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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획은 미국 외교정책의 변천 속에서 동아시아, 한반도문제를 이해하는 것이 핵심이다. 종래 대부분의 연구는 한반도문제를 중심으로 미국의 외교정책을 논의했다. 이 기획은 반대로 미국외교정책의 특징을 고찰하는 가운데 한반도문제를 살펴본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미국의 외교정책사는 기존 유럽나라들과는 결이 다른 정치문법을 채택해온 역사이기 때문이다.

외교정책 상의 변형과 변주, 애매모호함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흐르는 미국외교정책의 내적 핵심과 문법이 있다는 게 필자의 핵심 주장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미국과 동아시아, 미국과 한반도 관계의 역동적 변화상을 보다 잘 이해하고 들여다 볼 수 있다고 판단한다. - 기자말


20세기로의 전환기에 미국의 대외정책에 몇 가지 특기할 만한 변화가 발생했다. 매킨리 대통령 재임기인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스페인 식민지였던 쿠바를 독립시키는 것과 함께 사실상 보호령 하에 두고 필리핀을 식민지화하는 제국주의 정책을 실행에 옮겼다. 하지만 동아시아의 경우, 헤이의 문호개방선언을 필두로 '강한 아시아' 정책을 고수했다. 그런데 동아시아에서 예기치 않은 사건이 터져 나왔다. 만주와 한반도의 패권을 놓고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격변하는 동아시아 정세에 맞춰 미국의 대외정책을 조율하는 작업은 매킨리 대통령의 암살로 인해 갑작스럽게 대통령직을 승계한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손에 맡겨졌다. 루스벨트는 유럽열강들처럼 국가이익을 대외정책의 시금석으로 삼았다. 그는 문호개방 정책을 유지하면서 경제적 이익과 국가안보로 요약되는 미국의 국익실현에 가장 유리한 조건이 무엇인지를 탐색했다. 그 결과, 루스벨트가 선택한 전략이 바로 지정학에 기초한 세력균형이었다.

국가이익과 세력균형이야말로 루스벨트의 동아시아 정책을 상징하는 키워드다. 루스벨트는 미국의 국익과 동아시아 세력균형에 가장 위협이 되는 나라로 러시아를 꼽았다. 만일, 만주와 한반도가 러시아의 영향권 하에 들어가면 러시아는 태평양으로 진출을 시도할 것이 분명하다. 이 경우, 미국의 경제적 이익은 물론, 국가 안보 역시 심각하게 위협받을 것이기 때문에 러시아와의 일전은 불가피하게 될 것이다.
태평양에서 충돌하기 전에 만주와 한반도에서 러시아 세력을 막아서는 게 그야말로 상책이다. 또한 러시아 봉쇄를 미국과 전략적 이해를 공유하는 영국이나 일본이 대신해준다면 미국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 될 것이다.

이럴 때만이 동아시아에서 세력균형이 유지될 수 있다는 게 '루스벨트 추론'의 핵심 내용이다. 그래서 루스벨트는 "러시아의 승리는 문명의 타격이나, 러시아 세력의 몰락도 또한 불행이다. 미국을 위해 계산하자면, 그것은 러시아로 하여금 일본과 동아시아에서 대치하게 하여 서로 견제하고 서로 완화케 하는 것만큼은 좋지 못하다"(문일평, 2016:301)고 힘주어 말할 수 있었다.

루스벨트의 대외정책은 동아시아에서 열강들 사이의 세력균형을 유지하는 데 일차적 목표가 있었다. 힘과 국익에 입각한 정책수행이 가장 이상적이라는 현실주의적 분석틀에 의하면 루스벨트의 동아시아 정책은 가장 현실적 바탕 위에서 수행되었다. 그는 동아시아에서 제한된 개입정책을 유지했다. 동아시아 지역에 사활적 이해를 걸고 있는 일본과의 우호관계가 대외정책의 핵심이었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는 문호개방정책마저 포기할 의사가 있었다(Esthus, 1967:308).

루스벨트는 전임 매킨리 대통령의 문호개방정책에서 모순점을 발견했다. 왜냐하면, 만주와 관련해서 일본인들이 미국이 반대하는 정책을 선택한다 할지라도 전쟁태세를 갖추지 않는 한 그것을 막을 방도는 없기 때문이다.

"만주에서 일본과 전쟁을 벌여서 승리하려면 영국 정도의 함대와 독일 정도의 육군이 필요하다. 중국에 대한 문호개방선언은 훌륭한 정책이었고 외교협정으로 유지될 수만 있다면 계속 유지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하지만, 열강이 그것을 무시하기로 마음먹고 전쟁의 위험을 무릅쓰기로 결심하는 순간 사라져버린다." (Griswold, 1962:132).

동아시아에 관한 이러한 추론은 훗날 봉쇄정책의 아버지라 불린 조지 케난의 문호개방정책에 대한 평가와 상당히 유사했다. 케난은 일본이 러시아와의 1905년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전개된 세력배치를 수용하는 것 외에 더 큰 안정성을 보장하는 다른 뚜렷한 대안도 없었던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루스벨트는 일찍이 이 지역에서 러시아와 일본이 균형을 유지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점을 기꺼이 인정할 수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누그러뜨리는 작용을 하게끔' 말이다(Kennan, 2012:47~48).

이런 견해에 따라 미국 정부는 조선에서 일본의 우위가 확립되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 별로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1905년의 태프트·가쓰라 밀약과 1908년의 루트·다카히라 협정은 일본인들에게는 확실히 자신들이 만주에서 획득한 이권과 기존 지위를 미국이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했다.

일본과 러시아 모두의 중재요청에 따라 시작된 포츠머스 조약의 최대승자는 중재국 미국이었다. 왜냐하면, 포츠머스 조약은 승자인 일본의 이익이 아니라 미국의 관점에서 동아시아에서의 세력균형을 실현시켰기 때문이다. 미국은 세력균형의 대가로 전쟁 당사자도 아닌 한반도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그런 까닭에 한반도에서 일본의 종주권을 인정한 포츠머스 조약 제1조는 세 나라 사이에 아무 이견이 없었다. 뤼순, 대련을 포함한 남만주에서의 일본의 우월적 지위 역시 포츠머스 조약은 인정했다. 하지만 만주 전체로 확대해 본다면 러시아의 영향력 역시 과거보다는 약화됐지만 북만주 및 몽고 지역을 중심으로 여전히 유지됐다.

그런데 일본의 전쟁배상금 요구를 러시아가 잘 방어해 냄으로써 포츠머스 조약의 승자가 일본이 아니라 러시아인 것으로 비쳐지는 역설이 발생했다. 일본이 전쟁배상금을 요구하자 러시아 협상 대표 세르게이 비테는 "러시아는 지금까지 다른 나라에 전쟁배상금을 준 적이 없으며, 이번에도 마찬가지"라고 버티며 조약타결을 지연시켰다. 일본군이 모스크바까지 밀고 들어 왔으면 몰라도 지금의 전선은 만주라고 항변하면서, '이곳에는 승자가 없다(There are no Victors here)'는 유명한 말로 맞섰다. 러시아는 결코 패자가 아니라는 취지에서였다.

협상이 교착상태에 접어들자 루스벨트는 배상금과 사할린 섬의 할양문제를 놓고 서로 양보할 것을 두 나라에 요청했다. 그러나 압박의 무게는 일본 쪽에 더 두어진 것으로 느껴졌다. 루스벨트는 일본에게는 "전쟁배상금 요구는 무리이며, 만일 전쟁이 재발한다면 일본은 지금보다 엄청난 전비를 써야 할 것이다"는 충고를 했고, 러시아에게는 "전쟁이 계속된다면 시베리아 전체가 일본군 수중에 떨어질 것"이라고 압력을 가했다. 결국 일본은 전쟁배상금 없이 사할린 섬을 분할하자는 제안을 할 수밖에 없었다. 비테는 영토를 할양할 바에야 협상을 파기하라는 짜르의 훈령을 무시했다. 일본의 제안을 고심에 찬 표정으로 수용하면서 비테는 사할린 섬의 분계선은 북위 50도가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비테는 회담장 밖으로 나오면서 "평화다, 일본이 양보했다"고 큰 소리로 외쳤다. 사실이 그랬다. 전쟁에선 일본에 패배했지만 외교에선 러시아가 판정승한 것으로 미국을 비롯한 유럽 각국의 언론은 평가했다. <뉴욕타임스>는 "포츠머스의 모든 관찰자들은 러시아의 외교적 승리로 보고 있다. 외교사에서 전례가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지상전에서 패배하고 해군은 거의 소멸한 나라가 승전국에 대해 이렇게 하라고 자신의 조건을 제시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박보균, 2005:255)고 포츠머스 강화조약 타결 소식을 전 세계에 전했다.

한미관계 측면에서 포츠머스 조약은, 미국이 한편에서는 동아시아 세력균형을 위한 균형자 역할을 하고, 다른 한편에선 중국에서는 문호개방정책을 지속함과 동시에 한반도를 문호개방과 분리시키는 디커플링 노선을 선택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Moore, 2017:169). 이러한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루스벨트가 할 일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대륙 쪽에서 미국 안보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 러시아세력은 영국과 일본이 저지할 수 있지만, 해양 쪽에서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일본과는 우호적 관계를 수립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미국 태평양 함대의 실력으로는 일본 연합함대를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루스벨트는 일본 해군이 필리핀 공략에 나서면 미국은 이를 충분히 방어할 힘이 없다는 점을 늘 우려했다. 이러한 목표 달성을 위해 미국이 던진 카드가 바로 태프트·가쓰라 밀약이었다.

이 밀약은 육군성 장관인 윌리엄 태프트와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 사이의 비밀대화에서 마련된 것이다. 러일전쟁이 끝날 무렵인 1905년 7월 하순, 태프트의 일본 방문 중에 벌어진 일이었다. 대화록은 일본이 미국령 필리핀의 안전을 보장해 주는 대신, 미국은 사실상 일본의 한반도 합병을 승인해주는 비밀 합의문이었다.

총 3개항으로 구성된 합의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은 필리핀에 대해 침략의도를 품지 않으며,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확인한다. 둘째, 동아시아 평화를 위해 미국, 일본, 영국 세 나라는 실질적 동맹관계를 확보한다. 셋째, 러일전쟁의 원인이 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우월적 지배권을 인정한다. 루스벨트는 가쓰라와의 대담 내용을 비밀전문으로 받은 후, 태프트에게 "당신이 한 모든 약속을 승인한다"는 식으로 비준했다.
 
 태프트(좌) 전 미국 전쟁부 장관과 가쓰라(우) 전 일본 총리대신.
 태프트(좌) 전 미국 전쟁부 장관과 가쓰라(우) 전 일본 총리대신.
ⓒ 데니스 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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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와 러시아를 한반도에서 차례로 제거하고 미국과 영국을 동맹세력으로 확보한 일본에게, 한반도 식민지화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더 이상의 방해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은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조약을 체결했다. 이로부터 정확히 일주일 후인 11월 24일, 미국은 수교국들 가운데 대한제국과 가장 먼저 단교했다. 일본에 우의를 표하기 위해 취해진 서울 공사관 철수는 미국의 최후 외교행위였다. 이 조치는 미국이 한반도문제에 더 이상 관여치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상징적 사건으로 한반도를 사실상 덤핑 처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는 나라와 백성에게 국제관계란 이렇게 비정하다.

1900년대 초반 5년의 시기는 일본에 의한 조선합병이 결정난 것이나 다름없는, 한반도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 시기에 해당한다. 미국이 일본의 조선 합병조치를 외교적으로 적극 거들고 나선 것은 이제는 널리 알려진 일이다. 이 당시, 미국은 일본과 전략적 협력을 추구한 사실상의 동맹국이었다. 필자는 이 시기의 불편한 진실을 올바로 전하려하지 않은 채 작가의 허구적 공상과 통속적 흥미에만 치중해 역사적으로 심대히 왜곡한 <미스터 션샤인>이라는 드라마를 비평한 적이 있다(최형익, 2018).

러일전쟁 전야에 루스벨트를 비롯한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은 일본의 조선합병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중국과 한반도의 디커플링으로 상징되는 동아시아 정책결정에 압도적 영향력을 행사한 락힐의 조선의 덤핑처리 방침을 워싱턴은 초당적으로 공유했다. 알렌 공사는 1904년 2월에 "조선은 고대의 정복과 전통적 권리에 따라 마땅히 일본에 속해야 합니다"(Griswold, 1962:96)며 자신의 견해를 전했고, 락힐 또한 이 관점에 기꺼이 동의했다.

"대한제국이 독립을 지속할 수 있도록 미국정부가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러일전쟁이 끝나면 일본이 한반도 문제를 처리하려 들 것입니다. 일본의 한반도 합병은 일본제국이 대륙으로 진출하는 데 있어 거대하고 결정적 일보를 상징합니다. 일본의 조선합병은 조선인들에게도 좋은 일이며, 극동의 평화를 위해서도 마찬가지로 좋은 일이 될 것입니다." (Esthus, 1967:97)

미국의 안보와 국익을 위해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종주권을 기꺼이 인정한 미국의 조선 폐기정책은 동아시아 평화 실현이라는 더 큰 명분으로 포장됐고, 제국주의 열강들 또한 약속이라도 한 듯 일본의 조선 합병을 승인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바로 서구 열강은 물론, 미국 역시 권력정치에 기반한 현실주의 외교문법에 기댐으로써 일종의 자연법칙과 같은 인식공동체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이를 상징하듯 루스벨트는 포츠머스 조약을 성사시킴으로써 동아시아 평화를 달성했다는 공로로 수여된 노벨평화상 수상식에서 '평화'와 전혀 어울리지 않을 법한 발언들을 쏟아냈다.

"정직한 사람이라면 폭력이 존재하는 거칠고 새로운 공동체 내에서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가 안전을 확보하는 다른 방법을 고안해 내지 않은 상태에서 집단 내 위험한 사람들은 계속 무기를 갖고 있는데도 그에게 무기를 포기하라고 설득하는 것은 어리석은 동시에 사악한 일입니다." (Kissinger, 2014:248)

루스벨트에 따르면, 힘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마치 자연법칙과도 같은 사물의 질서는 '영향권(sphere of influence)'이라는 개념에 잘 반영되어 있다. 영향권이란 광대한 지역에 대한 압도적인 영향력을 특정 국가가 보유하는 것으로, 예컨대 미국에게는 아메리카 신대륙과 필리핀, 영국에게는 인도를 포괄하는 지역을 말한다. 1908년 루스벨트가 일본의 한국 점령을 묵인했던 이유는 일본과 한국의 상호관계가 기존의 조약이나 국제법이 아니라 양국이 가진 상대적 힘에 의해 결정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은 전적으로 일본의 영향권 안에 존재한다. 조선이 지속적으로 독립을 유지해야만 한다는 조약이 정식으로 체결된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조선에게는 이 조약을 강제할 만한 힘이 없었다. 다른 국가가 나서서… 조선이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을 대신 해줄 것으로 믿을 수는 없는 일이다." (Kissinger, 1994:41)

루스벨트는 세계 질서의 궁극적인 본질이 주요 열강들의 경쟁적인 야망을 통해서 결정된다고 믿었다. 인도적인 가치는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고 위협의 진실성을 유지하는 자유주의 국가들이 지정학적으로 성공을 거두는 경우에 최고로 유지될 터였다. 그 가치들이 적대적인 국제 경쟁에서 승리를 거둔다면, 문명은 이로운 결과를 내면서 확산되고 강화될 것이었다.

그런데 미국인들은 어찌된 일인지 당시 국제사회의 대세를 수용한 루스벨트의 권력정치적 외교문법을 자신들의 몸에 잘 맞지 않는 옷처럼 불편해하면서 세력균형을 전혀 미국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간주했다. 그 결과, 루스벨트의 적나라한 군사력 또는 힘에 기반한 현실주의 외교문법은 장기적 관점에서 봤을 때 미국의 주류 대외정책으로 자리 잡지 못하고 막간극으로 끝났다.

더욱 극적인 것은 루스벨트가 자신의 대외정책을 계승할 적임자로 간주한 태프트·가쓰라 밀약의 바로 그 태프트에 의해 세력균형 정책은 파기되고 문호개방정책에서 연유한 미국 특유의 상업적, 통상적 이익을 중시하는 자유주의 외교문법으로 되돌아갔다는 사실이다. 바야흐로 달러외교로 상징되는 총성 없는 전쟁의 막이 올랐다.

■ 참고문헌
문일평. 2016(1939). 『한미오십년사』. 탐구당.
박보균. 2005. 『살아 숨쉬는 미국역사』. 랜덤하우스 중앙.
최형익. 2018. "'미스터 션샤인'과 구한말 한미관계 왜곡." <한겨레신문>(8월 20일).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858409.html
Esthus. R. 1967. Theodore Roosevelt and Japan. Seattle: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Griswold, W. A. 1962(1938). The Far Eastern Policy of the United States. New Haven and London: Yale Univ. Press.
Kennan, G. F. 2012. American Diplomacy 1900-1950.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Kissinger, H. 1994. Diplomacy. New York: Simon & Schuster.
Kissinger, H. 2014. World Order. New York: Penguin Press.
Holmes, J. R. 2007. Theodore Roosevelt and World Order: Police Power in International Relations. Washington, D.C.: Potomac Books.
Moore, G. 2017. Defining and Defending the Open Door Policy. Lanham: Lexington Books.
Neu. C. 1967. An Uncertain Friendship: Theodore Roosevelt and Japan, 1906-1909.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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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대학교 국제관계학부 교수. 정치이론, 한국정치, 국제관계, 한미관계 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