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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Paul Gauguin)의 화법을 설명하기 위해서 평자들은 후기 인상주의, 종합주의, 원시주의, 클루아조니슴, 상징주의와 같은 여러 양식을 동원하였다. 고갱의 그림이 다양한 회화적 양식과 관련하여 포괄적인 특징을 골고루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단순화의 오류에 불구하고, 고갱의 그림에서 전반적으로 확인되는 특징을 요약하면, 종교적인 상징을 통한 암시, 강렬한 원색 사용, 사물 또는 사람의 조합적인 병치, 형태의 변형과 극단적인 시야각도 등으로 정리할 수 있다. 고갱의 그림은 다양한 상징과 알레고리를 조합하여 배치한 경우가 많으며, 따라서 추상적인 의미들이 다의적으로 중첩되어 있다. 이는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열어 준다.

고갱이 주식중개업에 종사하다 뒤늦게 화가의 길로 들어선 과정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주식중개 일로 상당한 부를 축적한 고갱은 인상주의 화가인 피사로의 도움을 받아 주말 화가로 취미 활동을 했다. 피사로와 세잔의 작품을 사서 모으며 회화에 대한 열정을 키워오다, 당시 프랑스에 닥친 경기 침체로 주식시장이 무너지자 마침내 전업 화가의 길을 가기로 작정하였다.
 
「자화상」, 1885년, 킴벨 아트 미술관
▲ 「자화상」, 1885년, 킴벨 아트 미술관
ⓒ 킴벨 아트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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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이 이 자화상을 그렸던 시기는 전업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후였고, 당시 고갱은 덴마크의 처가에 머물고 있었다. 다소 의기소침한 표정이, 거만한 태도로 유명하며 그로 인해 연상되는 고갱의 외양과 배치되는데, 이 그림을 그린 이후 고갱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돈을 버는 일과 완전히 분리되었다.

서머싯 몸은 소설 <달과 6펜스>에서 고갱의 화가인생 역정 중에 특징적인 부분들을 사용하여 신화적인 예술가의 이야기를 만들었다. 몸은 이 소설에서 1인칭 화자의 서사 구조를 사용하여 찰스 스트릭랜드의 삶을 관찰하고 기록했다. 이 소설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1부는 스트릭랜드가 주식중개인을 그만두고, 중산층의 안정된 가정환경을 버리고 화가의 길로 들어선 후와 파리로 이주하여 일어난 일들을 묘사했다. 2부는 스트릭랜드가 죽은 후에 서술자가 타히티를 방문하여 그의 삶의 흔적을 추적하며 구성한 기록이다.

소설의 구성 기법에 기대어 보자면 극적인 사건 전개와 특징적인 결말이 필연적인데 몸의 <달과 6펜스>는 고갱의 생애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에 비해 다소 차분하고 심심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는 물론 서술자의 톤이 기억에 의존한 담담한 회고여서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고갱의 삶 자체가 계속되는 급격한 변화와 격정적인 소용돌이의 연속이어서 소설이 오히려 과소해 보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몸은 1904년 파리에서 고갱의 특이한 삶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의 생애에 대한 소설을 구상하였다. 그리고 그 후 13년 후에 몸은 타히티를 방문하여 고갱이 살았던 곳을 돌아보고 확인하였다. 그 당시 몸은 섬에 남아있던 고갱의 작품을 400프랑에 구입하였고 나중에 1만7천 달러에 판매하기도 하였다.

고갱의 인생을 꼼꼼히 보면, 그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인생사, 죽음, 결혼과 가정, 화가로써의 삶 모두 평범한 것이 없다. 고갱의 탄생은 남미와 유럽을 넘나드는 당대 유럽 세계의 지리적 확장성을 담고 있다. 그의 외가는 스페인계였고 페루에서 식민지 고위 관리를 지냈던 집안이었다. 그는 파리에서 태어났지만 페루 리마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교육은 프랑스의 가톨릭 학교에서 받았다. 선원 생활을 하며 지중해를 돌았고 해군으로 전투에 참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부유한 후견인 덕분에 주식 중개업에 종사하였다.

고갱은 보다 원초적인 혈통에서도 그 기원의 국제적 다양성을 실현하였지만, 화가가 돼서도 다양한 이주를 실행하였다. 그는 그 과정에서 경험했던 문화적 다양성을 예술적으로 충분히 발현시켰다. 고갱은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후 파리와 퐁타방, 그리고 아를, 마르티니크 제도, 그리고 타히티, 그리고 마지막 이주지인 마르케사스 섬에서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하였다.

인상파 화가의 전시회에 참여하기도 하였던 고갱은 보다 독창적인 화법을 모색하기 위해 다양한 양식의 화풍을 연습하고 조합하였다. 고갱은 자신에게 중요하거나 인상적인 기법은 모두 흡수하여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용하였다. 그의 그림에는 배경처럼 사용한 다른 화가의 그림과 참조 가능한 무수한 종교적, 예술적, 문화적 형상들이 포함되어 있다.

고갱의 타히티 그림: 원시성, 야만성, 식민주의

고갱은 산업화와 물질적 위계로 타락한 서구 문명에 환멸을 느껴 타락하지 않은 건강한 인간성과 원시적 자연을 찾아 프랑스령 식민지 타히티로 갔다. 그는 문명화된 세계의 인위적 관습에 반대되는 자유롭고 자연스런 원시성을 찾아간 것이었다. 그러나 타히티는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기 전부터 유럽에서 온 선교사와 뱃사람들과 접촉이 있었고, 따라서 유럽과 프랑스의 문화에 의해 원주민 문화는 변질되어 있었다.
 
「메라히 메투아 노 테하마나(테하마나에게는 부모가 많다)」 1893년  시카고 미술관
▲ 「메라히 메투아 노 테하마나(테하마나에게는 부모가 많다)」 1893년  시카고 미술관
ⓒ 시카고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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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의 여성은 유럽인의 옷차림을 하고 있다. 선교사들은 타히티 여성들이 나체로 있는 것을 금지하여 헐렁한 긴 치마를 입도록 만들었다. 고갱이 타히티에 오며 기대했던 자연 그대로의 원시성이나 문명화되기 이전의 타히티 전통 문화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테하마나의 머리 위쪽 벽에 있는 상형문자와 오른쪽에 있는 전통적인 형상은 사라진 폴리네시아 지역의 전통 문화에 대한 희미한 잔재로 보인다.

고갱이 타히티에서 그린 그림들을 보면, 열대 지방의 현란한 원색 물결에 먼저 감탄한다. 그리고 밝은 원색의 교묘한 배치와 조화에 빠져 든다. 그렇지만 동시에, 타히티 여성들을 묘사한 방식에 불쾌한 느낌을 갖게 된다. 거북하다고 느꼈던 이유는 단순한 부분에서 시작하지만 생각할수록 복잡해지며 그 심도는 더 깊어진다. 고갱은 검은 색 계열로 강렬하게 칠한 타히티 여성의 벗은 몸을 과도하게 부각시켰다. 나아가 식민지배자의 위치에 있는 백인 화가로서 원주민 여성들을 이용하여 예술적 독창성을 획득하고자 의도했다.
 
「마나오 투파파우(악령이 지켜보고 있다)」 1892년  올브라이트녹스 미술관
▲ 「마나오 투파파우(악령이 지켜보고 있다)」 1892년  올브라이트녹스 미술관
ⓒ 올브라이트녹스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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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오 투파파우>의 모델은 고갱이 타히티에 도착하여 동거하였던 타히티 여성 테하마나였다. 그녀의 나이는 당시 13-14살이었다. 그때는 식민지 원주민 출신의 어린 여성을 백인 남성이 성적 착취의 대상으로 삼고, 이국적 향기가 나는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재현하는 것을 그리 야만적이라고 보지 않았던 시대였다.

엎드려 누워 있는 테하마나의 눈은 옆으로 치켜뜨고 있지만 정면을 주시하고 있다. 고갱은 그녀가 어둠 속에서 공포에 떨고 있었고, 따라서 그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테하마나가 공포를 느끼고 있는 이유는 죽음의 악령 때문이다.

고갱이 밤이 늦은 시간에 집으로 돌아오니 테하마나가 어둠 속에서 옷을 벗은 채 배를 깔고 누워있었다. 그녀의 발치에는 늙은 여성이 앉아서 물끄러미 테하마나를 쳐다보고 있다. 머리까지 덮는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은 잠들지 못해 뒤척이는 타히티 원주민들에게 나타나는 죽음의 악령 투파파우(tupapau)이다.

유럽인들과 접촉하면서 타히티에는 죽음이 만연하였다. 학살과 면역력이 없는 새로운 질병에 의한 죽음이 너무 많아졌다. 타히티 원주민들은 자신들이 살아 있지만 죽은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다고 생각했고, 이러한 공포는 어둠과 유령에 대한 공포와 결합하여 죽음의 악령 투파파우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실제 테하마나의 눈앞에는 고갱이 있었을 것이다. 테하마나는 고갱을 바라보며 공포에 떨고 있다. 고갱의 눈에 공포에 떨고 있는 테하마나는 다시 성적 지배욕을 만족시키는 대상으로 치환된다. 선교사들이 입혀 놓은 옷을 벗겨 그림의 모델로 쓸 수도 있고, 성적 욕망의 해소 대상으로도 쓸 수 있는, 고갱과 테하마나는 여전히 식민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 속에 매여 있다. 고갱이 어떻게 설명해도, 그가 재현한 것은 식민 지배자의 눈으로 응시한 피식민지인의 모습이다.

고갱은 이 그림에 대해 여러 번 설명했다. 한 번은 자신의 조력자인 알프레드 몽프레에게, 그리고 아내인 메테에게, 그리고 자신이 겪은 타히티에서 있었던 일을 소설처럼 정리한 <노아 노아>에서 그 의미를 해명했다. 고갱이 이렇게 한 이유는 그림을 이해하기 쉽도록 도와주기 위해서였다. 그 의미를 이해한다면 그 가치를 높게 평가할 것이고, 따라서 더 비싸게 그림을 팔 수 있기 때문이다. 고갱은 1893년 파리에서 연 귀국 전시회에서 그림을 팔아 돈을 마련할 생각이었고, 그 중에서 이 그림에 가장 비싼 가격을 매겼다.

고갱은 이 그림과 관련된 타히티 토속 신앙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 고갱은 거의 모든 그림을 기억에 의존하여 그렸다. 풍경이나 인물을 스케치하였어도 그것을 그대로 회화 작품으로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다른 관련된 이미지나 연상되는 형상들과 함께 조합하여 그림을 완성하였다.

<마나오 투파파우>도 역시 같은 방식으로 그렸을 것이며, 유럽의 관람자들을 위해 상상력을 가미하고 다른 이미지들과 조합하여 완성하였다. 앉아 있는 투파파우의 모습은 타히티 사람들이 묘사하는 형태와 아주 달랐다고 하는데, 이는 유럽의 관람자들을 위한 변형이었다.

사이드(Edward Said)는 <오리엔탈리즘>에서 식민지배자들이 서구/비서구, 문명/야만, 남성/여성과 같은 대립적인 이분법적 정형을 구성하여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방식에 대해 논구하였다. 역사적으로 길며 복잡한 논증 과정이 있지만, 간략히 요약하면, 식민주의의 이분법적 정형들은 사실이나 실재이기보다는 지배적인 재현 방식을 참조·재참조하는 방식으로 확대 재생산된다.

그 형식은 소설, 여행기, 수필, 역사 등으로 다양하며 결국 지식 담론으로 고정되어 반복적으로 유통된다. 비서구 세계의 지식인들은 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쓴다. 그들은 식민주의 이데올로기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일조하며, 이를 '지식'으로 재판매하며 잘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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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박사 학위 받은 지 오래 되었습니다. 문학, 미술, 영화, 미학, 철학, 사회학에 관심이 있고, 이들을 용해, 융합하여 사색한 결과를 글로 만드는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서양회화 분야에 집중하여 공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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