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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문화재자료 1호인 대구향교 대성전
 대구시 문화재자료 1호인 대구향교 대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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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鄕)의 의미 중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향수' 등에 내포된 '(농촌 또는 전원으로서의) 고향'의 뜻이고, 다른 하나는 '경향(京鄕)' 식으로 쓰이는 '비(非)서울'의 뜻이다. 그래서 예전에는 정치인이나 상인이 대중 앞에서 "경향 각지에서 오신 신사 숙녀 여러분!" 하며 연설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향'은 도시와 전원, 서울(京)과 비서울(鄕)을 나타내는 데 멈추지 않고 문화적 사대주의를 담는 역할도 했다. 글자 '향'이 사대주의의 그릇으로 쓰인 대표적 사례는 향가(鄕歌)이다. 향가는 '전원 또는 농촌의 노래'가 아니라 '(중국 아닌) 신라의 노래'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향'은 곧 '방(方)'이다. 지금도 대한민국을 미국의 한 주로 편입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지만, 김부식의 의식 속에서도 '신라는 중국의 한 지방'에 지나지 않았다. <삼국사기> 열전의 설총 부분에 나오는 '(설총이) 우리말(方言)로 (중국의) 9경을 해독하여 후학들을 가르쳤으므로, 지금(고려) 학자들이 그를 종(宗, 우두머리)으로 삼고 있다'라는 대목이 바로 그 증언이다.

진평왕릉에서 도로를 건너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나타나는 전(傳)설총 묘
 진평왕릉에서 도로를 건너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나타나는 전(傳)설총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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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鄕校)의 '향'은 중국에 대한 자기비하적 표현은 아니다. 그저 서울 아닌 시골(鄕)에 세워진 학교(校)라는 뜻이다. 향교는 고려 때부터 건립되었다. '향학(鄕學)'이라는 이름으로 1003년(목종 6)부터 시작된 향교 건립은 1127년(인종 5) 임금이 지방에 학교를 많이 세우라는 교서를 내림으로써 본격화된다.

현재 전국에 남아 있는 향교 건물들의 상당수는 건립 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경기도 파주의 장단향교, 김소월의 '진달래꽃'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평안북도 영변의 영변향교는 1127년에 문을 연 오랜 전통의 향교로 분명하게 확인된다. 강화도의 강화향교와 교동향교, 인천의 부평향교도 1127년에 설립되었다. 다만 장단향교와 영변향교는 가볼 수 없어 '분단의 비극'을 느끼게 한다.

가장 오래된 향교 중 장단향교, 영변향교는 볼 수 없고

동재, 서재와 더불어 1990년 건물인 낙육재를 오른쪽에 둔 채 외삼문을 바라보며 서 있는 공자상(대구시와 자매 결연을 한 중국의 청도시가 기증한 것임). 낙육재는 본래 1721년(경종 1) 대구읍성 남문 밖에 지어졌다. 관립 도서관의 효시라 할 낙육재는 학생을 선발하여 기숙시키면서 장학금도 지급하였는데 일제 통감부가 들어서면서 폐쇄되어 장서는 뒷날 대구시립도서관으로 옮겨졌고, 처분된 재산은 협성학교(현 경북고등학교) 설립에 쓰였다.
 동재, 서재와 더불어 1990년 건물인 낙육재를 오른쪽에 둔 채 외삼문을 바라보며 서 있는 공자상(대구시와 자매 결연을 한 중국의 청도시가 기증한 것임). 낙육재는 본래 1721년(경종 1) 대구읍성 남문 밖에 지어졌다. 관립 도서관의 효시라 할 낙육재는 학생을 선발하여 기숙시키면서 장학금도 지급하였는데 일제 통감부가 들어서면서 폐쇄되어 장서는 뒷날 대구시립도서관으로 옮겨졌고, 처분된 재산은 협성학교(현 경북고등학교) 설립에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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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덕의 영해향교도 1346년(충목왕 2)에 문을 열었으니 오래된 향교로 자못 뽐낼 만하다. 그 외 경북 영주향교 등이 1368년(공민왕 17), '은진미륵불'로 국민들에게 익숙한 논산의 은진향교 등이 1380년(우왕 6)에 개교했다. '개교'라는 말을 쓰는 것은 향교가 고려 또는 조선 시대의 공립 교육기관이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로 접어들면 더 많은 향교들이 들어선다. 제주향교, 경북 김천 김산향교 등이 1392년(태조 1), 경기도 화성 남양향교, 전북 완주 고산향교 등이 1397년(태조 6) 건립되는 것을 필두로 충남 노성향교, 포항 청하향교와 흥해향교, 광주향교,  전북의 익산향교와 장수향교, 강원도의 영월향교, 횡성향교, 삼척향교, 전남 장흥향교, 충북 옥천향교, 충남 서천 비인향교 등이 1398년(태종 7) 문을 연다. 대구향교도 이때 건립되었다.

대구는 현재 우리나라의 거대 도시 중 한 곳이지만 향교가 들어선 시기는 뜻밖에도 상당히 늦다. 섬 지역인 강화도의 교동향교에 견주어 270년이나 뒤처지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고려 공민왕(1330~1374) 재위 기간 중에 설립된 것으로 추정된 대구광역시 외곽의 경산 자인면 소재 자인향교에 비해도 수십 년 늦다. 그런 점에서, 향교의 건립 시기도 대구가 임진왜란을 겪고 난 후 비로소 지리적, 군사적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해주는 자료라 할 만하다. 대구에 경상감영이 설치되는 때는 7년 전쟁 3년 뒤인 1601년(선조 34)이다.

본래 교동에 있었던 대구향교

대구시청 인근인 교동의 한 철물점 가게 안에 남아 있는 대구향교 우물 흔적.
 대구시청 인근인 교동의 한 철물점 가게 안에 남아 있는 대구향교 우물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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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향교가 처음 건립된 곳은 중구 교동이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침탈로 불타버렸고, 종전 후인 1599년(선조 32) 재건될 때는 현재의 달성공원 근처에 배치되었다.

그 후 1605년(선조 38), 달성 주변은 '불길한 징조가 있어(대구향교 안내판의 설명)' 재차 교동으로 왔고, 1625년(인조 3) 명륜당이 복원되었다.

대구향교는 1932년에 현재 위치로 왔다. 향교 안의 안내판은 '시가지를 확장함에 따라 지금 자리로' 이건(移建)되었다고 설명한다.  대구역 앞을 지나 동인네거리로 가는 도로가 확장되면서 지금의 남산동 위치에 자리를 잡은 대구향교가 본래의 교동 향교 터에 남긴 것은 우물 흔적뿐이다. (전국적으로 향교가 있었던 마을들에는 '교동, 교리' 식의 이름이 붙어 있다.)

대성전, 명륜당, 추녀, 용마루, 공포

대성전 : 대성(大成)이 공자를 가리키므로 대성전은 공자의 집(殿), 즉 공자를 모시는 사당이다. 그에 비해 대웅전(大雄殿)은 석가를 모시는 집이다.
명륜당 : 공부하는 집
전묘후학(前廟後學) : 제사(廟)를 지내는 사당(대성전)이 앞(前)에 있고, 공부(學)하는 명륜당이 뒤(後)에 위치
좌학우묘(左學後廟) : 명륜당이 왼(左)쪽, 대성전이 오른(右)쪽에 위치 
추녀 : 네모지고 끝이 번쩍 들린, 처마의 네 귀에 있는 큰 서까래
용(龍)마루 : 지붕 가운데 부분에 있는 가장 높은 수평 마루
공포 : 전통 목조건축에서 처마 끝의 하중을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 같은 데 짜맞추어 댄 나무 부재

교동 시대의 대구향교는 대성전이 앞에 있고 명륜당이 뒤에 있는 전묘후학(前廟後學) 구조였다. 그에 비해 지금은 명륜당이 왼쪽에 있고 대성전이 오른쪽에 있는 좌학우묘(左學右廟) 형식을 취하고 있다. 출입문인 외삼문은 동쪽으로 난 높은 계단 위에 있다.

대구향교 대성전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 구조의 대성전 건물은 모서리에 추녀가 없고 옆면 벽이 용마루까지 삼각형을 이루는 맞배지붕을 보여준다. 이 대성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기둥 위만이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배치한 화려한 다포식 건축 기법에 있다. 대성전이 이같은 모습을 띠고 있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그래서 대구향교의 대성전은 대구시 문화재자료 1호로 등록되었다.

1592년 4월 21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일본군이 대구를 침탈한다. 부산에 상륙한 지 불과 7일만에 적들은 대구읍성에 불을 질렀다. 전란 발발 한 해 전인 1591년에 완공된 대구읍성은 축성을 마친 지 겨우 1년만에 납작하게 뭉개졌다. 대구부사 윤방(尹昉)과 함께 고성동(古城洞) 일대에 대구읍성을 쌓느라 피땀을 흘린 (경북) 선산, 군위, 인동 백성들의 고생은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져버렸다.

읍성을 불사른 일본군은 머물 곳이 마땅하지 않자 대구향교에 본부 진영을 꾸렸다. 의병장 우배선의 편지 등이 다수 수록되어 있는 <월곡실기(月谷實記)>의 '복병등상순영장(伏兵等上巡營狀)'에 따르면 일본군들은 '향교의 성전(聖殿, 대성전) 위에 높은 누대를 세워 네 문을 통해 멀리 살펴보고', 그들의 '우두머리는 항상 새로 지은 집에 머물면서 말을 침실 근처에 별도로 두'었으며, 우두머리의 숙소는 '노왜(奴倭, 일본군)가 숙직'을 하며 지켰다.

우배선 동상(대구 달서구 상인동 월곡역사공원 소재)
 우배선 동상(대구 달서구 상인동 월곡역사공원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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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 주둔 일본군 격퇴는 두 여종 덕분

우배선은 '여종 필금(必今)과 만애(萬愛)가 지난 (1592년) 12월 왜적의 대구 진중(대구향교)에 사로잡혔다가 반 달이 지나서 도망쳐 돌아왔기에 왜적의 형세와 거처 등에 대해 물어' 보았다.

그렇게 해서 알게된 것이 공자묘(孔子廟, 대성전) 위에 초소가 설치되어 있다는 사실, 적군 대장의 숙소 경비 상태와 마굿간의 위치 등이었다. 여종들은 또 '(왜적의) 군졸들은 외원(外園, 바깥뜰)의 영사(營舍, 군대 막사)에 무리를 지어 이어져 (머물고) 있으므로 한밤중에 (접근하면) 불을 지를 수 있다'는 정보도 알려주었다.

우배선은 '정월 초이틀에 술과 떡을 정성스레 갖추어 (두 여종에게) 각기 한 그릇씩을 가지게 하고 방도를 가르쳐 (대구향교로) 들여 보냈다.' 그랬더니 두 여종은 '이튿날 돌아와서' 우배선에게 '적들이 "처음에는 말하지 않고 달아났다가 이제 어찌 다시금 와서 간교하게 (우리를) 속이려 드느냐?" 하면서 옷을 발가벗기고 머리를 베려 했는데, 한 늙은 왜적이 말려서 죽음을 면했다'면서 '술과 떡을 나누어 먹이자 아침저녁으로 좋은 밥을 주었고, 백미도 한 말씩을 주어서 가지고 왔다.' 하고 말했다.

우배선은 '(정월) 15일에 또 술과 떡을 싸가지고 (두 여종을 대구향교에) 들어가게' 했는데 '여러 왜적들이 반가이 웃고 (두 여종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너희가 죄를 두려워하지 않고 다시 오니 지난 날의 정을 잊을 수 없다" 하고 말하면서 선물을 주어 '필금은 무늬가 가는 무명으로 지은 겉옷과 속옷 하나를, 만애는 다갈색 명주 저고리 하나와 검게 물들인 바지'를 받아 왔다.

'(정월) 25일에는 야채를 각기 한 광주리씩 갖추어 보냈는데, (두 여종이) 돌아와서는 "향교 밖에 별도로 진을 치고 있는 왜적들이 모두 밖으로 나가서 소굴이 통 비었고, 향교 (안에 남아 있는) 적들은 전염병으로 누워서 앓고 있는 자가 많아 산처럼 쌓였으며, 기물들을 모두 묶어서 삼월 스무날 사이에 본국으로 돌아간다. (운운)" 하고' 보고하였다.

대구 망우당공원 안의 임란의병관에 전시되어 있는 비격진천뢰. 전시관 게시물에는 '임진왜란 당시 (우리 조선군이) 사용하였던 일종의 시한폭탄'이라는 해설이 붙어 있다. 의병군에 비격진천뢰를 만들 줄 아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우배선은 대구향교를 공격하기 전에 이 무기를 조선군 본부에 요청하였다.
 대구 망우당공원 안의 임란의병관에 전시되어 있는 비격진천뢰. 전시관 게시물에는 '임진왜란 당시 (우리 조선군이) 사용하였던 일종의 시한폭탄'이라는 해설이 붙어 있다. 의병군에 비격진천뢰를 만들 줄 아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우배선은 대구향교를 공격하기 전에 이 무기를 조선군 본부에 요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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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배선은 그동안의 경과를 정리한 뒤 '적을 공격하여 멸살하려면 이 시기를 놓칠 수 없습니다. 술을 빚어서 독약을 (탄 것은) 몰래 준비했지만, 왜적의 우두머리에게 독을 먹일 방법이 없으므로 왜병들이 독약을 마시고 자빠지는 즈음에 진천뢰(震天雷)를 쏜다면 향교에 있는 적들을 모조리 죽일 수 있습니다. 다만 진천뢰를 주조할 야장(冶匠)이 없습니다. 장인(匠人) 가운데 재주가 정교한 사람 서넛을 가려 빨리 보내주셔서 대사를 이루게 해주시기를 천만 번 간절히 바랍니다.' 하고 순영(조선군 본부)에 보고했다.

<월곡실기> '연보'에는 우배선이 '1593년 4월 달성에서 적을 격파하고 대구향교에 주둔한 적을 축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석규(1648-1713)의 <지족당문집(知足堂文集)>에 실려 있는 '덕동서원 사적(事蹟)'에도 '적들이 대구향교 위에 망루를 짓고 관망하는 것을 본 공이 통분해 하며 죽음을 맹세하고 사졸들보다 앞서서 나아가 일격에 적을 섬멸하여 팔 년의 병화 가운데 대성전(大成殿)을 온전하게 하였으니 사문(斯文, 유학의 도)에 공이 매우 컸다.'고 새겨져 있다.

1593년 4월, 대구향교의 적을 몰아내는 우배선

대사헌 윤봉오(1688∼1769)도 <(우배선) 행장>에 '적들이 대성전 위에 망루를 세우고 원근을 살펴 보고 있는데 더러운 기운이 가득하였다. 공(우배선)은 칼을 어루만지며 사졸들에게 "내가 그대들과 의병을 일으킨 지 몇 해가 되도록 아직까지 미처 도적을 꺾어서 무찌를 수 없었기 때문에 이제 대성전이 더럽혀지고 욕되기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맹세코 이 도적들과 함께 살지 않으리라" 하였다.

(우배선의) 사기(辭氣, 말의 기운)가 격렬하니 모두들 죽음을 바치기를 원했다. 드디어 가볍고 날랜 사졸들과 함께 밤중에 (대구향교를) 습격하여 적의 머리 백여 급을 베니 적이 마소에게 먹일 풀과 군량 병기를 버리고 달아났다'라고 증언하였다.

우배선을 기리는 낙동서원(대구 달서구 상인동 월곡역사공원 소재)
 우배선을 기리는 낙동서원(대구 달서구 상인동 월곡역사공원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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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보면 대구향교 건물들은 1593년 (양력) 5월까지 무사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두 여종이 잡혀간 때가 음력 1592년 12월(대략 양력 1593년 1월), 우배선이 향교에 머물고 있던 적들을 쫓아낸 때가 음력 1593년 4월(대략 양력 1593년 5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적들은 끝내 대구향교를 불태워 없앴고, 다시 지은 것 또한 교동 자리에 가만히 두지 않고 멀리 남산동으로 쫓아내었다. 오늘날 대구향교에 가면 임진왜란의 흔적도, 일제 강점기 식민지의 상처도 맨눈으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전소되어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경주 황룡사와 팔공산 부인사 터에서 몽고군의 행패를 보듯이, 우리는 대구향교에서 일본 침략군의 만행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국사 교육이요, 역사 의식이다.


태그:#우배선, #대구향교, #임진왜란, #향가, #설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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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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