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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모노세키조약 체결 광경. 이홍장과 이등박문 시모노세키조약 체결 광경. 이홍장과 이등박문. 시모노세키 소재, 일본최초의 복어요리 전문점인 춘범루라는 음식점에서 체결.
▲ 시모노세키조약 체결 광경. 이홍장과 이등박문 시모노세키조약 체결 광경. 이홍장과 이등박문. 시모노세키 소재, 일본최초의 복어요리 전문점인 춘범루라는 음식점에서 체결.
ⓒ 최형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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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말 자유주의 개혁사상가였던 양계초는 1901년에 쓴 <이홍장 평전>에서 '조선은 원래 중국의 속국'이라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017년 4월 월스트리트 저널과 인터뷰하며 미중정상회담에서 시진핑 주석이 "한반도는 중국의 일부였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한반도를 보는 중국의 속내가 드러나는 발언이다.  

1880년 주일 청국공사 하여장 또한 이홍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중국은 조선에 대신을 파견하여 외교를 전담하게 해야 한다'고 간언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양계초가 '종속국은 외교를 할 수 없다'는 만국공법에 의거하여 조선의 외교를 청나라가 주관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간주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청나라 실권자였던 이홍장의 생각은 달랐다. 이홍장은 "암암리에 조선을 보호하는 것은 우리 능력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만약 공공연하게 조선의 외교를 주관한다면 조선이 우리말을 꼭 듣는다는 보장도 없는데다가, 세계의 모든 창끝이 우리에게 향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고 만다"(양계초, 2013:162)고 우려를 나타냈다.

풀어서 설명하면, 전통적 외교질서인 사대교린 문법에 따라 조선을 중국의 속국으로 규정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만국공법, 곧 국제법 체계 하에서는 성격이 다른 복잡한 외교절차와 관련 당사국들의 승인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중국은 한반도 문제를 놓고서 전통적인 사대교린 질서와 국제법 체계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렸다. 이러한 혼란은 조미수호조약 체결 당시에 고종이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 인정 각서에도 그대로 반영돼 있다. 이 문서는 조선왕이 보냈지만, 실제로는 한미수호조약 교섭을 주관한 청나라 대표 마건충이 작성했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대조선국 국왕은 개인적으로 조선이 중국의 속방이나 내치, 외교는 자주적으로 해왔음을 밝힘과 동시에 양국은 평등한 입장에서 조약을 체결하며 중국의 속방이라는 사실은 미국에 조금도 영향을 줄 수 없다"(최동희, 2004:210).

누가 봐도 헷갈리기 딱 좋은 내용이었다. 미국은 고종이 보낸 종주권 인정 각서를 조선이 자주적으로 외교할 수 있는 독립국임을 인정하는 문서로 거꾸로 해석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미국과 청나라, 그리고 조선과 청나라는 미국, 조선 양국에서 외교적으로 충돌했다. 가장 먼저 충돌한 지점은 '조선이 미국에 외교적 대표인 공사를 파견하는 게 조선의 지위에 합당한가'였다.

박정양 전권공사 파견을 두고싼 논란

조선은 한미수호조약 제2조에 따라 1887년, 박정양 전권공사를 미국 워싱턴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주미공사 파견을 청나라가 막아섰다. 청나라는 조선이 서양에 공사를 파견하려면 먼저 청나라 조정과 상의해 허락을 받는 게 순서라고 주장했다. 조선 정부는 전전긍긍하며 청나라를 달래려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미국은 청나라 정부의 무례한 행위에 분개했다. 그래서 미 국무장관은 북경주재 미국 공사 덴비에게 훈령을 내려 "한미양국이 서로 공사를 파견하는 것은 청나라 정부의 주선으로 이미 체결된 한미수호조약에 명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에 와서 청나라 정부가 간섭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항의하도록 했다(최동희, 2004:313).

서울주재 미국공사 딘스모어 역시 원세개를 만나서 조선이 일본에 전권공사를 파견할 때에는 청나라는 하등의 이의가 없다가 미국에 공사를 파견하려 할 때 갑자기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미국과 일본을 차별대우하는 처사라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국제법상으로 자주국은 속국과 동등할 수 없기 때문에 미국이 조선과 조약을 맺은 것은 조선이 자주국임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박일근, 1968:430-431).

미국의 외교적 항의에 놀란 청나라 정부는 이번에는 주미 조선공사의 격을 놓고 몽니를 부렸다. 대표의 자격으로 전권공사라는 명칭은 타당하지 않으니 주차공사로 개칭하는 게 옳겠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 이유인 즉, 상국인 청나라가 각국에 파견한 공사의 직함이 전권은 없고 주차뿐인데 조선이 그보다 격이 높은 전권공사를 파견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다른 나라에서도 사대의 예를 따라야 하기에 조선 사절의 명칭에는 '전권'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말고 3등 외교관을 파견해서 청나라 외교관과 차등을 두어 상호교제 하는 데 장애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최동희, 2004:310).

이에 대해 조선정부는 전권공사 파견을 굽히지 않았다. 미국 또한 외교적 항의를 재개할 움직임을 보이자 청나라는 전권 호칭을 사용하는 조건으로 조선이 청나라의 보호국임을 인정하는 '3조'와 '영약3단'의 수용을 강요했다.

청나라가 제시한 '3조'와 '영약3단'은 미국에서 조선외교관이 준수해야할 행동준칙이었다. 3조는 첫째, 조선공사가 청국공사와 공사로 교섭할 때는 '정문(呈文)'의 형식을 취해야 한다. 여기서 정문은 상관에게 올리는 결제양식을 뜻했다. 둘째, 왕래에는 어첩(御帖)을 사용해야 한다. 어첩은 홍색의 명함으로 청나라를 상징했다. 셋째, 공문 작성 시 청나라 양식에 따라 붉은 색 주필(硃筆)을 사용한다(신기석, 1967:244).

3조와 함께 '반드시 준수해야 할 세 가지 약속'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영약삼단(另約三端)' 내용은 첫째, 조선공사가 주재국에 가면 가장 먼저 청나라 공사에 보고하고 그의 지도로 주재국 외무성에 함께 갈 것, 둘째 조회나 공적, 사적인 연회자리에서 조선공사는 청나라 공사의 뒤를 따를 것, 셋째, 교섭해야 할 큰일이나 긴용한 사건은 사전에 청나라 공사와 협의할 것 등이다. 이를 수용하는 조건으로 박정양 공사는 1888년 1월, 워싱턴에 도착했다.

공사 업무를 개시하는 순간부터 박정양은 '영약삼단'을 따르지 않았다. 아니, 따를 수 없었다고 보는 게 보다 타당할 것으로 여겨진다. 공사를 파견한 국가가 자주적으로 외교를 하는 것은 국제법 제1의 원칙이었다. 따라서 청나라 지시를 받고 신임장 제정 등 국무성이나 대통령과의 공식만남을 추진한다면 정작 미국이 수용할 수 없었다.

조선 내정 간섭한 청나라, 기회 놓지 않은 일본

청나라의 간섭은 조선의 외교에 그치지 않았다. 청나라는 임오군란 직후 조선 내정에도 깊숙이 개입했다. 원세개를 주차관(駐箚官)으로 임명하여 조선에 파견했다. 주차관은 영국이 인도에 파견한 총독대리(residence)와 이름도 같고, 동급의 직책이었다. 게다가 청나라는 조선과 국가 대 국가 관계가 아닌 사대교린이라는 특수 관계를 적용해 통상조약이 아니라 유독 청나라만 조선에서 내국인 대우를 요구하는 수륙무역장정을 체결했다.

내정과 외교 가릴 것 없이 전방위적으로 행해진 청나라의 간섭 시도를 서울주재 외교관들은 조선을 합병하려는 시도로 이해했다(Harrington, 1982:56). 저명한 미국 동아시아 정책 연구자로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미 의회문서고에서 발견해 처음 폭로한 데넷 교수(Dennett, 1923:190) 또한 청나라가 원세개를 통해 관철하려는 목적이 조선을 청나라에 부속시켜 만주와 비슷한 지위에 두고자 했던 것으로 분석했다.

상식 밖의 난폭하고 거칠었던 청나라의 내정간섭은 사대교린 체계와 만국공법 체계 사이에서 방향감각을 상실한 결과로 보는 게 타당하다. 조선에서의 종주권을 호시탐탐 노리던 일본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청나라의 외교적 약점을 파고들었다.
일본은 조선에서 공동철병을 약속했던 천진조약 가운데 "조선의 군대 파병요청이 있을 경우 양국은 상대방에게 사전 통지해야 한다"는 조항을 적절히 활용했다.

갑오농민전쟁 때도 조선정부가 요청하지 않았지만 이 조항의 위반을 들어서 조선에 군대를 다시 파견했다. 청나라 파병에 맞불을 놓은 것으로 1894년에는 청일전쟁을 불사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본은 전쟁에서 뿐만 아니라 외교적으로도 청나라에게 승리했다는 점이다. 일본은 국제법을 준수하는 나라로 스스로를 위치 지움으로써 서구 열강의 지지를 얻어냈다.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한 결과로 양국 간에는 시모노세키 조약(1895년)이 체결됐다. 전쟁은 청나라와 일본이 벌여 놓고서, 정작 조약의 첫 번째 조항은 전쟁과는 직접 상관도 없는, 청나라로 하여금 조선이 자주국임을 인정하게 한 것이었다. 요컨대 '흡수하기 위해서는 먼저 독립국으로 인정받게 하라'가 일본이 내건 전략이었다.

한반도를 일본의 세력권 하에 두기 위해서는 서구의 외교문법, 곧 만국공법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하며 서구 열강의 외교적 승인을 획득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함을 일본은 잘 알고 있었다.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중국은 한반도에서 수백 년 동안 유지해온 지배적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런 면에서 시노모세키 조약이 동아시아 국제관계사는 물론 한국 근대사에서 끼친 영향은 지대한 것이다.

국제법상의 독립국으로 인정받게 한 다음 식민지로 병합하는 전략을 처음 적용한 나라는 프랑스였다. 프랑스는 청불전쟁에서 승리하고 베트남을 보호국으로 삼기에 앞서 베트남이 독립국가임을 청나라가 인정하도록 했다. 그래야만 중국이 베트남 문제에 더 이상 관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이야말로 이 분야의 진정한 권위자였다. 한일합방은 물론, 1932년 만주국이라는 괴뢰국가를 수립할 때도 같은 수법을 사용했다.

조선의 종주권을 노리며 청나라와 일본이 치열한 각축을 벌이던 시대에 미국이 조선을 위해서 해줄 수 있는 일은 아예 없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 1887년 6월 25일, 미국 공사 딘스모어가 국무성에 보고한 다음과 같은 내용은 이러한 주장을 잘 뒷받침한다.

"정말 미국인치고서 이 땅의 국민들과 같이 있는 한에는 어느 정도까지 이들의 괴롭고 힘든 처지나 형편과 국내 자치에 관한 요구와 동정에 흥미를 갖지 않기는 전연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5월 27일자 보고에서 이미 말한 대로 '결국 지금의 조선독립의 전도는 암담하다'는 일반적 관측에 이르러는 의연히 변함이 없습니다"(문일평, 2016:198).

'적자생존'이 위세를 떨치던 시대

지금까지 우리는 한미수호조약 체결 때부터 청일전쟁이 벌어진 1894년의 시점까지 조선에서 전개된 청나라와 일본 사이의 외교적 갈등과 이에 대한 미국의 입장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데넷 교수가 1923년에 쓴 논문에서 내린 다음과 같은 결론은 한 세기가 지난 현재에 있어서도 시사해주는 바가 아주 크다고 해야겠다. 이렇게 놓고 보았을 때 한반도 문제에 대한 미국의 결론은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맺은 1905년이 아니라 1887년의 시점에 이미 결정 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초부터 미국은 동경과 북경에서 취한 태도와 마찬가지로 서울에서도 정치적으로 세력균형을 지지해 왔다. 미국 입장에서는 일본이나 청나라 어느 쪽에든 저울추를 기울일 수 있었음에도 말이다. 그러나 청나라와 일본뿐만 아니라 영국과 러시아에 대해서도 결국은 반목할 수밖에 없는 개입정책을 취하기 전에는 사실상 조선의 독립을 옹호하는 데는 하등 효력이 없었을 것이다. 음모가 끊임없이 양성되는 조선의 궁정에서 미국정부는 엄정 중립을 꾀하였으니 이것은 미국이 주한공사에게 보낸 훈령을 통해서 증명할 수 있다. 미국은 조선의 독립을 찬성하면서도 실제에 순응할 준비를 하여 조선이 청나라의 간섭을 대항하기에 무능력한 것을 알게 될 때 1887년 드디어 청나라에 양보했다. 이것은 이로부터 18년 후에 일본에게 양보한 것과 마찬가지다"(Dennett, 1923:198~199).

지금까지의 얘기는 사태의 절반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이 이해한 만국공법은 중국, 만주, 그리고 한반도가 포함된 동아시아를 서구 열강의 영향권으로 분할하는 식의 제국주의 정치문법과 동일했다. 약한 나라가 강한 나라의 지배를 받는 것은 부당한 일이 아니며, 이러한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나라만이 살아남는다는 적자생존의 사회적 다윈주의 논리가 만국공법의 이름으로 위세를 떨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일본이 가세하면서 제국주의는 팽창주의로 돌변할 움직임을 보였다. 이것은 미국이 조만간 막아설 수밖에 없는 흐름이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일본은 20세기 전반 내내, 유독 미국과 대립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열강의 세력권을 인정하는 유럽형 만국공법과는 결이 다른, 새로운 대외정책을 미국이 추구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새로운 대외정책 문법은 한반도문제를 두고선 '거중조정'으로, 동아시아문제를 놓고선 '문호개방정책'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 참고문헌

문일평. 2016(1939). 『한미오십년사』. 탐구당.
박일근. 1968. 『근대한미외교사』. 박우사.
신기석. 1967. 『한말외교사 연구』. 일조각.
양계초. 2013(1901). 『리훙장 평전』. 박희성 외 옮김. 프리스마.
최동희. 2004. 『조선의 외교정책』. 집문당.
Dennett, T. 1923. "Early American Policy in Korea, 1883~1887." Political Science Quarterly. Vol.38(March) in 문일평. 2016(1939). 『한미오십년사』. 탐구당, 172-200쪽.
Harrington, F. H. 1982. 『개화기의 한미관계: 알렌박사의 활동을 중심으로』. 이광린 옮김. 일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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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대학교 국제관계학부 교수. 정치이론, 한국정치, 국제관계, 한미관계 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