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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를 받아 쥔 것은 책 두 권 분량의 원고를 마쳤을 때였다. 두 권의 책을 쓰기 위해서 1년 남짓 동안 몇 백 만원 어치의 책을 사서 읽었고 썼다. 두 권 모두 책에 관한 책이었다. 책이라면 신물이 나서 당분간은 잊고 살아야겠다고 작정했었다.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가 출간되었다는 것을 '난데없이' 알게 되었는데 매력적인 표지며, 기발한 제목에 이끌려 읽지 않을 수 없었다.
 
표지 사진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표지
▲ 표지 사진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표지
ⓒ 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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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정도만이라도 책을 잊고 살겠다는 결심을 한 지 며칠 만에 이 책을 금주에 받지 못하고 다음 주에 받게 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나를 발견하였다(온라인 서점에는 출간일이 3월 5일로 되어 있지만, 주문은 가능했다).

주요 일간지 신춘문예 소설 부분에 당선된 실력을 갖추고도 십수 년 동안 남의 글만 만지는 편집자로 살아온 저자의 첫 책이라니. 직장 상사와 박 터지게 싸우고 직장을 그만둔 후에 시작한 생존으로서의 도스토옙스키 읽기라니. 독서 에세이를 드라마보다 더 좋아하는 나로서는 도저히 피해갈 수 없는 유혹이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꿈꾸고 겪을 만한 '홧김에 퇴사'를 하는 이야기로 시작했다가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막내아들 알렉세이를 소환하는 장면부터 뭔가 심상찮기는 했다. 평소에 붙어 다니는 절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다른 사람의 말을 단지 듣기만 하고 자기만의 기준으로 재단하지도 평가하지도 않는 '그녀'를 알렉세이에 비유하는 장면에서 적지 않은 신선함을 느꼈다.
<까라모조프씨네 형제들> 인물관계도 <까라모조프씨네 형제들> 인물관계도
▲ <까라모조프씨네 형제들> 인물관계도 <까라모조프씨네 형제들> 인물관계도
ⓒ 고유리, 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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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번호와 통화 버튼을 누르자 곧 나는 수화기 너머로 19세기 제정러시아 시대에 살았던 알렉세이를 21세기 서울 서대문구로 불러낼 수 있었다. "너무 잘했어요. 재희 씨가 못 해 먹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거긴 정말 그런 데일 뿐이죠. 유능함을 발휘하기엔 그곳은 너무 수준이 낮다는 말이에요."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는 시종일관 제정러시아 시대에 쓰인 소설 속 등장인물을 21세기 일상생활로 불러들인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마치 도스토옙스키가 현대를 살아가는 드라마 작가로 착각이 되고 그의 소설들은 아침 일일 막장 드라마로 느껴진다.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를 독서에세이의 범주에 넣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매 꼭지가 서사가 뛰어난 단편 소설로 읽히기 때문이다.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일러스트 내지 삽화
▲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일러스트 내지 삽화
ⓒ 고유리, 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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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제희 작가가 도스토옙스키를 가장 심오하게 연구한 독자라고는 못하겠지만 가장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등장인물 각자를 살펴본 독자라고 말할 수는 있겠다. 나라면 이 문장을 바꾸어 쓰고 싶다는 충동이 생기는 구절도 보이지 않는다. 도제희 작가는 도스토옙스키를 읽고 격려와 위로를 얻었겠지만 우리는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를 읽고 격려와 위로를 얻을 수 있다. 가령 이런 문장들.
 
어제도, 오늘도 많은 세입자가 부당한 상황에 직면하거나, 초라한 공간에서 남루한 감정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고시원에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닭장 같은 원룸에서 힘든 하루의 피로를 풀고, 지하의 습한 공기를 견디고, 옥탑방의 더위와 추위를 견디면서 불안한 앞날 걱정에 시름에 빠져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말하고 싶다.
 "그 방은 당신의 노동의 대가로 얻은 당신만의 방입니다"
 
또 아무도 갑의 폭력적인 월권에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할 때 홀연히 주인의 모욕에 항의하는 <스쩨빤치코보 마을 사람들>의 노예 가브릴라 이야기를 들려주며 던지는 도제희 작가의 충고는 또 어떤가.
 
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성실하게 하며 제 한 몸을 건사하는 사람들, 비록 자신의 고용인이라고 모욕을 준다면 참지 않는 사람들, 여행도 의식주도 학업도 필요 이상의 소비 대상으로 전락해 박탈감을 안겨 주는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만큼 우아한 이들이 있을까.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는 재미있지만 한숨에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면접 자리에서 결혼이나 출산을 할 계획이 있다면 입사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언질을 감수하고 취업을 했었던 '을'로 살아온 저자의 경험에서 나온 통찰력에 감탄과 공감을 하느라 되새김질을 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내지 삽화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내지 삽화
ⓒ 고유리, 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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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해서 삶의 주도권까지 내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직장에서 누군가 나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해서 내 삶까지 좌우하려 할 때, 즉 내 사람의 주도권이 본인에게 있는 양 굴려 할 때 거절할 만한 지혜와 배짱은 필요하다. 그러자면 우선, 내 인생의 모든 행운과 불운을 스스로 만들어 가고 감당하겠다는 주인 의식이 가장 필요하지 않을까. 물론 나는 아직 멀었단 걸 알았다. <노름꾼>의 가정교사의 대처에 정말 놀랐으니 말이다.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는 곁에 두고 늘 친구처럼 지내고 싶은 책이다. 모두에게 형제처럼 느껴져서 위로를 구할 때 찾고 싶은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막내 아들 알렉세이 같은 책이다.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도제희 (지은이), 샘터사(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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