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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획은 미국 외교정책의 변천 속에서 동아시아, 한반도문제를 이해하는 것이 핵심이다. 종래 대부분의 연구는 한반도문제를 중심으로 미국의 외교정책을 논의했다. 이 기획은 반대로 미국외교정책의 특징을 고찰하는 가운데 한반도문제를 살펴본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미국의 외교정책사는 기존 유럽나라들과는 결이 다른 정치문법을 채택해온 역사이기 때문이다.

외교정책 상의 변형과 변주, 애매모호함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흐르는 미국외교정책의 내적 핵심과 문법이 있다는 게 필자의 핵심 주장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미국과 동아시아, 미국과 한반도 관계의 역동적 변화상을 보다 잘 이해하고 들여다 볼 수 있다고 판단한다. - 기자말 

 
미국 제28대 대통령 우드로 윌슨 초상화 민족자결론을 주창한 윌슨 대통령
▲ 미국 제28대 대통령 우드로 윌슨 초상화 민족자결론을 주창한 윌슨 대통령
ⓒ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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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서양에서 태평양 연안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영토를 확보한 미국은 먼로독트린으로 상징되는 고립주의나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동아시아 세력균형정책만으로는 변화하는 국제정치 현실을 주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새로운 대외정책인 국제주의를 적용할 수 있는 기회가 1차 세계대전으로 찾아왔다. 이 기회를 포착한 사람이 바로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다.

1917년 1월, 윌슨은 미 의회 상하 양원 합동회의 연설에서 미국이 일련의 국제정부, 즉 영구적인 국제 연맹을 통해 '승리도 패배도 없는 평화'를 유지하는 데 일조할 수 있는 전후 질서에 대한 대담한 계획을 제시했다. 이 계획은 14개조 평화원칙으로 불렸다. 윌슨 대통령은 루스벨트의 세력균형정책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대담한 국제주의 대외정책을 천명함으로써 미국인들을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했다. 민족자결, 집단안전보장, 비밀외교의 타파, 전 세계적 차원의 문호개방, 법에 의한 지배 등 새로운 국제정치문법을 제시함으로써 윌슨의 의회 연설은 향후 미국대외정책의 주된 흐름인 국제주의의 기틀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미국의 등장으로 국제정치는 이전과는 결을 완전히 달리했다. 미국은 자국의 이미지대로 세상을 바꾸길 원했다. 윌슨의 국제주의는 군사동맹에 입각한 세력균형을 추구해온 서구 열강의 관점에서는 자신들의 국가이익을 침해하려는 시도로 여겨졌다. 미국의 관점에서 보면 유럽을 고통에 빠뜨린 원인은 세력균형이라는 국제정치 시스템이었다. 그래서 유럽 지도자들은 전 세계의 개혁을 자국의 사명으로 삼겠다는 미국의 태도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았다(Kissinger, 1994:20).

1차 대전이 막 끝난 1918년의 시점에서 승전국이든 패전국이든 할 것 없이 유럽 국가들은 윌슨의 '민족자결론'을 실현가능성이 전혀 없는 이상주의적 원칙외교의 산물로 간주했다. 하지만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론'을 주창한 이래 한 세대도 지나지 않아서 식민지가 지구상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예견한 사람이 얼마나 됐을까? 윌슨 대통령 자신마저 식민지 질서의 종식을 의심했을지 모른다.

윌슨 대통령은 세계평화를 구축함에 있어 '세력균형'이라는 유럽식 외교문법에 의존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윌슨주의는 미국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세계에 전파해야 하는 것이 미국의 의무라고 믿는 신념, 곧 미국예외주의에 기초했다(Hunt, 1987). 그러므로 윌슨주의가 출현하기 전에 이미, 미국사회는 '명백한 운명'(Manifested Destiny)으로 상징되는 예외주의적 전통을 통해서 윌슨주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세계질서의 법적, 도덕적 관점을 중시하는 한편, 다른 국가들로 하여금 미국이 신봉하는 가치를 수용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미국 외교의 이익이라고 믿는 것이 윌슨주의의 핵심이었다.

미국 국민들의 전반적 여론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1차 대전과 2차 대전 사이, 20년의 전간기 동안 집권한 공화당 행정부는 신고립주의를 제창했다. 하지만, 신고립주의의 시기야말로 미국 대외정책역사에서 막간극 또는 휴지기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중립주의로 회귀한 유럽정책과 달리 동아시아 정책에 있어서만큼은 문호개방과 일본의 영향력을 억제하는 윌슨주의를 지속했다. 윌슨 대통령에 의해 태동한 국제주의는 2차 대전 및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집권기를 거치면서 미국대외정책의 지도 원리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미국 국민들이 배척한 것은 오히려 세력균형을 추구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류의 현실주의 정책이었다.

미국이 새로운 국제정치문법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이유는 여론의 향배에 따른 선거 결과와 정당정치가 대외정책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던 미국 특유의 정치과정에 기인한 것이기도 했다(Clifford, 1994). 외국인들, 심지어 대의정치가 가장 발달한 영국인들에게조차 이 광경은 대단히 낯설고 비합리적으로 비쳐졌다. 국외자들의 시각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부분은 권력분립과 아울러 복잡한 견제와 균형의 체제, 즉 외교적 사안에 있어서 대통령의 강력한 주도권 행사에 대한 의회의 법적, 제도적 제한이었다. 그래서 삼권분립에 의거한 의회와 대통령의 독특한 정치적 역할에 착안하여 역사학자 코윈(Corwin, 1957)은 미국헌법을 '투쟁으로의 초대'라고 정의했다.

윌슨의 국제연맹 구상 역시 의회와 대통령의 격심한 갈등을 의미하는 '투쟁으로의 초대'를 피해갈 수 없었다. 미 상원은 자국 대통령이 주도해서 만든 국제연맹 가입을 거부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부정적이기보다는 긍정적인 미국 특유의 정치과정의 산물로 해석됐다.

브랜다이스 판사가 적절히 지적한 바와 같이, 의회와 대통령에게 외교적 권한을 배분한 목적은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부권력의 분배에 따른 불가피한 마찰을 통해 독재로부터 대중을 보호하는 데 있었다"(Clifford, 1994:23). 역설적이게도, 여론과 선거를 중시하는 민주적 정책결정과정 덕에 미국은 단기간에 세계적 지도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윌슨의 '민족자결론'에 대한 비판은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특히, 조지 케난의 비판이 날카로웠다. 케난에 따르면, "외국의 정치인들은 미국식 사고에 입각한 일반적인 제안이 특정한 국제적 쟁점에 관한 실행가능한 합의나 이해의 정의로는 부적절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이런 추상적 개념을 합의 기준으로 강요하는 미국 정치인들이 사실은 원칙 배후에 실질적 동기를 숨기고 있을 것이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Kennan 2012:50).

대표적 사례가 바로 1930년대, 동아시아에서의 극심한 미·일갈등과 1940년대, 태평양 전쟁 발발 원인에 대한 관점의 차이다. 현실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일본과의 정치군사적 갈등은 피할 수 있었던 것으로 간주한다.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이 현실주의적인 인식에 기초해서 동아시아를 자국의 특수이익이 걸려 있는 사활적 지역으로 간주한 일본에 대해 보다 유연하게 대처했더라면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을 예방할 수 있었고 따라서 태평양전쟁 역시 회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케난이나 에스투스(Esthus, 1967) 등 현실주의자들이 주장한대로 시어도어 루즈벨트 식의 세력균형에 입각한 동아시아 정책이 지속됐더라면 일본과의 전면적 충돌을 피할 수 있었을까? 실제 전개된 역사와 다르게 태평양 전쟁도 발발하지 않았을 것이며, 미국과 일본이 함께 주도하는 보다 평화롭고 안정된 국제질서가 동아시아에 안착할 수 있었을까? 이러한 식의 주장은 원인과 결과, 곧 인과관계를 뒤바꾼 주장이기에 동의하기 어렵다.

미국이 헤이의 문호개방정책이나 윌슨주의로 상징되는 국제주의적 대외정책을 들고 나온 사실 자체로 그때까지 국제질서를 주도한 유럽중심의 현실주의 문법이 더 이상 적절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을 반증한다. 다시 말해서, 윌슨주의가 세계대전을 야기했다기 보다 세계대전으로 인해서 윌슨주의가 나왔다고 보는 게 좀 더 합당한 설명으로 여겨진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1차 대전과 2차 대전 사이 20년의 전간기 문제의식에 기초해서 2차 대전의 원인을 주로 이상주의의 탓으로 돌린 E. H. 카(Carr, 1964)의 해석은 적실성이 떨어진다.

이미 20세기 초반에 이르자 지난 100년을 지속해온 서유럽 중심의 국제정치문법, 특히 세력균형에 입각한 현실주의는 더 이상 세상 변화에 조응할 수 없게 되었다. 레닌의 제국주의론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서구 열강은 19세기 말부터 전 세계적인 식민지 쟁탈전에 돌입했다. 경제적, 군사적 팽창에 팽창을 거듭한 결과, 서구중심적 지정학 기준에서 '극동Far Eastern'으로 명명된 한반도와 만주에까지 제국주의의 영향력이 미쳤다.

세력균형론을 그 핵심으로 하는 현실주의는 어찌 보면 고전파경제학과 이론구조가 상당히 흡사하다. 고전파경제학에 따르면 시장과 가격이 최적의 조건에서 작동하는 한 경제위기란 존재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균형자라 이름 붙여진 강대국이 파트너를 바꿔가면서 약자 연합에 힘을 실어주는 한, 곧 '다른 모든 조건이 같다면ceteris paribus' 지배적 패권국가는 등장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 현실은 어땠을까? 자본주의와 경제공황이 불가분의 관계이듯이 두 차례 세계대전의 발발, 핵무기에 억제되는 냉전 시대의 개막과 소련의 붕괴, 이에 따른 일극세력으로서의 미국의 등장 그 자체로 더 이상 국가이익과 군사력에 기반한 세력균형의 실현이라는 '현실주의' 문법이 통용되지 않는다는 역사적 사실을 일깨워 준 셈이다. 따지고 보면 2차 대전 직후, 나토(NATO)로 상징되는 대서양주의의 등장과 유럽연합의 건설이야말로 그 깨달음의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핵무기의 등장으로 전쟁이 과거와 같은 형태의 세력균형을 달성하는 유력한 대외정책 수단으로 간주될 수 없는 현실에서 '현실주의'는 이름과 달리, 더 이상 현실성이 없는 이론으로 간주해야 할지도 모른다.

미국의 대외정책은 고립주의와 문호개방정책을 공통의 자산으로,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세력균형에 근거한 현실주의와 민족자결론 및 집단안전보장을 핵심으로 하는 우드로 윌슨의 이상주의적 국제주의가 그 원형을 이루며 경쟁해온 역사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렇다면 미국대외정책의 주류를 형성한 이념은 현실주의일까 아니면 이상주의에 기반한 국제주의일까? 이 질문에 대해서 키신저는 미국 국민들은 윌슨주의 손을 들어준 것으로 평가한다.

키신저의 평가에 따르면, 윌슨 식 외교의 등장은 미국역사에서 하나의 분수령을 이루며, 국가가 나아갈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꿔버린 몇 안 되는 희귀한 사례 중 하나이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나 그의 현실주의적 아이디어가 대외정책의 주류를 형성했더라면 전쟁의 목적과 관련된 질문은 미국의 국가이익의 본질에 대한 탐구를 기초로 했을 것이다. 미국이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삼국협상 참가국들 편에 가담하지 않는다면 독일, 오스트리아, 터키가 주축인 동맹국들이 승리할 것이고, 이는 미국의 안보와 국가이익을 심각히 위협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는 주장이 루스벨트가 펼치는 미국의 참전 이유였을 것이고 그는 실제로도 그렇게 주장했다.

이런 방식으로 국가이익이 정의되었다면 미국은 영국이 유럽대륙과 관련하여 취했던 것과 비슷한 대외정책을 차츰 채택했을 것이다. 미국의 1차 대전 참전 주요 원인 역시 독일이 도덕적 원칙을 위반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지정학적인 팽창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구세계적 접근법 내지 세력균형에 근거한 현실주의 문법은 윌슨이 고취시켜 오늘에 이르기까지 내려오는 미국의 정서적 원천에 반하는 것이었다. 참전도 하기 전에 이미 윌슨은, 기존에 확립된 국제정치 원칙을 기반으로 전후질서를 수립하려는 어떤 시도도 미국은 반대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Kissinger, 1994:50~51).

"국제무대에서 미국이 수행한 핵심적인 역할은 윌슨주의의 틀 안에서 이루어졌다. 미국의 이데올로기는 어떤 의미에서 혁명적이었지만, 미국인들은 국내적으로 스스로를 '현상유지(status quo)'에 만족하는 편이라고 여겼다. 외교 정책에서 제기되는 이슈를 선악의 대결이라고 간주하는 경향을 지닌 미국인들은 대체로 타협을 거북하게 여겨왔다. 부분적이거나 확정적이지 못한 결론에 이르지 못한 결과를 불편하게 여기는 것이다. 미국은 거대한 지정학적 전환을 주도하려고 하지 않고 이를 회피함으로써, 지역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현재 상태를 방어하게 되는 경우가 잦았다. 법의 지배를 확신한 미국은 평화로운 변화가 가능하다는 신념과 거의 대부분의 중요한 역사적 변화는 폭력과 격변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역사적 사실을 조화시키는데 어려움을 겪었다"(Kissinger, 1994:54~55).

국제질서에 지각변동을 일으킨 윌슨의 민족자결론은 식민지 한반도의 가슴에도 독립의 불씨를 댕겼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김규식이 대표로 파견됐다. 일본경찰과 일본헌병의 폭압을 뚫고 3.1 만세운동이 한반도를 넘어 만주와 일본, 연해주 등 동아시아 전체에서 폭발했다.

3.1운동은 해당 지역 거주민들의 자발적 의사에 반해 자행된 영토합병은 불법적임과 동시에 원천적 무효임을 선언한 윌슨의 '민족자결론'에 크게 영향 받은 것임에 분명하다. 최남선이 작성했다고 알려진 <3.1독립선언문> 역시 '승자없는 전쟁, 패자없는 평화'로 요약할 수 있는 '윌슨주의'를 풀어쓴 것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3.1운동의 영향으로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됐다. 상해임시정부는 '임시정부 헌장 제1조'에 '민주공화정'을 식민지에서 해방된 미래 독립국가의 정체로 아로새겼다.

자주독립을 향한 조선민중의 봉기는 운동의 규모는 물론, 그 정치적 의미에 있어서도 세계사적으로 유래를 찾기 힘들다. 5.4운동으로 대표되는 중국의 민족주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3.1운동은 레닌이 영도하던 볼셰비키 정부조차 조선의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는 계기로 작용했다. 미국에서도 3.1운동은 유력 언론에 지속적으로 소개되면서 여론의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3.1운동은 강대국 세력균형과 식민지 질서로 상징되는 국제관계 현실에는 의미있는 변화를 발생시키지 못했다. 미국 정부는 조선의 독립운동에 도움을 줄 만한 별도의 한반도정책을 수립하지 않았다. 루스벨트의 한반도 덤핑정책 이래, 중국을 중시하는 동아시아 정책과 한반도문제의 분리라는 기존의 디커플링 정책을 고수한 것이다.

미국은 '민족자결론'을 오직 중국에만 적용했을 뿐 한반도문제에는 아무런 관심도 표명하지 않았다. 게다가 일본은 전승국 자격으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했다.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론'의 확산에 따른 3.1운동과 같은 대규모 독립요구 시위에도 불구하고 1차 대전 직후 동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입지를 구축한 나라는 단연 일본이었다.

일본은 이미 국제정치 무대에서 미국, 영국과 더불어 전승국 빅3에 속하는 최강국 취급을 받고 있었다. 이에 비례해서 한반도문제는 점차로 잊혀진 채 존재감마저 상실했다. 그 때문이었을까? 조선 안에서도 민족독립운동 진영에 분화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불과 3년 전만 하더라도 '민족자결론'의 조선에의 적용을 주창하며, 동경에서 2·8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춘원 이광수가 돌연 민족개량주의의 대변자로 등장한 것이다. 이광수가 1922년에 작성한 "민족개조론"은 민족자결론에 의거해서 조선의 즉각적 독립을 주도할 수 있는 비타협적 정치운동의 배격을 주장했다.

정치를 배격한다고 하면서 정작 이광수 자신은 "민족개조론"이 미·영·일 전승국 세 나라의 해군력 감축 문제와 함께 동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의 강대국의 세력균형 문제를 다룰, 워싱턴회의 개최 날에 맞춰 출간된다는 사실(이광수, 1981:91)을 강조했다. 이는 "민족개조론"이 실제로는 일제의 '식민지 문화통치'를 조선인의 시각에서 대변한 정치적 저작이었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조선인은 스스로 통치할 만한 자치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상당 기간 민족개조에 매진하면서 일본과 같은 선진국가의 후견 아래 자치능력을 배양해야 한다는 게 그 글의 주요논지였다.

역사는 아이러니와 반전의 연속이다. 미국의 중국의 영토보존과 문호개방 유지에 힘겹게 치중하던 미국과 한반도, 만주를 넘어 동아시아 전체에서 제국을 건설하기 위한 일본 사이의 대립이 본격화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0년 전만 해도 두 나라는 사실상의 동맹관계를 유지하지 않았는가? 일본이 1차 세계대전의 참전 조건으로 중국에 제시한 '21개조 요구안'이 모든 사건의 발단이었다.

■ 참고문헌
이광수. 1981(1922). "민족개조론." 『논문집 '민족개조론'』. 우신사.
이삼성. 2009.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2』. 한길사.
Carr. E. H. 1964. The Twenty Years' Crisis 1919-1939. New York: Harper and Row.
Clifford. G. 1994. "'They don't come out where you expect': Institutions of American Diplomacy and the Policy Process." in G. Martel (ed.). American Foreign Relations Reconsidered. 1890-1993. London: Routledge.
Corwin. E. 1957. The President: Office and Powers 1787-1957. New York: New York University Press.
Esthus. R. 1967. Theodore Roosevelt and Japan. Seattle: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Hunt, M. 1987. Ideology and U.S. Foreign Policy. New Heaven and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Iriye, A. 1999. 『20세기의 전쟁과 평화』. 을유문화사.
Kennan, G. F. 2012. American Diplomacy 1900-1950.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Kissinger, H. 1994. Diplomacy. New York: Simon & Schu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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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대학교 국제관계학부 교수. 정치이론, 한국정치, 국제관계, 한미관계 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