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동생 묘지에서 눈물을 쏟고 있는 이정자 할머니.
 동생 묘지에서 눈물을 쏟고 있는 이정자 할머니.
ⓒ 장영철

관련사진보기


"엄마 보고싶다, 집으로 와라. 미자야, 니는 엄마하고 같이 잘 있나."

"그때 동생은 세 살이었습니다. 엄마 품에 안겨 총에 맞아 엄마랑 같이 죽었습니다. 아버지는 동네 구장(이장)을 했는데 그 전에 경찰에 끌려가서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릅니다."

진주에 살고 있다는 이정자(71) 할머니는 동생 묘지에서 목 놓아 울었다. 동생 묘 옆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묘가 있다. 오빠 민규(79) 할아버지는 뒤에서 눈물을 훔쳤다. 해마다 찾는 묘소지만 지금까지도 눈물은 마르지 않는다고 했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2월 7일, 국군의 총탄에 의해 평화롭던 한 가정은 이렇게 풍비박산 났다. 지금까지 삶의 연장선에서 수많은 고통도 겪었다고도 했다, '빨갱이'라는 낙인은 오랜기간 이어졌다.

"경찰에 끌려간 아버지 생사도 몰라"

산청함양사건 추모제
 산청함양사건 추모제
ⓒ 장영철

관련사진보기


한국전쟁 당시 억울하게 희생된 경남 산청과 함양군 지역 주민 705명의 넋을 기리는 합동위령제가 4일 산청군 금서면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에서 열렸다.

'제65주기 산청·함양사건 양민희생자·제29회 합동위령제 및 추모식'은 산청·함양사건 양민희생자 유족회(회장 정재원)가 주관했다. 추모식에는 조규일 경남도 서부부지사와 허기도 산청군수, 임창호 함양군수 등 양 지자체 기관단체장과 희생자 유족, 주민 등 600여 명이 참석했다.

추모식에 앞선 위령제에서 초헌관은 임창호 함양군수가, 아헌관은 이승화 산청군의회 의장, 종헌관은 정재원 유족회장이 맡아 각각 헌작하며 제례를 올렸다.

추모식은 희생자 705명 및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헌화 및 분향, 필봉문학회 김태근 시인의 추모시 낭송, 위령의 노래 합창 순으로 진행됐다.

"굴곡진 현대사 소용돌이 속에 빚어진 비극"

조규일 경남도 서부부지사는 추모사를 통해 "산청·함양사건은 굴곡진 우리 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빚어진 커다란 비극"이라며, "산청·함양사건이 과거를 추모하는 것을 넘어 평화와 인권의 소중함과 함께, 믿음과 화해의 길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정재원 유족회장은 인사말에서 거창사건 유족회가 산청·함양 사건을 배제한 단독 배상법안을 상정한데  대해 유감을 표명하고, "더불어민주당 김병욱 국회의원(경기도 성남 분당을)이 산청·함양사건을 포함한 새 배상법안을 대표발의하기로 약속했다"고 밝혀 유족들로부터 박수를 받았다.

"김병욱 의원, 산청함양사건 배상법안 발의 약속"

산청·함양사건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2월 7일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가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을 하면서 벌어진 민간인 희생 사건이다. 산청군 금서면 가현, 방곡마을과 함양군 휴천면 점촌마을, 유림면 서주마을에서 705명의 주민들이 통비분자로 몰려 집단 학살됐다.

이 사건은 지난 1996년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 제정을 계기로 추모공원 조성 등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는 별개로 2004년 개별보상법인 '거창사건 등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했으나 정부가 거부권을 행사해 폐기됐다.    

이후 개별배상법안 제정을 두고 거창사건 유족회가 산청함양사건을 배제한 법안 발의를 줄기차게 제기하고 있어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관련기사: '거창학살사건'인가, '거창산청함양학살사건'인가).

사건 현장에서 총 맞고 살아난 정재원 유족회장
                                                                                                                                              
정재원 유족회장
 정재원 유족회장
ⓒ 장영철

관련사진보기

정재원(72) 산청·함양사건 유족회장은 당시 학살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 가운데 현재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산 증인이다.

정 회장은 사건 현장에서 총알 3발을 맞고 기적적으로 살아났다고 했다. 그때 할머니와 어머니, 남동생과 여동생을 잃었다.

아버지는 그 뒤 육군 소위로 한국전쟁에 참전해 전사했고, 졸지에 고아가 됐다고 말했다.

정 회장은 2004년 정부가 거부권을 행사해 폐기된 '산청·함양사건 개별배상법' 재상정을 위해 10년 넘게 국회를 다니고 있다.

정 회장은 "국회 지리는 초선 국회의원보다 더 잘 안다"고 우스개소리를 했다.

정 회장과의 인터뷰는 지난 4일 추모제가 열린 추모공원에서 있었다.

- 산청·함양사건이 포함된 배상법안 발의를 앞두고 있다고 발표했다.
"지난달 25일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 김병욱 국회의원을 만나 산청·함양사건이 포함된 배상법안 발의를 건의했다. 이 자리에서 김 의원께서 흔쾌히 동의해 주셨다."

- 거창사건만 발의한 다른 법안과는 어떻게 되나.
"거창사건 배상법안을 발의한 박범계 의원실도 산청·함양사건이 포함된 법안이 상정되면 병합 심의해 처리하겠다고 했다. 거창사건과 산청·함양사건이 동시에 국회에서 다뤄지게 되는 것이다."

- 사건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언제인가.
"53년부터 방곡마을 유족 몇몇이 '동심계'를 결성해 곡우 때 숨어서 제사를 지내오다 4.19 뒤에 국회 차원의 진상조사가 있었다. 하지만 5.16으로 이 사건은 덮어졌고 89년이 되서야 유족회가 결성되고 신원운동이 시작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93년 민자당사 앞 상여 시위도 벌여"

- 특별조치법 통과에도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들었다.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은 1996년 1월, 15대 국회에서 통과됐다. 법안 제정 당시 산청·함양사건이 들어있지 않아 1993년 11월 18일 당시 집권당인 민자당사 앞에서 유족들이 상여 시위를 벌였다. 이후 산청·함양사건이 포함돼 특별조치법이 제정됐다.

이 특별조치법에 따라 2004년 거창군 신원면에 거창사건 추모공원이 들어섰고, 2008년 산청군 금서면에 산청·함양 추모공원이 조성됐다."   

- 끝으로 하고 싶은 말씀은?
"지금까지 유족들의 명예회복에 도움을 주신 분들이 너무 많다. 중앙과 지역 정치인, 주민 등 고마운 분들이 많다. 그런 분들의 지지가 있었기에 지금까지 사재를 털어 명예회복을 위한 활동을 할 수 있었다."



태그:#산청함양사건,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정재원, #김병욱
댓글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