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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법무총장 예관 신규식 선생
 임시정부 법무총장 예관 신규식 선생
ⓒ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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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에는 반혁명세력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프랑스혁명이나 러시아혁명도 그랬다. 중국혁명 역시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한번 뿌려진 혁명의 씨앗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다. 신해혁명은 원세개의 반동기를 겪으면서도 중국 인민들의 가슴속에서 토양을 넓혀갔다.

손문이 1912년 1월 1일 난징에서 중화민국이라는 혁명정부를 선포하면서 "민(民)의 공의를 취하고 중(衆)을 위해 복무한다."는 총통취임 선서문은 제국에서 민의 나라로 바뀌었음을 선언하였다. 2천 년의 군주제도가 무너지고 근대적 공화정 정부를 선택한 것이다. 

무엇보다 인민들에게 다가온 것은 손문이 발표한 혁명정책이었다. 

 1. 아편의 재배 및 흡연금지
 2. 여성의 전족금지
 3. 가혹한 형벌의 금지
 4. 인신매매ㆍ도박의 금지
 5. 천민신분의 해방.

신규식은 1912년 5월 20일(음) 박은식ㆍ이광ㆍ박찬익 등 애국지사와 민필호ㆍ임의탁 등 유학생들과 더불어 동제사(同濟社)를 창설하였다. 동제사란 '동주공제(同舟共濟)'의 줄인말로써 한인들의 친목융화와 간난상구를 내세운 친목단체를 표방한 것이지만 진정한 목표는 국권회복에 있었다. 
  
1921년 1월 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신년하례회 기념 사진. 두 번째 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예관 신규식 선생이다.
 1921년 1월 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신년하례회 기념 사진. 두 번째 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예관 신규식 선생이다.
ⓒ 오마이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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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제사는 이후 이곳으로 온 김규식ㆍ신채호ㆍ홍명희ㆍ조소앙ㆍ문일평ㆍ여운형ㆍ선우혁ㆍ정인보ㆍ신석우ㆍ신건식ㆍ조성환 등 망명인사들이 속속 참여하고 조직이 확대되어 베이징ㆍ텐진ㆍ만주 등 중국지역과 노령ㆍ미주ㆍ일본 등지에 지사를 설치하였다. 회원이 많을 때는 300여 명에 이르렀다. 

신규식은 동제사의 이사장을 맡고 박은식을 총재로 선임하였다. 국내에서 민족운동을 할 때부터 대부분이 동지간이고 상당수가 대종교 신도들로서 '국혼적' 역사관과 강한 민족주의 성향에서 뜻이 일치하였다. 

7월 4일 동제사 창립식이 거행되었다. 신규식은 진정어린 언변으로 이사장 취임사를 하여 참석자들을 감격시켰다.

동지 여러분!
오늘 꺼우리팡스끼리 모여서 이 동제사를 만들었습니다.

왜 우리는 망국민이 되었을까요?

그것은 무엇보다 사심과 파벌의식이 우리의 혈관속에서 짙게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전혀 일본이 악독해서만은 아닙니다. 조국광복을 쟁취키 위해서는 우리 내부에 작용하고 있는 사심과 파벌을 없앱시다. 남의 땅에서 온갖 수모를 겪으며 조국광복에 헌신하고 있는 우리에게 무슨 기호(畿湖)와 서북(西北)이 있겠으며 경상도와 전라도가 있겠습니까? 몬네칼로는 25만 명의 국민으로 나라를 보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갖 치욕과 수모를 받을 지라도 참고 견디며 뭉칩시다. (주석 1) 


동제사는 이후에 신규식이 중국 혁명당인들과 함께 설립한 협력단체인 중국신아동제사를 통하여 중국혁명세력의 지원을 확보하면서 외교와 교육활동을 하였다. 동제사는 1910년대 초기부터 중국 관내에서 가장 두드러진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의 전위조직이 되었다. 무엇보다 상하이를 독립운동의 전진기지로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신규식은 중국 혁명인사와 연대ㆍ결속하는 일이야말로 대단히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남의 국가에서 펼치는 독립운동이라면 두 가지 도움이 필요했다. 하나는 그 나라 인물의 도움이고, 다른 하나는 나아갈 방향, 곧 신해혁명으로 나타난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정치문화의 수용이다. 

이러한 것을 충족할 수 있는 인물이 바로 상하이와 난징을 중심으로 활약하던 혁명인사였다. 신규식이나 박은식 등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혁명인사와 연대를 형성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신규식이 앞장서서 조직한 신아동제사는 바로 그러한 활동의 결실이다. (주석 2)


동제사는 지하비밀 단체였기에 공개적인 활동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각종 자료에 따르면 여러 가지 구국활동을 전개하였음이 드러난다. 한 가지 사례이다.

동제사의 주요인사인 신규식, 박은식, 조성환 등은 북미합중국과 미국령 하와이 지방에서 보내주는 『신한민보』, 『국민보』 등을 받아서 안동현으로 보내면 안동현의 박광(朴洸), 백세빈(白世彬) 등에 의해 국내로 배포되었다는 기록은 각 지역에 세워진 동제사의 지사를 활용하여 해외에서 발행된 신문을 국내로 전하려는 일환으로 취해진 배포방법임에 틀림없다.

이렇게 전해진 신문은 국내에 은닉된 조직망을 통해 뜻 있는 애국지사는 물론 일반 민중에게도 정확한 정보전달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주석 3)


신규식은 협력단체인 신아동제사를 통한 중국혁명세력의 지원을 확보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모태역할을 하면서 1922년 순국 후 박찬익이 이사장을 맡을 때까지 동제사를 이끌었다.


주석
1> 이이화, 앞의 책, 247쪽.
2> 김희곤, 『임시정부 시기의 대한민국연구』, 22쪽, 지식산업사, 2015.
3> 강영심, 앞의 책, 73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독립운동의 선구 예관 신규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신규식, #신규식평전, #예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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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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