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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2월 '민족 유일당 민족협동전선'이라는 표어 아래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제휴하여 신간회가 결성되었다. 내부적으로 좌우익의 갈등은 있었지만, 전국에 지회(支會)와 분회를 조직하며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1927년 어린이날 행사를 조선소년운동협회와 오월회 각각 준비하여 개최하였다. 방정환이 오월회원이라 협상을 통해 단일행사를 했지만 실패했다. 오월회는 조선소년운동협회는 어린이날 행사를 준비하는 비상설기구이므로 전국규모의 소년운동단체인 오월회가 주관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조선소년운동협회는 오월회에 모든 소년운동단체가 가입한 것이 아니므로 대표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어린이날 행사는 분열된 채 진행되었다.
-1927년 5월 어린이날 행사는 각각 따로 열려 소년운동의 분열을 보였다. 사진 위는 오월회, 아래는 소년협회 어린이날 행사(조선일보, 1927.05.05.).
▲ 어린이날 기행렬 -1927년 5월 어린이날 행사는 각각 따로 열려 소년운동의 분열을 보였다. 사진 위는 오월회, 아래는 소년협회 어린이날 행사(조선일보, 1927.05.05.).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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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일 소년운동협회는 천도교회관에서 2백여 단체 약 3천 명이, 오월회는 시천교당에서 50여 단체 약 2천 명의 소년소녀가 행사에 참여하였다. 악대를 선두로 어린이노래를 높이 부르며 줄을 지어 견지동, 경운동, 종로통, 황금정 등 중요한 시가지를 행진하여 시위를 한 후 5시경에 광화문통 과장에서 어린이 만세 삼창을 하고 흩어졌다. 경찰은 만일을 대비하여 기마경관대를 특파하고 사복과 정복 경관을 파견하여 어린이 행렬을 감시하였다.

소년운동의 분열된 양태에 대해 사회는 결코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신간회운동에서 보듯이 분열에서 통일로의 길을 가야했다. 1927년 7월 30일 경성 시천교당에서 '조선소년연합회' 발기대회가 열렸다. 천도교당이 아닌 시천교당에서 열림은 당시 시천교와 서울청년회가 계급주의 노선으로 활동하고 '오월회'나 '조선소년연합회'를 이끈 정홍교가 시천교청년당원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발기대회를 앞두고 김태오는 소년운동을 통일적으로, 조직적으로, 계획적으로 하자고 주장하였다. 발기대회는 총 4개 연맹단체와 68개의 개별단체가 모여 창립준비위원을 지역별 위원과 경성의 방정환, 정홍교, 고장환 등을 선임하였다.
 
마침내 소년운동의 통일을 위한 조선소년연합창립대회가 열렸다.(동아일보, 1927.10.19).
▲ 조선소년연합-창립대회 마침내 소년운동의 통일을 위한 조선소년연합창립대회가 열렸다.(동아일보, 1927.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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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10월 16일과 17일에 창립대회를 한 조선소년연합회는 조선소년운동의 통일적 조직과 충실한 발전을 도모하는 조선소년운동의 최고기관으로 5개 연맹과 백여 개의 개별단체가 참여하였다. 당시 창립대회에 울산지역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언양소년소녀회가 참여하였다. 청년총동맹과 노동총동맹은 4년 전에 결성되었고 신간회, 여성 근우회, 형평사 총본부까지 결성되었지만, 소년운동 총단체의 결성은 늦은 편이었다.

당시 조선일보는 사설을 통해, 조선소년운동의 지도정신 수립을 강조하였다. 지도정신 수립에 소년의 천진성 함양에 있다는 주장이 있지만, 민족의 현실적 환경을 유념해야 한다. 단지 취미만을 목적하는 동요, 동화, 동요극 등으로 그의 일시적 흥취나 천진성 함양에만 그치게 되면 현실을 떠나거나 현실을 무시하는 소년운동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소년운동이 통합의 모습이었지만 주도권은 사회주의 계열 소년단체가 쥐고 있었다.

조선소년연합회는 창립대회에서 방정환을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정하고, 10월 17일 임시대회에서 어린이날은 메이데이와 충돌을 피하기 위해 5월 첫째 일요일로 변경하였다. 이것은 1927년 5월에 오월회의 정홍교가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평일날 행시를 하니 학생들이 동원되기 때문에 학습권 침해를 막기 위해 공휴일로 한 것이었다. 단체 가입 연령을 18세로 제한하였다.

이것은 연령을 제한 하지 않으면 무조건 회원으로 받고 공이나 치고 작난만을 위주로 하는 소년단체를 정리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간담회 회의 석상에서 어린이날 노래를 새로 제작하고, 소년잡지도 감상적인 동요소설들을 전문으로하는 출판물을 배척하고, 과학과 건전한 지도적 문학운동으로 주력하는 잡지를 후원하기로 하였다. 이는 소년운동과 같이 소년문학운동도 동심 천사주의적 경향에서 현실 계급주의 방향으로 방향전환을 도모한 것이었다.

김태오는 이날을 "조선소년운동의 역사적 회의였다"라 평가하며, "전조선해방운동이 사회주의 대 민족주의의 양립으로 필요를 느끼지 않고 단일적 운동으로 사회적 진출을 요구하게 되었다. '기분운동에서 조직운동으로', '분열에서 통일로' 그리고 전환기를 넘는 조선의 소년운동이 소수사상가의 손을 떠나 농촌에서 공장에서 가로(街路)에서 실제적으로 전개되어야 할 것이니 소년운동의 민중화가 그것이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경성의 소년운동단체의 분열에거 통합을 이루었지만, 달리 지방의 소년운동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정치적 세력의 다툼이 적었기 때문이다.

1928년 3월 22일 천도교기념관에서 350여 개 단체 대표 50여 명이 모여 조선소년운동연합회를 조선소년운동총동맹(연맹)으로 개편하였다. 이것은 자유연합제에서 중앙집권제로의 전환을 의미했다. 다음날 임시중앙집행위원회를 열어 "조선소년의 권리와 이익을 대표함. 전조선 소년대중의 확고한 조작의 완성을 기함"의 강령을 채택하였다.

이를 위해 소년기부터 과학적으로 지도하기 위해 부르주아적 교양으로부터 과학적 지식을 보급하기로 하고 무산소년교양주력을 위한 강습소, 야학, 도서관, 기관지 발행, 강연회, 강좌회, 동요회, 토론회, 조기회, 운동회 등을 설치 개최하기로 하였다. 총동맹은 도연맹-군(郡)부(府)동맹-면동맹지부-동리반으로 조직하고 가입 연령은 12세에서 18세까지로 하였다.

소년운동에서 중요한 것은 소년운동의 주체인 천진한 아동들은 잘 지도할 지도자가 중요하다. 지도자는 아동이 이해할 수 없는 운동은 아동이 할 수 없는 것이니 아동본위적 관점에서 해야 할 것이라고 동아일보 사설에서 지적하였다. 그런데 1928년 3월 천도교소년회는 천도교소년연합회로 조직개편을 단행했고, 방정환이 대표위원을 맡았다. 이는 천도교 소년운동 노선의 일대 방향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민족운동의 일환으로서의 소년운동을 연대와 합작의 노선이 아니라 천도교청년당과 마찬가지로 독자적으로 추진하겠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사회주의 경향을 띤 소년연맹이 결성되어 나갔다.(밀양 영남루, 1928.7.8.), 이건욱 제공.
▲ 경남도 소년연맹설립대회 기념사진 -사회주의 경향을 띤 소년연맹이 결성되어 나갔다.(밀양 영남루, 1928.7.8.), 이건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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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5월 제6회 어린이날 행사는 조선소년운동총동맹이 주관하여 전국 50여만명의 어린이가 참여하여 선전지를 돌리고 어린이날 노래를 부르며 기행렬을 하였다. 1928년 5월 언양청년동맹이 결성되었다. 1928년 7월 8일 밀양청년회관에서 조선소년총연맹 경남도연맹설립대회가 열렸다. 이때 언양의 김흥수가 중앙집행위원이 되고, 김영조가 중앙검사위원이 되었다. 다시 언양소년단 간부였던 이동개가 참석한 사진이 남아있다. 언양의 소년단체들도 사회주의적 경향이 주도적이었다.

일제 경찰은 다른 지역의 도연맹 결성에 탄압하였다. 또 군, 면 단위 조직이 전국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런데 총동맹의 좌경화 경향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자 민족주의와 순수소년단체들은 통합에 불응하였다. 특히 소년단체의 전국적 조직망을 가진 천도교, 기독교, 불교 등의 종교소년단체는 본래의 소년운동을 지향하였다. 결국 총연맹의 조직화는 실패하였다. 지역마다 정치적 노선이 각기 달랐다. 결국 조선소년운동총동맹은 결성된지 1년도 되지 않아 분열로 지도력을 상실하였다.

*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부산・울산・양산 삼산지역의 역사 문화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저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 오마이뉴스에 <의열단원 박재혁과 그의 친구들>을 연재하였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이병길씨는 작가, 지역사연구가, 울산민예총 감사입니다. 이 기사는 <울산저널>에도 게재합니다.


태그:#언양소년운동사, #울산 소년운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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