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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삶과 죽음은 보통 사람들의 삶이나 죽음과 아주 달랐다. 그의 인생사뿐만 아니라 그가 그린 많은 그림들도 회화 역사상의 많은 그림들과 달랐다. 그래서인가 그 자신도, 그가 그린 그림도, 그가 생존 시에는 거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했다.

그가 살아있을 때 그림을 한 점만 팔았다는 말이 거의 정설처럼 될 정도로 비평가, 대부분의 화가들, 그리고 대중들 모두 고흐에게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가족은 물론 주변 사람들과 끊임없이 충돌하며 독설을 퍼붓고, 허름하고 지저분한 외모뿐만 아니라 발작과 이상행동 때문에 병원을 들락거렸던 그와 그의 작품 모두 비난과 무시의 대상이었다.

고흐는 37년의 인생을 살았고, 10년간 화가로 불꽃처럼 예술적 열정을 소진시켰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 10년간 고흐는 소묘, 데생, 판화를 포함하면 약 1000점 이상의 작품을 남겼다. 그리고 동생 테오와 가족, 친구들과 나눈 편지 700여 통에 자신이 느꼈던 고뇌, 고독, 열정, 자괴감 같은 지극히 사적인 감정을 솔직하고 담백한 필체에 담아 남겼다.

고흐 사후 10년도 안되어 강렬하게 쏟아지기 시작했던 그와 그의 작품에 대한 관심과 열광은 생전에 그가 받았던 철저한 무관심과 대비되어, 극단적인 비극을 요란한 영웅서사로 급격히 변환시켰고 포장시켰다. 고흐는 말했다. "나는 나의 그림과 같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철저한 무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많은 화가들이 절망감에 죽거나 미치거나 혹은 작품 생산을 하지 못하고 무기력해지는 것은 아무도 그들을 인간적으로 사랑해주기 않기 때문이다."
 
열정 깃든 해바라기 그림으로 세상을 바꾸다
 
1924년 1월 24일 고흐의 제수인 요하나 봉어르는 <해바라기 열다섯 송이>를 팔라는 밀뱅크 내셔널갤러리(현재 영국 국립미술관)제안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쓴다.

"이틀 동안 당신의 요청에 대해 마음을 단단히 먹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제가 이 그림과 헤어진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로 느껴집니다.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매일 보아온 그림이니까요. 하지만 결국 당신의 요청을 거부하기 힘들 것 같네요. 당신 미술관에서 해바라기보다 더 따뜻하게 빈센트를 대변할 그림이 없다는 사실을, '해바라기 화가'가 자신의 작품이 그곳에 걸리는 것을 바랄 것임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이는 빈센트의 영광을 위한 희생입니다."(마틴 베일리, <반 고흐의 태양, 해바라기>, 207에서 재인용)

요하나가 지칭한 '해바라기 화가'라는 호칭은 고흐를 지칭하는 일반명사처럼 사용되기도 한다.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은 독특하며, 이제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해바라기 열다섯 송이」 1888년  영국 국립미술관
▲ 「해바라기 열다섯 송이」 1888년  영국 국립미술관
ⓒ 영국 국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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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은 연작이며, 가장 유명한 그림은 「해바라기 열네 송이」와 「해바라기 열다섯 송이」이다. 해바라기 연작은 세 송이, 여섯 송이, 열네 송이, 열다섯 송이인 원작이 있다. 원작은 고흐가 해바라기를 직접 보고 그린 것이다. 그리고 카피가 세 점 존재하는데, 이는 원작을 보고 다시 그린 그림이다. 카피는 서명이 있는 카피 2점과 서명이 없는 카피 1점이 있다.
 
「해바라기 열네 송이」1888년 뮌헨 노이에피나코테크
▲ 「해바라기 열네 송이」1888년 뮌헨 노이에피나코테크
ⓒ 뮌헨 노이에피나코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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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는 해바라기 그림 연작을 불과 일주일 만에 혼신의 힘을 쏟아 부어 그렸다. 해바라기 그림 연작은 고흐의 강한 집중력과 열정, 그리고 의지가 만들어 낸 결과이다.

"그는 자신이 말하는 방식으로 그렸다. 밀치고 쳐내고 공격하다가 물러났다. 붓 세례는 여름의 폭풍우처럼 캔버스를 거듭 휩쓸었다. 불꽃놀이처럼 집중적으로 물감을 몰아치고 나면, 생각에 잠긴 신중한 재평가가 뒤따랐다."(스티븐 네이페 외, <화가 반 고흐 이전의 판 호흐>, 680)
 
고흐는 "신속한 작업의 결과가 더 좋다"고 했으며, "그림을 그린다는 건 언제나 무모한 돌진"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매일 아침 해 뜰 때부터 해바라기 그림에 매달려 있어. 꽃이 아주 빨리 시들거든. 그래서 한번 달려들었을 때 끝내야 한다."(이상 스티븐 네이페 외, 681-82에서 재인용)고 편지에 썼다.

고흐의 <해바라기 열다섯 송이>에는 이렇듯 신속하고 거칠며 열정적인 고흐의 붓질이 그의 숨결과 함께 깊이 새겨져 생생하게 살아난다. 노란색의 혼합에 의한 조화는 따뜻하지만 한편 지극히 강렬하다. 그의 노란색은 진동하듯 튀어나왔다 물러서며 감상자의 눈을 끌어 당긴다. 초록색 가지와 잎은 그 노란 빛의 황홀한 파도와 흔들림과 조화를 이루며 쓰러질듯 불안정한 꽃송이를 떠받치고 잡아준다.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은 터져 나올 것 같은 노란 색의 강렬하고 생생한 생명력으로 충만하다. 그러나 곧 시들어 씨앗으로 바뀌어 산산이 떨어져 땅으로 돌아갈 소멸과 소생의 그림자도 공존한다. 초록 잎에서 노란 꽃이 나오고, 만개하여 노란 꽃잎이 비틀려 떨어지고 마침내 씨앗이 꽃이 되는 시간의 흐름이 해바라기 그림 안에서 공존한다.

고흐의 삶이 주는 인상은 너무 강렬하였다. 그의 그림에 대한 인상도 강력하고 묵직하다. 그의 그림은 깊고 복잡한 사색을 위한 관조와는 다른, 강렬한 직관과 자유로운 상상력이 충격적으로 노출되는, 풍요로운 색채의 시각적 조합을 감상하고 경험하도록 이끈다.  
 
해바라기 열다섯 송이(서명 없는 카피)」 도쿄 도고세이지기념손보재팬미술관
▲ 해바라기 열다섯 송이(서명 없는 카피)」 도쿄 도고세이지기념손보재팬미술관
ⓒ 도쿄 도고세이지기념손보재팬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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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사후에 가장 이르게 판매된 그림들은 해바라기 그림이었다. 1987년 3월 30일 런던의 크리스티 경매에 고흐의 <해바라기 열다섯 송이>의 카피가 출품되었다. 경매 호가가 시작된 지 5분도 지나지 않아 2508만7500파운드(3992만1750달러)라는 거액에 낙찰된다. 고흐의 편지에서 언급된 바가 없고, 그 외에 기록이 없는 이 그림에 대해 위작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었지만, 이 그림이 시장에 나온다면 당시 낙찰 가격의 몇 배 이상이 될 것이라 추정된다.

"천재성의 조건은 언제, 어디서나 같음보다 다름에 있다"(이광래, <미술철학사1>145)고 했다. 이것이 고흐를 특정하여 말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동일과 동질은 본래 권력 지향적 잠재력과 환원주의적 권력 의지를 지니게 마련이다. 그 때문에 동일은 차이와 자연히 거리 두기나 낯설게 하기를 하려 한다. 즉 같음은 다름과의 차별을 위한 것이다"(같은 책, 146)라고 설명하고 있는 바, 이는 당시 인상파 화가들이 미술계에서 받았던 냉대와 조롱의 이유, 더불어 고흐가 받았던 철저한 무관심에 대한 이유를 추정하게 한다.

고흐의 회화들은 이전의 어떤 회화 전통과도 유사하지 않은 독특한 것들이었다. 소재와 기법, 구성, 색채에서 모두 독특하였다. 특히 그의 해바라기 그림들은 그 이전에 유래를 찾기 어려운 고흐 자신만의 독창적 작품이었다.

고갱도 해바라기를 따라 그리다
 
'타히티의 화가' 고갱과의 관계에서 해바라기 그림은 상징적인 연결고리이다. 고갱이 파리의 샬레 식당의 비공식 전시회에서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 2점과 자신의 그림을 교환하면서 두 사람은 서로 알게 되었다.

고흐가 아를의 노란 집을 남부 지방의 공동 아틀리에로 쓰고자 하여 고갱을 초대한다. 1888년 7월 고갱은 고흐의 초대를 받아들이지만, 행동에 옮기지는 않는다. 고흐의 동생이자 그의 그림을 팔아주는 화상인 테오의 압력 때문에 고흐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지만, 망설였던 것이 분명하다.

8월 21일 즈음 고갱에게서 '남쪽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노란 집을 장식할 해바라기 연작을 고흐가 그리기 시작한다. 고흐는 고갱과의 협업을 엄청나게 기대했다. 그가 오는 것에 대비해 실내 장식과 가구에 큰돈을 들였다. 그리고 그의 침실을 청록색 배경의 <해바라기 열네 송이>와 노란색 배경의 <해바라기 열다섯 송이>로 장식하려 하였다.

1888년 10월 23일 새벽 이전에 고갱이 아를에 도착한다. 당시 고갱은 마흔 살 즈음이었고, 고흐는 그보다 다섯 살 어렸다. 고갱과 고흐의 잦은 다툼은 1888년 12월 23일 일요일에 파국을 맞는다. 고갱이 화를 내며 나갔고, 밤새 노란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고흐는 면도칼로 자신의 귓불을 잘라내고, 이를 유곽의 여성에게 전해주는 이상 행동을 한다.

건강을 어느 정도 회복한 고흐는 1889년 1월에 고갱이 편지에서 요청한 해바라기 그림의 카피를 그릴 것을 결심한다. 고갱은 편지에서 "자네의 노란색 배경의 해바라기는 내가 '반 고흐 스타일'의 본질이 무엇인지, 완벽한 한 예로 간주한다"(마틴 베일리 110쪽에서 재인용)고 썼고, 이런 언급에 대해 고흐는 어느 정도 마음을 풀고 카피를 그리려 결정한다. 그래서 고갱이 원하는 바대로 <해바라기 열네 송이>와 <해바라기 열다섯 송이>의 카피를 그린다.
 
폴 고갱 「해바라기와 바다 풍경」 1901년 취리히 뷔를 컬렉션
▲ 폴 고갱 「해바라기와 바다 풍경」 1901년 취리히 뷔를 컬렉션
ⓒ 취리히 뷔를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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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중반 고갱도 해바라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1899년 말 그의 작품을 팔았던 화상 볼라르로부터 꽃 그림을 그리면 팔아주겠다는 편지를 받았고, 고갱은 무시하는 듯 했으나 돈이 필요해지자 해바라기 정물화를 그렸다. 처음으로 그린 것이 <해바라기와 바다 풍경>이다. 팔걸이의자 위에 놓인 바구니에 해바라기 10송이가 꽂혀 있다. 의자 모퉁이 뒤편의 장면은 액자 속의 타히티 풍경처럼 보이기도 하고 창밖의 풍경처럼 보이기도 한다.

고갱은 이어 3개의 해바라기 정물화를 더 그린다. 의자 위에 해바라기를 올려놓고 그린 부분은 고갱이 노란 집에 기거할 때 해바라기를 그리는 고흐를 그렸던 <해바라기 화가>를 연상하게 하며 아울러 고흐가 그린 두 점의 의자 정물화와 연결되기도 한다. 고갱의 해바라기 정물화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석이 있다.
 
폴 고갱 「해바라기 화가」 1888년  반고흐미술관
▲ 폴 고갱 「해바라기 화가」 1888년  반고흐미술관
ⓒ 반고흐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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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이 그의 해바라기와 반 고흐의 해바라기를 연결지었던 것은 분명하나 그 의미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떠난 친구에 대한 뒤늦은 헌사였을까, 명성을 얻은 화가의 인맥을 활용해 자신의 이름을 높이고자 했던 것일까? 아니면 반 고흐의 모티프를 도용해 자신의 것으로 취함으로써 반 고흐의 자리를 빼앗고자 했던 것일까? 여전히 고갱은 자신의 작품을 모호함으로 휘감고 있다."(마틴 베일리, 167)

덧붙이는 글 | 고흐보다 더 먼저 관심을 갖고 보았던 화가가 고갱이었습니다. 어릴 때, [달과 6펜스]라는 책을 보았고, 그 여파에 따른 호감이 이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고흐에 대해 알면 알수록 고갱에 대한 호감이 줄어들기도 합니다. 물론 두 사람 사이의 일은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다만, 그 결과 한 사람은 이른 죽음으로 이어지는 곤경에 빠졌기에 그런 것인지도 모릅니다. 고흐와 고갱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만들고 싶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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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박사 학위 받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 문학, 미술, 영화, 미학, 철학, 사회학에 관심이 있고, 이들을 용해, 융합하여 사색한 결과를 글로 만드는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서양회화 분야에 집중하여 공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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