤 열차를 타고 단풍이 곱다는 백양사로 향하곤 했는데, 그 기억도 어렴풋이 떠오릅니다. 밤새 기차로 달려 백양사에 도착하면 아름다운 단풍과 조우하기 위해 산행을 했습니다. 그리곤 그날 밤 다시 열차에 몸을 실었죠. 당연히 몸은 피곤했고 꾸벅꾸벅 졸면서 근무를 했던 기억도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힘들게 산행을 하고 있으면,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이 "어디서 오셨나? 젊은이들이 산을 오르니 보기가 참 좋구려!"라며 싸가지고 온 김밥과 과일을 건네주기도 했습니다. 밤새 기차를 타고 왔던 우리는 배가 고프던 차에 고맙다며 맛있게 먹었지요. 우리들의 우정이 알알이 영글어 가는 것을 서로가 감사하며 "무슨 일이 있어도 변하면 안 돼"하고 새끼손가락을 걸기도 했습니다.

 

그 시절 우리는 떨어져 뒹구는 낙엽을 보며 시를 읊조렸고 낙엽을 주워 책갈피에 꽂으며  센티멘털해진 기분을 맘껏 만끽했지요. 여유로운 시간이 생기면 우린 종로에 있는 '모아'라는 음악다방을 자주 찾곤 했습니다. 당시 그룹 스모키를 무척 좋아했던 나는 스모키의 'Living next door to Alice'와 'What can I do'를 신청했습니다. 또 그 친구는 노고지리의 '비와 찻잔 사이'와 '찻잔'을 메모지에 적어 디제이에게 직접 가져다주며 살짝 윙크를 보내고 뒤돌아서며 깔깔거리곤 했죠.

 

신청한 음악이 나오기 전까지 친구는 자기의 꿈을 얘기하곤 했고 꼭 저기에 있는 디제이를 꼬드겨서 사귀고 말 거라고 하곤 했습니다. 당시에는 갖은 폼을 잡으며 음악을 틀어 주었던 디제이가 친구에게는 최고 멋진 사나이로 보였나 봅니다.

 

그 디제이를 보기 위해 찻값을 많이 지불했어야 하니까요. 친구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난 "내가 도와줄게, 걱정마"라고 둘만의 은밀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었죠. LP판에서 흘러나오는 맛깔스러운 음색에 푹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던 때였습니다. 그 시절에만 느낄 수 있었던 특별함이었죠.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친구와 함께 음악다방을 찾았고 스모키 노래를 신청하고 차를 마시고 있는데 마이크를 통해 디제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저기 창가에 앉아 있는 두 분의 모습이 겨울을 재촉하는 가을비와 참 잘 어울립니다. 오늘은 왠지 'Living next door to Alice'를 신청하신 분과 함께 차 한 잔 하고 싶어지네요!"

 

아뿔싸! 순간 친구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커다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더군요. 무슨 일이든 늘 먼저 양보를 했던 마음 넓은 친구가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뚝 흘릴 것 같아 불안하기까지 했답니다.

 

그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디제이 아저씨는 우리를 향해 미소를 보냈습니다. 저는 친구에게 마땅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가시방석이었고요. 얼마간 우리들의 어색한 침묵이 흘렀고 이어서 '비와 찻잔 사이'가 귓가에 들려옵니다. 얄미운 디제이 아저씨….

 

친구의 우정을 한순간에 무너뜨리고, 이제는 친구가 신청한 음악을 틀어주다니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비와 찻잔 사이'의 노랫말이 우리들을 대변해주는 듯 더욱더 간절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우리는 말없이 음악다방을 나왔습니다.

 

같은 직장에 다녔지만 누구의 잘잘못이랄 것도 없이 서로 말이 없어졌고 어느 날부턴가 서로가 소원해지더군요. 그런 일이 있은 후 얼마 되지 않아 저는 직장을 그만두고 결혼을 했지요. 별것도 아닌 것을 왜 그때는 그리 힘들어 했는지, 지금 생각해봐도 참 한심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제는 말할 수 있습니다. "친구야! 보고 싶다"고…. 이 가을이 저물기 전에 그때 그 시절 우리가 느꼈던 낭만과 추억을 간직하며 낙엽이 수북이 쌓인 길을 친구와 함께 걷고 싶습니다. 경춘선을 타고 강촌에 가, 분위기 있는 찻집에서 음악을 들으며 차를 마시고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남이섬을 다시 찾아 오래 전 함께 걸으며 밟았던 낙엽길을 다시 걸어보고 싶습니다. 예전처럼.

 

그리고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가지 않았던 그 음악다방이 지금도 있다면 다시 가서 친구가 좋아했던 노고지리의 '비와 찻잔 사이'를 듣고 싶습니다. 우리의 우정을 한순간에 앗아가 버린 장발에 도끼빗을 자랑하던 그 디제이 녀석은 볼 수 없겠지만….

 

'비와 찻잔 사이' - 노고지리

 

지금 창밖엔 비가 내리죠.

그대와 난 또 이렇게 둘이고요

비와 찻잔을 사이에 두고

할 말을 잃어 묵묵히 앉았네요.

지금 창밖엔 낙엽이 져요

그대 모습은 낙엽 속에 잠들고

비와 찻잔을 사이에 두고

할 말을 잃어 묵묵히 앉았네요.

그대 모습 낙엽 속에 있고

내 모습은 찻잔 속에 잠겼네.

그대 모습 낙엽 속에 낙엽 속에

낙엽 속에 잠겼어요.

덧붙이는 글 | '나의 가을 노래'


태그:#나의 가을 노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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