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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획은 미국 외교정책의 변천 속에서 동아시아, 한반도문제를 이해하는 것이 핵심이다. 종래 대부분의 연구는 한반도문제를 중심으로 미국의 외교정책을 논의했다. 이 기획은 반대로 미국외교정책의 특징을 고찰하는 가운데 한반도문제를 살펴본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미국의 외교정책사는 기존 유럽나라들과는 결이 다른 정치문법을 채택해온 역사이기 때문이다.

외교정책 상의 변형과 변주, 애매모호함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흐르는 미국외교정책의 내적 핵심과 문법이 있다는 게 필자의 핵심 주장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미국과 동아시아, 미국과 한반도 관계의 역동적 변화상을 보다 잘 이해하고 들여다 볼 수 있다고 판단한다. - 기자말 

 
만주 관동군 사령부 전경 중국 창춘소재 일본 관동군 사령부 청사 모습
▲ 만주 관동군 사령부 전경 중국 창춘소재 일본 관동군 사령부 청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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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1차 대전이 발발하자 만주는 무주공산이 됐다. 일본은 이 기회를 틈타서 만주 일대를 석권했다. 일본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1차 대전 참전을 조건으로 독일이 보유했던 산동성에 대한 권익 일체의 양도를 포함한 21개조 요구안을 중국에 들이 밀었다.

산동성은 중국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또한 산동성의 황해 쪽 입구에 해당하는 청도는 청나라가 자랑하던 북양함대의 거점이었다.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패하자 독일은 1898년 교주만 사건을 일으켜 산동성을 점령했다. 이 사건 직후 '조차의 난전'이 발생했고, 그 결과 중국은 서구열강의 반식민지로 전락했다. 그만큼 산동성의 독일 할양은 중국인들에게는 치욕적 사건으로 기억됐다.

일본의 21개조 요구는 만주에서의 지배권을 확고히 함과 동시에 중국 본토에서 일본의 우월적 지위를 확립하려는 시도였다. 산동성에 대한 독일의 권익 양도를 포함해서 중국 내 철도부설권, 남만주와 내몽고 지역에서 일본의 특수한 권리 승인, 중국최대 제철소의 합작운영, 일본의 동의 없는 중국연안과 도서지역의 불할양, 중앙정부의 일본인 고문 초빙과 공동관리, 일본산 무기의 의무구입과 철도부설 등이 21개조 요구안의 핵심 내용이었다.

일본이 얼마나 치밀하게 중국 침략을 계획했냐 하는 것은 여순, 대련의 조차기한과 남만철도 및 안봉철도에 관한 일본의 소유연한을 99년으로 연장한 데서 잘 드러난다. 이렇게 될 경우, 한일월드컵이 개최되는 2002년이 돼서야 여순과 대련을 일본에게서 돌려받게 되는 것이다.

일본은 내정간섭에 관한 항목, 곧 일본인 고문 초빙, 경찰 공동운영, 무기 수입 등 희망조항으로 알려진 5호를 제외하고 21개 요구안 가운데 1호에서 4호까지의 항목을 무조건 수락하도록 중국정부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원세개를 수반으로 하는 북경정부는 1915년 5월 9일, 일본의 요구를 수락했다. 그리고 5월 25일, 21개조 요구에 관한 중일조약이 체결됐고, 6월 8일 양국의 비준서가 교환됐다.

조약체결 소식이 전해지자 중국인들은 5월 9일을 국치일로 선언함과 동시에 강력한 조약반대투쟁에 돌입했다. 이 때문에 일본은 대륙침략 계획을 당장에는 행동에 옮길 수 없었다. 기회를 엿보던 일본은 파리강화회의에 승전국 지위로 참가해서 서구열강으로부터 21개조 요구에 대한 승인을 받아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중국의 민족주의를 일깨운 5.4운동을 촉발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21개조 요구안은 중국을 일본의 보호국이나 식민지로 만들겠다는 의도 하에서 만들어진 치밀한 정치적 계획의 산물이었다. 일본은 서구 열강들조차 감히 생각하지 못했던 중국에 대한 식민 지배를 꿈꾸었던 것이다. 일본의 대륙 침략시도에 대한 미국과 영국의 반응은 엇갈렸다. 영국은 종래의 국제정치문법인 현실주의적 국가이익의 관점에서 이 사태를 바라봤다. 따라서 일본의 21개조 요구안이 영일동맹을 훼손하지 않는 것으로 판단하여 승인했다(Clyde, 1966:246).

사실, 영국은 일본이 러일전쟁에서부터 시작해서 20년 동안 동아시아에서 활개 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뒷배였다. 유럽에서 영국은 비엔나조약 체결 직후부터 비동맹 중립 원칙에 충실했다. 하지만 아시아에서는 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한 전략적 조치로 일본과의 동맹을 선택했다. 동아시아에서 영국의 목표는 오직 하나, 바로 인도의 보존과 세력균형의 유지였다.

이에 반해, 미국은 21개조 요구가 자국외교의 제1원칙인 '문호개방'을 침해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이때부터 미국은 영국에게 일본과의 동맹관계를 재고하도록 상당한 외교적 압력을 가했다. 영국은 우여곡절 끝에 워싱턴조약 직후 일본과의 동맹연장을 포기했다. 일본의 21개조 요구안 역시 미국 주도로 1922년 워싱턴 군축평화회의에서 파기됐다.

워싱턴회의는 실제로 일본의 21개조 요구안을 무력화시킨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워싱턴회의는 군축을 위한 4대국회의와 동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현안을 논의하기 위한 9대국회의 등 두 개 세션으로 개최됐다. 일본은 두 개 회의 모두 강대국 자격으로 참가했다. 9대국 회의에서 21개조 요구 문제가 논의됐다. 워싱턴 회의를 통해서 21개조 요구안은 철회됐지만, 만주에서 일본의 지위는 손상 받지 않은 채 그대로 유지됐다.

동아시아의 미래를 놓고 미국과 일본으로 하여금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한 조약이 워싱턴 회의에서 채택됐다. 그것은 1899년과 1900년에 헤이 국무장관이 선언한 미국의 문호개방정책을 9대국 사이의 국제조약으로 전환한 사건이다. 워싱턴회의를 통해서 문호개방정책은 최초의 그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형태로 성격이 완전히 바뀌었다.

9대국 조약을 채택하기 전만 하더라도 존 헤이의 문호개방선언은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 즉 일시적 타협으로 여겨졌다(Clyde, 1966:270). 헤이 장관이 강대국들에게 문호개방 각서를 회람할 당시, 문호개방에 대한 열강의 답변을 요청했을 뿐, 어느 정도 강제성을 띠며 법적 효력을 지닌 조약형식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본 및 서구 열강은 미국이 요구한 문호개방 준수를 약속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의례적이거나 도덕적 관점에서였을 뿐이다.

실제로 서구 열강과 일본은 중국 전역에서의 영향권 추구를 통해 문호개방원칙을 마음껏 침해했다. 그런데 워싱턴 회의에서는 선언이 아닌 법적 효력을 지닌 문호개방조약이 채택됐고 강대국들은 여기에 모두 서명해야 했다. 한마디로, 강대국들은 중국의 문호개방을 수호하기 위한 국제법적 준수의무를 지니게 된 것이다. 중국 역시 9대국 조약의 당사국으로 강대국 지위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됐다.

9대국 조약으로 알려진 문호개방조약 제1조는 중국의 주권과 영토적 통일성을 거듭 확인했다. 제4조는 중국에서 열강들의 영향권 확보를 불법적인 조치로 간주했다. 워싱턴 해군군축조약과 문호개방조약이 채택되자 영국은 일본과의 동맹조약을 더 이상 연장하지 않았다. 일본이 사상 최초로 천황 계승자인 히로히토를 영국에 외교사절로 파견하여 영일동맹 갱신에 전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Griswold, 1962:298).

이는 향후 영국이 미국과 공동행동을 하기로 결정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Elleman, 2015:75~76). 결국, 문호개방조약으로 행동의 제약을 가장 크게 받게 될 나라는 일본이었다. 왜냐하면, 미국과의 전쟁을 각오하지 않는 한, 일본은 더 이상 21개조 요구안과 같은 불평등, 문호폐쇄 조약을 중국에 더 이상 강요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21개 요구를 철회시킨 워싱턴조약을 회피하거나 우회할 방법을 적극 찾아 나섰다. 이러한 시도는 1914년에 충분히 예고됐다. 대표적으로 오쿠마 수상은 <신일본>이라는 잡지 기고에서, "멀지 않은 장래에 소수의 강대국만이 세계를 지배할 것이다. 일본은 지배국이 되기 위한 준비에 만전을 기울여야 한다"고 역설했다(Clyde, 1966:252~253). 이러한 노력의 결과, 법적으로는 주권을 보유했지만 일본이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하는 만주국을 수립했다. 만주국은 누가 보더라도 명백한 괴뢰국이었다.

워싱턴조약에 이어 이번에도 일본을 막아선 나라는 미국이었다. 만주국 수립을 미국은 이 지역에 대한 문호폐쇄조치로 간주했다. 일본의 조치에 격렬히 항의하면서 만주국에 대한 승인거부를 선언한 '스팀슨독트린'으로 대응했다. 스팀슨독트린은 헤이의 문호개방선언, 곧 '중국의 영토적, 행정적 실체의 보전원칙'에 위배되는 그 어떤 행위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불승인주의'의 의지 표명이었다(김기정, 2009:42). 스팀슨독트린은 일본의 만주국 수립을 승인하지 않을 것임을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미국 정부는 중국의 주권, 독립, 그리고 영토적, 행정적 보전 및 일반적으로 문호개방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중국에 대한 국제정책에 관한 것을 포함하여 미국과 미국 국민이 보유한 중국에서의 조약상 권리를 침해하는, 어떤 모든 사실상의 상태의 합법성을 인정할 수 없다. 또 중일 양국 정부 또는 그 대리자가 체결한 일체의 조약 및 협정에 대해서도 이것이 앞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으로 승인할 수 없다. 그리고 중일양국과 미국이 당사국으로 되어 있는 1928년 8월 27일 파리 조약의 약속과 의무에 위반되는 수단에 의해 성립된 일체의 상태, 조약, 협정을 승인할 의사가 없음을 통고하는 것을 일종의 의무라고 인정한다"(김용구, 2004:655).

정리하면, 일정 요건을 갖추지 못한 조약이나 사건의 국제법적인 효과를 부정하는 '불승인원칙'을 일본에 통고한 것이다. 스팀슨독트린에서 불승인여부를 판별하는 핵심기준은 '문호개방원칙'이었다. 이제 '문호개방'은 하나의 정책을 넘어서 '적과 동지'를 판단하는 대외정책 상의 외교원칙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미국 대외정책의 최소기준으로서의 '문호개방원칙'은 곧이어 대서양헌장에서뿐만 아니라 얄타협정, 봉쇄정책, 그리고 미중수교 및 최근의 북미 핵·평화협상에 이르기까지 유령과도 같이 출몰할 것이다.

일본의 팽창주의를 막아내기 위해서는 '스팀슨독트린'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폴 케네디(Kennedy, 1989:301)에 따르면, 경제 불황에도 불구하고 다카하시 휘하의 대장성은 1930년대 초 적극적으로 외자를 도입하여 군사비에 돌림으로써 1931~1932년 정부예산의 31%이던 방위예산이 1936~1937년에는 47%로 급격히 늘어났다. 그는 결국 엄청난 경제적 파급효과에 놀라 더 이상의 군비 증가를 중단하려 했다가 군국주의자들에게 암살당했고 군비 지출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갔다.

다음 해, 그러니까 1938년의 국방비는 전체 예산의 70%에 달했다. 그 결과, 군사비의 절대액수 면에서도 서구 부자나라들을 상회했다. 이처럼 1930년대 말의 일본군대는 이탈리아보다는 확실한 우위에 있었고 프랑스, 영국조차 당해내기 어려웠다.
당시 미국은 '정상적 상태로의 복귀'Return to Normalcy라는 슬로건 아래 '신고립주의'를 표방한 하딩, 쿨리지, 후버 등 공화당 출신 대통령들이 연속 집권했다. 윌슨대통령이 표방한 국제주의에서 퇴각한 이들 공화당 행정부는 중립을 외교원칙으로 채택했다. 그로 인해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무력도발을 저지할 수 있는 어떤 군사적 대응 계획도 마련하지 않았다.

여기에 더해서 미 의회는 중립법(1935년)을 제정해서 행정부의 손과 발을 묶어버렸다. 이에 일본은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군사적으로 대응할 의사도 능력도 없다고 판단했다. 1941년 불가침조약을 소련과 체결한 다음, 일본은 '대동아공영권' 구상 아래 거침없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군사적 도발행위는 만주를 넘어 아시아 전역을 지배하겠다는 시도로 읽혀졌다. 그 시발점이 바로 '중일전쟁'이었다.
 
■ 참고문헌

김기정. 2009. "미국외교의 이념적 원형과 현대적 의미." 이범준 외. 『미국외교정책: 이론과 실제』. 박영사.
김용구. 2004. 『세계외교사』. 서울대학교출판부.
Allison, G. 2017. 『예정된 전쟁』. 세종서적.
Clyde, P. H. 1966. International Rivalries in Manchuria, 1689-1922. New York: Octagon Books.
Griswold, W. A. 1962(1938). The Far Eastern Policy of the United States. New Haven and London: Yale Univ. Press.
Elleman, B. A. 2015. International Competition in China, 1889~1991: The Rise, Fall, and Restoration of the Open Door Policy.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Kennedy, P. 1989. The Rise and Fall of the Great Powers. New York: Vintage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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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대학교 국제관계학부 교수. 정치이론, 한국정치, 국제관계, 한미관계 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