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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대 쪽으로부터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해서 투쟁을 그만 둘수 없다면서 끝까지 가겠다고 합니다.
▲ 조향선(67) 누님 과학대 쪽으로부터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해서 투쟁을 그만 둘수 없다면서 끝까지 가겠다고 합니다.
ⓒ 변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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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다니다 보니 모두 '누님' '형님'이 됐습니다

지난 2월 15일(수) 오후 6시경 울산과학대에 가보니 마침 집회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 집회는 지난 9일(목) 오전 7시경 울산과학대 청소노동자들이 농성한 지 971일째 되는 날 농성장을 또다시 강제철거한 일에 대한 항의집회였습니다.

현재까지 8명의 청소노동자가 복직을 요구하며 농성중에 있습니다. 그중 한 노동자에게 눈길이 갔습니다. 저는 2년 전부터 과학대 청소노동자의 농성장을 가끔 시간나는 대로 방문해 왔습니다. 저야 나이 드신 분들이 농성을 하고 계셔서 안쓰러워 가기 시작했던 건데 오래 다니다 보니 모두 '누님' 아니면 '형님'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제가 눈길이 간 조향선(67) 누님도 그 중 한 분이십니다.

조향선 누님은 제가 갈 때마다 잘 계시지 않았습니다. 다른 누님과 함께 승합차를 몰고 선전전을 다니기 때문입니다. 노동자 500여 명이 모여 항의집회를 한 어느 날, 누님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었습니다. 누님은 매주 토요일마다 열리는 "박근혜 퇴진" 촛불문화제에도 빠지지 않고 나가는 열성 조합원이기도 합니다.

조향선 누님은 2007년 3월 2일부터 지인의 소개로 울산과학대 청소노동자로 일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들어가고 보니 하청업체 파견노동자였다고 합니다. 일하다보니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과 차이를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입사한지 얼마 안되어 노조가입 권유를 받았으나 당시엔 집안일로 할 일이 많아 노조가입은 꿈도 못꿨다 합니다.

"지금 우리가 정규직보다 일을 못하나요? 그런데 차별이 너무 심하잖아요. 이런 차별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잖아요. 집에 일이 있어 바쁘면 그냥 이름만 올려 놓아도 돼요."

처음엔 노동조합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노동조합이 생겨나니 날이 갈수록 학교쪽에서 노동탄압이 심해지고 있었고 김순자 지부장의 설득으로 가입을 했다고 합니다. 노동조합 활동이 어떤지 물어 보았습니다.

"노동조합 하니깐 전에 없었던 용기가 생기데. 좀 더 당당해지고 바른생활을 하게 되더만. 노동조합 없을 땐 업체나 학교 사무실 사람만 보면 주눅들고 했거든. 이제 할 말은 하고 살자는 마음으로 바뀌었지."

지난 15일(수) 17시. 울산과학대 정문앞에서 농성장 강제철거 울산노동자대회가 열렸습니다. 조향선 누님도 핏켓을 들고 서있습니다.
▲ 응답하라! 울산과학대! 지난 15일(수) 17시. 울산과학대 정문앞에서 농성장 강제철거 울산노동자대회가 열렸습니다. 조향선 누님도 핏켓을 들고 서있습니다.
ⓒ 변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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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침몰 2개월 후에 파업 시작, 정확히 기억

- 그동안 몇차례나 끌려 나왔어요?
"대학에서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노동탄압이 심했어. 우리가 근로조건 향상을 위해 파업을 시작한 게 세월호가 바다에 침몰한지 2개월 후였으니 날짜도 정확히 기억나지. 2016년 4월 16일이 세월호가 침몰한 날이잖아. 우린 2개월 후니깐 6월 16일이지. 그때부터 파업이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하고 있네?"

누님은 쓴 웃을을 지어 보였습니다.

"본관 로비에서 파업을 시작했지. 그러다 10월 20일경 1차로 강제철거 당했어. 본관 뒤로 밀어 내더라고. 그때부터 그 자리서 다시 시작했지. 우리가 어디 갈 곳이 있나 뭐... 천막치고 버텼지. 그러다 2015년 5월 18일날 2차로 다시 쫓겨났어. 우리는 인원도 작고 여자들이 무슨 힘이 있어야 막지. 안 그래? 우린 다시 본관앞 공터에서 노숙농성을 이어갔어.

꼴보기 싫으면 해결해주면 되잖아. 학교는 해결할 마음이 전혀 없어 보여. 우릴 다시 쫓아 내더라고. 같은 해 7월 20일 3차로 쫓겨난 거야. 이번엔 좀 멀리 쫓겨났어. 본관에서 1킬로 떨어진 정문 밖으로 쫓아 내더라고. 그리고 학교 안으로 들어오면 1인당 30만원씩 벌금을 내라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쫓아낸 자리에다 다시 노숙농성을 시작했지.

이게 웬 날벼락이야. 정문 옆에서 천막치고 농성하는데 거기가 지들 땅이라고 법원에서 판결났단다야. 법원에서 집행관이 와서 천막과 물품을 다 가져가고 우릴 이곳으로 쫓아 내더라고...그게 2017년 2월 9일 일이야. 아침 7시에 100명이나 되는 건장한 청년들이 와서 금세 다 뜯어갔어."

- 방송인 김제동씨가 과학대 농성장에 오셨던데요. 어떻게 모시고 오게 되었나요?
"그날이 지난 2월 11일(토)이었지 아마.... 매주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 하는 날이니까. 그날... 2월 9일 뜬금없이 다시 쫓겨나고 서글프더라고. 그래서 순남씨랑 우리가 좋아하는 김제동씨가 만민공동회 한다고 울산 온다는데 나가서 우리 일을 알리기로 했지. 우리 사정을 거기 오신 시민들에게 알리면서 그냥 즉석에서 김제동씨에게 순남씨가 먼저 우리 과학대 농성장 한번 와주시면 힘이 나겠다고 제안을 했어.

난 말주변이 별로 없어 뒤에 빠져 있다가 나도 모르게 나가서 무대에 섰어. 얼마나 떨리는지... 지금도 무슨 말을 했는지 잘 몰라. 김제동씨가 우리를 딱하게 보았는지 방문하겠다 해서 너무 기분이 좋더라고. 그날 창기씨는 거기 안왔대? 우리 농성장에 있대."

저도 김제동씨를 참 좋아 하는 편입니다만 그날 몸이 몸시 불편해 집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그날 김덕상 전 위원장의 전화가 없었더라면 김제동씨가 과학대 오는 줄도 몰랐고 과학대 농성장도 못갔을 것입니다. 그날 저녁 과학대 농성장은 한때나마 열광의 도가니 같았습니다. 김제동씨가 나타나자 누님들이 얼마나 좋아들 하시는지요.

조향선 누님도 김제 씨 옆에 앉아 손을 꼭 잡고 놓지를 않았습니다. 김순자 지부장님도 농성장 앞 길에서 넘어져 발을 다쳐 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급히 외출을 허락받아 뒤늦게 도착해 그동안 있었던 일을 김제동씨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김제동씨는 뒤에 눈시울이 붉어 지기도 했습니다.

주변을 두리번 두리번 거리며 "추운데 이를 우야꼬. 이를 우야꼬"라며 안타까움을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1시간 30분 정도 청소노동자들과 이야기를 나눈뒤 서울로 떠났습니다. 누님들은 그렇게 다시 힘을 모았습니다. 이어 지난 15일(수) 오후 5시엔 '과학대 농성장 강제침탈 규탄집회'를 열기도 해서 누님들은 다시 혹독한 겨울 농성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파업하면서 전과자 돼, 교수 폭행죄로 집행유예 1년 선고받아

-누님은 언제부터 선전차량을 몰고 다녔어요?
"처음엔 지부장이 몰고 다녔어. 지부장이 이래저래 바쁘잖아. 어느날 나보고 선전차량 운전 좀 해볼테냐고 묻더라고. 그러자 했지. 1년 정도 된 거 같아. 다니다 보니까 어떤 사람은 수고한다면서 응원해주는 사람도 있고 어떤 경우는 시끄럽다며 경찰에 신고도 하더라고. 응원해 주는 사람 보면 고마운데 우리 심정도 몰라주고 비난하는 사람 만나면 참 속상해.

그보다 난 파업에 참여하면서 전과자가 되었어. 그게 더 억울해. 2015년 10월경에 있었던 일만 생각하면 지금도 뿔따구가 난다니까. 대학이라는 곳에서, 또 어찌 배웠다는 사람들 양심이 이런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날 시내에서 노동자 집회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들어오라는 전화가 온거야. 집회 하다말고 과학대로 와보니 난리가 났어. 그전에 우리가 집회 하면서 폐현수막을 잘게 잘라 학교 내 나무마다 리본을 주렁주렁 달아 놨었지. 그날 교직원과 총장, 교수, 1천여명의 학생들이 몰려나와 현수막도 철거하고 리본도 다 철거하고 있었어."

교수 한 사람이 혼자 리본을 뜯어내고 있길래 양복 주머니 쪽을 잡으며 뜯지 말라고 했어. 그런데 갑자기 벌러덩 누워 버리는거야. 내가 강제로 당기지도 않았는데 그러더라고. 정말 황당했어. 그러려니 하고 다른 곳으로 갔지. 얼마후에 119 구급대가 오고 난리났어. 그 교수가 병원에 실려간 거야. 그리고 몇주 후 경찰에서 조사 받으러 오래.

갔더니 그 교수가 내게 폭행당해 전치 2주 진단 나왔다며 고소를 한 거야. 더 황당한 것은 그날 분명히 그 교수 한 명이 있었는데 증인으로 학생이 4명이나 온거야. 증거로 내민 처음 사진엔 그 교수 혼자 있는 걸 누가 찍었더만 나중에 보니 4명의 학생도 있더라고. 혼자 그렇게 누명쓰고 말았어. 결국 법정에서도 내겐 불리하게 작용했어. 그래서 벌금 70만원하고 집행유예 1년을 선고 받았어. 어느 학생에게 왜 지원했냐고 물으니 안그러면 취업 못한다고 그러더만. 이게 과학대 교수와 학생의 현실이야. 농성하면서 절실하게 느꼈어."

그 이야기를 한 후 누님은 눈물을 글썽 거렸습니다. 누님은 "그동안 파업농성 하면서 맞은 벌금이 통장압류 660만원 하고 재산압류 8200만원"이나 된다며 거기다 그런 일까지 당해서 "너무 억울하다"고 말했습니다.

- 970일 넘었는데 앞으로 어쩌실 거예요?
"얼마전 국회 비정규직 청소노동자들이 모두 정규직이 되었더만. 그렇게 차별없이 일 시키면 얼마나 좋아. 대학은 학문의 전당이라잖아. 지성인을 길러내는 곳에서 이렇게 청소한다고 홀대하면 되겠어? 우린 끝까지 갈 거야. 그동안 투쟁하면서 전국의 수많은 분들에게 신세를 졌어. 연대의 순수한 정이 참 고맙게 느껴졌어. 우리가 뭘 잘못했나? 아니잖아. 그런데 하루아침에 해고되어 버린게 너무 억울해서라도 우린 복직될 때까지 버틸 거야. 전국에서 우릴 지켜보고 있잖아. 그렇게 고맙게 연대해준 모든 분들에게 보람을 안겨주고 싶어."

누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누님은 오전, 오후로 나눠 하루 두차례씩 울산 전역을 돌며 방송차를 몰고 다니며 선전전을 합니다. 김순자 지부장님의 낭랑한 목소리로 녹음된 3년의 농성 이야기를 틀고서 운전대를 잡습니다.

"울산시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우리는 울산과학대 청소노동자들 입니다......"
지난 2월 15일(수) 17시부터 울산과학대 정문앞에서 청소노동자 탄압 규탄집회를 열었습니다.
▲ 울산과학대 청소노동자 탄압 규탄대회 지난 2월 15일(수) 17시부터 울산과학대 정문앞에서 청소노동자 탄압 규탄집회를 열었습니다.
ⓒ 변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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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울산과학대, #천막농성, #청소노동자, #조향선, #비정규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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