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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어린이운동의 시발은 인간해방을 추구하는 천도교였다. 천도교에서 시작한 어린이운동은 어린이를 인간으로 존중하는 인간해방운동에서 민족해방을 위한 주춧돌을 놓았다. 어린이(소년)운동은 전근대적인 상하수직적 인간관계에서 수평적인 인간관계로의 전환을 추구한 운동이었다. 인간존중의 운동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민족적 현실은 일제 식민지였다.

어린이의 동심을 강조하고 천진난만함에 민족적 현실을 가르칠 것인가, 말 것인가는 소년운동에서 중요한 기준이었다. 이 때문에 소년운동은 갈림길에 있었다. 1923년 소파 방정환은 천도교소년회를 중심으로 소년운동협의회를 결성하여 민족주의 경향의 소년운동을 시작하였다. 또 전홍교는 사회주의 경향의 반도소년회(오월회)를 결성하였다. 이후 두 운동세력은 대립과 갈등 속에 통합운동을 하며 소년운동은 발전하여갔다. 지방 역시 중앙의 영향을 받았다.

식민지 조선은 민족주의 경향에서 사회주의 경향으로 나아갔고, 192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민족의 현실을 자각하는 소년운동이 본격화되고 사회주의 사상의 유입으로 계급해방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즉 어린이 운동은 인간존중, 인간해방으로 시작했지만, 점차적으로 민족해방운동으로 나아가는 소년운동이 전개되다가 1920년대 후반부터는 계급해방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소년운동도 조선소년연합회와 조선소년총동맹을 거쳐 각 지역은 소년동맹으로 재편되었다. 1928년 7월 8일 경남도소년연맹이 결성되어 언양, 울산지역도 그 영향에서 활동하였다. 특히 1929년 12월 광주학생운동의 영향 아래 항일운동이 확산되었다. 점차 소년운동도 볼세비키화되었다.

언양・울산의 소년운동은 1919년 만세운동을 계기로 청년운동가들의 지도로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애국계몽운동에서 민족주의운동, 사회주의 경향 운동, 농민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운동의 밑바탕에는 보통학교와 야학교의 교육운동이 있었다. 그 영향으로 자각하는 소년들이 성장했다. 울산 전체지역에 가장 먼저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언양지역은 천도교와 유학생 출신 등이 주축이 된 진보적인 청년들에 의해 청년운동이 일어났다. 1920년초부터 애국계몽운동의 한 방법으로 일본상품 불매운동을 통해 항일의식이 고취되었고 점차적으로 언양소년회원들의 만세문과 격문과 같은 항일운동으로 나타났다.

울산지역은 울산읍과 병영, 그리고 방어진 주변을 중심으로 청년 운동 및 소년운동이 있었다. 일제의 침탈과 가장직접적으로 마주한 방어진 일대는 항일 의식이 가장높았다. 그 결과 일산지역의 보성학원 출신이 중심이 된 청년운동과 적호소년단 운동은 가장 진보적 경향을 가지면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언양지역을 중심으로 일제식민시대의 소년운동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20년대 언양지역 소년운동은 초창기에는 천도교 계통의 청년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 언양 서쪽에 있는 상북(상남, 하북)지역은 상남면 거리를 중심으로 양정학원을 운영하면서 주학과 야학을 통해 소년 계몽운동을 실시하였다. 만세운동의 여파로 적극적 활동을 하지 못하여 포교활동과 실력 양성적 활동에 머물었다. 하지만 소년운동과 달리 청년운동은 김교경의 영향을 받아 무산계급운동으로 확대 발전하였다.

언양 남쪽에 있는 중남(삼남)과 삼동지역은 유철순과 곽해진을 주도로 청년운동, 소년운동이 전개되었다. 실력 양성의 교육운동과 함께 조기회를 통한 체육운동도 적극적으로 하였다. 하지만 이 지역의 소년이 사회의식적 운동을 하는 것에는 다소 한계가 있었다. 언양지역의 천도교는 소년운동단체를 조직하지 않음으로 다른 지역과 달리 소년운동에 주도적 역할을 하지 못했다. 오히려 1921년 이전에 설립된 울산지역의 천도교소년회가 많은 활동을 하였다. 하지만 울산과 언양의 교류는 많지 않았다.

언양지역의 소년운동은 언양공보 출신에 의해 주도적으로 진행되었다. 언양공보가 1913년 개교하자 북쪽으로는 두동・두서지역, 남으로는 중남면, 서쪽으로는 상남・하북면 지역의 학생들이 배우러 왔다. 경제적으로 다소 여유있는 집안의 아동들이었다. 1회에서 5회까지의 언양공보 출신들은 언양지역 청년운동의 중심인물이었다.

이들은 언양 안과 밖의 야학운동을 주도하였다. 언양공보 졸업생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사회운동가는 3회 졸업생 신학업(신주극)이다. 일본유학을 가서 1919년 2・8독립선언에 관련한 활동을 하고, 일제를 피해 상해임정에서 특파원으로 활동하고 신학업이 귀국한 1923년 전후로 언양사회는 변하였다. 만세운동 관련자들이 석방됨으로 청년운동을 일신하며 언양청년회를 혁신하였다. 그 중심에 신영업, 신학업 형제와 천도교인 김기오가 있었다. 조선일보 지국을 운영하며 언양사회를 변화시켜나갔다.

1920년대 초 언양지역은 천도교 청년과 만세운동 참여 청년, 언양공보(현 언양초) 출신 청년에 의해 지역 소년회들이 만들어졌다. 그들은 소년회를 통해 소년들의 계몽운동과 민족의식 고취를 통한 사회운동원으로 양성했다. 1923년 7월경 중남소년단이 만들어지고, 1923년 10월 6일 언양소년회, 1924년 4월경에는 삼동소년회가 창립되었다. 중남과 삼동면은 천도교의 영향을 받았다.

언양소년회 회원들은 대부분 언양공보 학생들로서 근대교육의 수혜를 받은 인물들이었다. 언양청년회의 지도 아래 언양소년회는 목적의식적 활동을 하였다. 가극회를 열고, 어린이날 행사를 주도적으로 하였다. 초창기 중심 인물은 신고송과 이동개였다. 신고송은 문화예술 체육활동 방면에 뛰어난 역할을 하였다면, 이동개는 민족의식 고취와 일본제품 불매운동을 통한 항일의식을 높였다. 두 사람 모두 언양읍성 영화루 근처 마을에 살았으며, 가정형편이 긍정적이지 않았다. 신고송의 영향을 받은 언양소년회원들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동요를 발표하여 1920년 아동문화 황금기에 동참하였다. 1926년 1월 결성된 언양소녀회의 이말선과 정립분은 1930년 근우회 울산지회에서 활동하여 울산여성운동을 이끄는 주축이 되었다.

1920년대 소년운동의 황금기에 언양지역의 소년운동도 황금기였다. 1920년대 소년문화운동의 황금기였을 때, 언양지역의 문화운동도 황금기였다. 색동회의 정인섭과 신고송의 <기쁨사>와 <등대사> 동인 활동이 그 견인차 역할을 하였지만, 언양소년회원들이 신문지상에 작품을 발표하였다는 것은 특별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언양의 저인섭과 신고송, 울산의 서덕출은 아동문화운동의 중심에서 활동하였다. 그들은 동심주의, 계급주의적 경향을 보여주었다.

1920년대 후반에 경성에서 사회주의 진영과 민족주의 진영간의 노선 투쟁으로 어린이(소년) 운동의 위기에 왔어도 언양지역은 분열되지 않고 통일된 소년운동을 진행하였고, 주춤하였던 외곽지역 소년단체는 혁신총회를 통해 거듭나기도 하였다. 1926년 언양소년소녀연맹을 조작하여 언양지역 일대의 소년단체를 연합하여 통일적 소년운동을 전개하려고 시도하여 소년동맹으로 조직 개편하였다.

그 시기를 전후로 혁신총회를 통해 서년단채들은 혁신을 도모하여 사회주의적 경향으로 나아갔다. 1920년대 후반 1세대 소년운동가 이동개의 영향을 받은 2세대 소년운동가 김동하와 오호근, 홍정수는 언양주재소에 독립만세 문구와 격문을 적음으로 언양사회에 항일 운동의 불을 지폈다. 소년운동 단체의 항일운동으로의 전개는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어려운 전개 양상이었다.

언양 밖의 소년운동 단체들은 야학운동과 밀접한 연계를 가지고 있었다. 하북면의 궁근정리의 강산소년회와 지내리의 헌남소년회, 중남면의 중남소년단, 두서 두동의 구량소년단, 구서소년단과 인보소년단 등이 그러했다. 언양지역의 소년운동 단체는 경성의 오월회의 영향을 받았지만, 단체들 간의 알력과 갈등은 없었다.

1920년대는 어린이 중심의 운동으로 소년운동의 황금기는 미래의 민족을 이끌 세대를 준비한 운동이었다. 그리고 1930년초 민족적 현실을 타개할 소년운동으로의 전환을 추구하였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1930년대 이후 어린이운동과 청년운동 사이에 낀 소년운동을 점차 소년없는 운동이 되어 퇴조되어, 어린이날 행사 위주로 진행되었다.

일제의 사회운동 탄압으로 언양지역의 소년운동도 1930년대 쇠퇴기에 접어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소년운동을 통해 성장한 신고송은 일본 유학을 다녀온 후 계급주의 문학운동을 선도하였다. 이동개는 양산과 울산으로 사회운동 범위를 확장하였다.

1930년 소년운동 대담에서 방정환은 "두 살부터 열너댓 살된 소년에게는 정서함양에 치중하고, 열대엿부터 십칠팔 세까지 소년에게는 지능, 이성, 지혜를 지도해야 한다"며 나이를 구분하여 어린이에게는 정서함양교육을, 소년에게는 지능적 이지적 교육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정교홍은 연령 구분도 필요하지만, 청년지도자의 의식문제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소년운동을 사회운동의 한 부분으로 보고 프롤레타리아 소년운동으로 나아가야 침체된 소년운동이 타개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소년회 운동은 청년회의 지도를 받았지만 실질적 운영은 소년회가 주최가 되어 활동하였다. 즉 가극 공연, 동화ㆍ동요ㆍ웅변대회, 체육대회 등 다양한 행사를 함에 있어서 청년회나 신문사 지국, 분국을 후원으로 하여 모든 행사를 주도적 하였다. 이것은 소년운동이 운동의 대상이 아니라, 운동의 주체로서 활동하였음을 보여준다. 직접 실행하고 경험함으로서 그들은 미래 세대로 성장하였다.

일제는 1931년 소년운동을 다음과 같이 파악했다.
 
"조선소년총동맹은 … 민주주의적 중앙집권제로서 부구단위의 동맹 조직을 채용하여 그 명칭 및 조직은 조선청년총동맹과 하등 차별이 없다. … 지방소년동맹 및 좌익 소년회는 모두 사회주의자의 지도를 받으며, 소년의 집회 강연화 등에 원고를 받아 사회주의자들이 말하는 바를 그대로 전한다. 겨우 12~3세의 소년소녀로서 민족의 억압과 사회조직의 결함을 모조리 받아들여 단결 항앶을 부르짖는 사례가 적지 않다. … 지방의 사회주의자들 중에는 농촌의 문맹퇴치를 빙자하여 혹은 사숙(私塾)을 열고 혹은 무허가로 학술강습소, 노동야학회 등을 설치하여 소년, 소년에게 보통교육을 가르치는 한편 현(現) 사회제도의 불합리를 설명하여 암암리에 민족 또는 사회혁명을 부추기는 것과 같은 행동을 부려 순진한 소년의 사상을 현혹하는 바 적지 않다."


1931년 봄 이후 각 지역의 소년운동 단체들이 해체되었다. 하지만 그 자체로 소년운동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었다. 언양소년회는 민족의식 고취 활동을 통해 항일운동으로 만세문이나 격문사건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어린이, 소년은 결코 수동적 순응적 존재라 아니라 주체적 존재로 성장해나갔다. 1920년 중반 이후 소년운동단체를 통해 성장한 새로운 세대는 청년동맹은 물론이고 30년대 이후 농민운동과 노동운동 등 여러 사회운동단체에서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 상징적 인물이 언양은 신고송과 이동개이고, 중남면에는 윤수암이다. 그들은 언양공보 출신으로 언양지역 청년운동 1세대인 신학업과 김기오의 영향을 받았다. 신학업에는 사회주의적 사상을, 김기오에게는 천도교적 사상을 체득하였다.

소년운동 1세대들은 1910년 전후로 출생하여 어린시절 1919년 독립만세운동을 목격한 세대들이다. 그들은 태어나보니 대한제국의 마지막이었거나 일제식민지 백성이 되었던 세대들이었었다. 만세운동의 결과, 일제식민통치 방식이 문화정치로 선회하면서 그 혜택을 톡톡히 본 세대이기도 하다. 그들은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의 사회운동과 소년운동, 청년운동의 융성기에 소년시절을 보냈다. 그들의 소년시절은 황금기였다.

일제의 보통교육을 통해 근대적 인간으로 훈육되었지만 지역 청년운동가들에 의해 자각적 민족의식을 가진 교양인으로 성장했다. 소년운동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함으로서 주체적 입장에서 적극성을 가지고 참여하였다. 동요와 동화, 웅변, 토론, 연극, 가극대회와 각종 체육대회 등을 통해 근대적 인간교양인으로 성장했다.

그들은 천도교의 사상이 추구하는 인간존엄성에 입각한 어린이해방운동의 수혜자들이었다. 점차 어린이해방에서 인간해방운동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시대는 일제의 식민지 조선인으로 살아야 했다. 민족의 현실은 행복한 상태가 아니라 일제의 수탈 경제로 인하여 농촌지역은 그 처참함을 생생하게 목격하면서 살고 있었다. 또한 지주와 소작인의 계급적 갈등을 또한 자신의 부모를 통해 절감했던 세대들이었다. 어린이 운동이 연령에 따른 소년운동으로 옮아가면서 천사동심주의적 문학운동에서 계급적 민족적 현실을 자각하는 사회현실운동으로 나아갔다. 소년운동도 동일한 방향으로 운동이 전개되었다. 자연스럽게 식민지 조선에 계급적 모순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회주의 사상이 확산되었고 소년운동 1세대들도 자연스럽게 사상을 수용하였다.

소년운동 1세대들은 청년운동 2세대로 성장해가면서 자연스럽게 대한제국 말기에 소년시절을 겪었던 민족주의 이념에 지배되었던 청년운동 1세대보다 더 사회주의 운동가로 성장하고 더 볼세비키화할 가능성을 지닌 세대들이었다. 이 세대들은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사회운동을 주도한 꼬마 볼세비키주의자들이었다. 1930년대는 식민지 조선 사회운동의 세대교체가 진행되었던 시대였다. 1900년대 출생의 청년1세대를 이어 190년대 출생의 소년운동 1세대들이 청년 사회운동의 중심세력으로 성장하던 시절이 1930년대였다.

어린이운동에서 시작한 소년운동은 실패한 것이 아니다. 어린이의 해방을 추구했던 천도교소년회의 기본적 노선은 정당했다. 어린이들의 천진난만함을 식민지 조선에서 잃지 않도록 하고 그들의 권익을 신장한 것은 분명 긍정적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현실은 국권이 찬탈당한 식민지였다. 따라서 민족해방운동으로 나아가는 독립운동 노선이 당연했다. 또한 민족모순의 해결과 함께 계급모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주의사상의 수용도 당연했다. 그 시대의 운동노선은 그 시대의 상황에 따른 것일 수밖에 없다. 한국독립운동이 간단없이 지속될 수 있었던 바탕에는 소년운동의 기반이 원동력이 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년없는 청년없고, 청년없는 장년이 없기 때문이다. 민족해방운동은 소년운동의 뿌리로 인해 지속성을 가질 수 있었다. 소년운동은 학생운동과 청년운동으로 이어져 민족해방과 조선독립의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언양과 울산의 소년운동도 마찬가지였다.

*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부산・울산・양산 삼산지역의 역사 문화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저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 <윤현진 평전>. 오마이뉴스에 <의열단원 박재혁과 그의 친구들>을 연재하였다

덧붙이는 글 | <울산저널>에도 게재합니다.


태그:#언양소년운동사, #울사소년운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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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울산, 양산 지역의 역사문화에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찾는 탐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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