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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에서 열린 이승만 대통령(목에 꽃다발을 건 이) 환영식(앞열 왼쪽부터 손정도, 이동녕, 이시영, 이동휘, 이승만, 안창호, 박은식, 신규식, 미상. 1920. 12. 28.)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에서 열린 이승만 대통령(목에 꽃다발을 건 이) 환영식(앞열 왼쪽부터 손정도, 이동녕, 이시영, 이동휘, 이승만, 안창호, 박은식, 신규식, 미상. 1920. 12. 28.)
ⓒ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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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식과 동제사 간부들은 1913년 12월 상하이 명덕리에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하였다. 독립운동의 기반확대와 조직력 강화를 위해서이다. 유럽이나 미주로 유학을 떠나고자 하는 한국 학생들과 국권회복을 위해 상하이로 온 청년들을 모아 우선 중국어와 영어 등 외국어를 가르치고 민족교육과 나아가서 군사교련을 시킬 목적이었다.

박달학원은 영어반과 중국어반으로 구분하여 어학을 가르치고 교과목으로 영어ㆍ중국어ㆍ수학 그리고 민족의식을 함양하고자 역사ㆍ지리를 교육하였다. 교육기간은 1년 6개월 과정이었으며, 3기생을 배출하였다. 모두 100여 명의 청년들이 박달학원에서 학업을 이수한 것이다. 

교수진은 신규식을 비롯하여 박은식ㆍ신채호ㆍ김규식ㆍ조소앙ㆍ홍명희ㆍ조성환 등 쟁쟁한 민족주의 지식인들이고, 중국인 혁명가 농죽(農竹)과 미국인 화교 마오다웨이(毛大衡) 등이 외국어를 담당하였다. 해외 유학생들은 여기서 민족교육을 받고 미주로 떠나고, 독립운동에 정진하고자 하는 청년들은 동제사의 주선으로 중국 관내의 각 군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교육을 받았다. 신규식은 뒷날 독립운동에 큰 역할을 한 이범석을 중국 육군사관학교 운남강무당에 김홍일을 귀주강무당에 보내어 훈련을 받게 하였다. 

동제사와 박달학원 수료자들은 얼마 후 신한혁명당의 모태 역할을 한 것은 물론 1919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민주공화정체의 정부를 수립하게 되는 인적구성에서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상하이의 지역적 특성으로 인하여 외교중심 방략을 추구하였으며, 상하이 거주 한인사회의 규모가 열악하여 독자적인 독립군의 편성은 어려웠으나 애국청년들을 중국군관학교에 입학시키면서 후일 독립군 양성의 기초를 만들었다.

1913년 12월에 상해에서 예관을 만났던 이광수의 회고에 "예관은 우리가 있던 집보다 더 큰 집을 얻어 7~8명의 학생을 유숙시켰으며…신채호, 김규식 씨도 예관 댁에 기거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이때 예관은 상해 뿐 아니라 강남일대 조선인 망명객의 본거지였다"고 술회한 점으로 미루어 예관 주변에 청년학도들이 모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주석 4)

신규식은 상하이에서 동제사를 창설하고 박달학원을 세우는 등 분주한 가운데서도 대종교 활동을 활발히 수행하였다. 신앙심과 함께 단군이라는 구심점을 통해 정신적으로 일체감을 갖고 독립운동가들의 결속을 다지고자 해서였다. 

상하이에 오신 후 선생께서는 우선 대종교를 포교하셨고 매주 반드시 교우들과 함께 예배를 올렸다. 당시 이 대종교를 이끈 분은 선생을 제외하고 조완구, 김백연, 백순, 박찬익, 정신 등이었고, 매년 3월 15일 어천절과 10월 3일 개천절 및 8월 29일 국치기념일에는 선생께서 반드시 상하이에 있는 모든 한국 교포를 모아 성대한 기념회를 열어 침통한 기념을 하셨다. 후에 중국 동삼성 당국이 대종교의 시교당(施敎堂)을 폐쇄한 사건이 일어났으나, 선생과 박찬익 선생께서 중국 당국에 강력히 항의하고 옳은 바를 주장하여 한국교포를 옹호하셨으므로 자체는 다치지 않고 무사히 끝났다. (주석 5) 

현대인들은 이해가 쉽지 않겠지만, 독립운동가들의 공통점의 하나는 가사불고(家事不顧)의 자세였다. 독립운동에 매진하기 위해서는 가정사를 돌보기가 쉽지 않았다. 물론 가족이 함께 망명하거나 현지에서 혼인을 하여 가정을 이룬 경우도 없지 않았으나 대부분은 단신 또는 독신이었다.

신규식은 부인이 임신 중에 망명하여 두고 온 아내가 늘 걱정이었다. 동제사와 박달학원 일에 분망할 즈음 동생 신전식이 상하이로 망명해왔고, 아내가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유복자처럼 태어난 아들 이름을 상호(尙浩)라 지었다.

그의 활동범위는 대단히 넓고 다양했다. 중국 혁명 문학인들이 조직한 남사(南社)에 가입ㆍ활동하였다. 1909년 11월 청나라 정부에 반대하는 기치 아래 창립되어 신해혁명을 지지하는 진보적인 단체였다. 자격요건이 품행과 문학의 두 가지가 뛰어나고 사원 세 사람의 소개로 가입이 허용되었다. 

예관이 남사에 가입한 시기는 그가 가입한 순번이 450번째로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1914년이거나 아니면 이보다 조금 빠른 1913년 말이 아닌가 보여 진다. 그리고 실제 처음으로 아집(雅集)에 직접 참석한 것은 1914년 8월의 임시 아집때부터였다. 그가 처음 아집에 참석하였을 때 그에 관한 간단한 소개를 해 놓았는데 "이름은 정(檉), 자는 산로(汕盧), 요녕인으로 원적은 조선이다. 삼한이 망국하게 된 비참함을 통분하고 집을 떠나 서쪽(중국)으로 와 독립운동에 진력을 다하였다."라 하였다. 그 후 그는 몇 차례 아집에 참석하여 남사 사원들과 폭 넓은 교유를 하고 있었다. (주석 6)


신규식의 이와 같은 중국 엘리트층과의 다양하고 다채로운 교유와 참여는 향후 상하이를 독립운동의 기지로 만들고 활동하는 데 기반이 되었다. 


주석
4> 강영심, 앞의 책, 76쪽.
5> 민필호, 앞의 책, 319쪽.
6> 신승하, 앞의 책, 612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독립운동의 선구 예관 신규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신규식, #신규식평전, #예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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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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