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충의사 창의문 너머로 학성공원(사진의 둥글고 푸른 숲)과 바다가 보인다. 임진왜란 울산성 전투 당시 학성공원은 가등청정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던 일본왜성이었고, 지금의 충의사 자리에는 조명연합군 본부가 있었다. 조명연합군은 일본왜성이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곳에 본부를 설치했던 것이다.
 충의사 창의문 너머로 학성공원(사진의 둥글고 푸른 숲)과 바다가 보인다. 임진왜란 울산성 전투 당시 학성공원은 가등청정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던 일본왜성이었고, 지금의 충의사 자리에는 조명연합군 본부가 있었다. 조명연합군은 일본왜성이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곳에 본부를 설치했던 것이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울산 충의사(忠義祠)'를 찾는다. 그냥 '충의사'라 하지 않고 앞에 울산을 덧붙이는 것은 충의사가 보통명사인 까닭이다. 정기룡 장군을 모시는 경북 상주 충의사, 윤봉길 의사를 기리는 충남 예산 충의사, 최경회 장군을 제사지내는 전남 화순 충의사, 정문부 장군을 받드는 경남 진주 충의사 등등 울산 충의사와 한자 표기까지 동일하거나, 혹은 우리말 발음이 같은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울산 충의사' 경내에는 충의사(아래 사당) 외에도 숭모당(崇慕堂, 강당), 전시관, 전사청(典祀廳, 제사를 준비하는 집), 창의문(彰義門), 상충문(尙忠門), 울산 임란 의사 사적비(事績碑) 등이 세워져 있다. 그런데도 '울산 충의사'의 약칭은 충의사로 통한다. 이는 사당(祠堂, 충의사) 건물이 '울산 충의사'의 본전(本殿)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즉, '울산 충의사'는 울산 지역 임진왜란 의사(義士) 239분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2000년 6월 문을 열었다.

위패들이 모셔져 있는 충의사 본전 내부의 모습
 위패들이 모셔져 있는 충의사 본전 내부의 모습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전국의 임진왜란 유적지를 두루 찾아 보려는 답사자는 울산광역시 중구 서원11길 25에 있는 '울산 충의사(아래 충의사)'를 꼭 찾아 보아야 한다. 충의사는 울산 지역의 임진왜란 의사들을 제사 지내는 현충 시설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1차 및 2차 울산성 전투 당시 조명연합군의 본부가 설치되었던 역사의 현장이다. 조명연합군 수뇌부는 일본왜성이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이곳에 머물면서 울산 혈전의 공방을 지휘했다. 충의사 전시관에 걸려 있는 '도산성 전투' 해설문을 읽어 본다.

'(일본왜성은) 계변성이라 불리던 신라의 성을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신라 고성 학성을 부순 자리에) 새로 쌓은 왜성으로, 조선측에서는 섬처럼 생긴 형상이라 하여 도산성(島山城)이라 불렀다.

같은 해 12월 23일부터 다음해 1월 4일까지 조명 연합군의 총공격을 받아 성밖에서 싸우던 왜군이 패하여 성내에 들어갔으나 식량이 없어 소변을 마시고 말을 잡아먹으면서 성을 지키다가 인근 지역의 구원군이 와서 간신히 함락을 면하였다.


(그 이후) 왜군은 성을 삼중으로 벽을 쌓아 수비를 삼엄하게 하고 있었으나 이듬해(1598년) 9월에 다시 아군 및 명나라 원군의 공격을 받아 100여 일을 겨루다가 밤을 타서 성을 불태우고 퇴각하였다.'

충의사 전시관의 내부(일부) 모습. 사진 왼쪽에 '조선의 화약 병기' 안내판, 일본군 장수의 갑옷과 투구, 오른쪽에 '울산의 임진왜란 유적' 안내판이 보인다.
 충의사 전시관의 내부(일부) 모습. 사진 왼쪽에 '조선의 화약 병기' 안내판, 일본군 장수의 갑옷과 투구, 오른쪽에 '울산의 임진왜란 유적' 안내판이 보인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조명연합군은 두 번의 울산성 전투에서 모두 실패했다. 그런데도 1차 울산성 전투에 관한 해설은 상대적으로 약간 길고, 2차 울산성 전투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간략하다. 1차 울산성 전투가 정유재란의 향후 전개 양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반면, 2차 전투는 종전 직전의 싸움이었던 관계로 의의가 그만 못하다는 평가가 그렇게 길이의 차이로 나타난 듯 여겨진다(관련기사 : 도요토미에게 선물로 보낸 울산동백, 어떤 꽃이길래).

그런데 (2차 울산성 전투 당시) '왜군은 아군 및 명나라 원군의 공격을 받아 100여 일을 겨루다가 밤을 타서 성을 불태우고 퇴각하였다'라는 해설문은 일본군이 마치 싸움 중에 야반도주를 한 것처럼 읽힌다.

1차 울산성 전투에서 거의 죽을 지경까지 몰렸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은 그 이후 정유재란의 전선을 확대하려는 기도를 포기한 채 줄곧 울산왜성과 인근 서생포왜성에만 머문다. 그렇다고 해서 가토가 2차 울산성 전투가 한창 진행되는 와중에 야음을 틈타 도망친 것은 아니다. 2차 울산성 전투의 경과를 조금 더 알아본다.

조명연합군, 1차전 실패 설욕 위해 9월 말 다시 울산왜성 공격

충의사 전시관에서 볼 수 있는 (왼쪽부터) 선무원종1등공신 정공청(鄭公淸)의 갑옷과 투구, 조선 무관의 전투복, 의병의 복장
 충의사 전시관에서 볼 수 있는 (왼쪽부터) 선무원종1등공신 정공청(鄭公淸)의 갑옷과 투구, 조선 무관의 전투복, 의병의 복장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2차 울산성 전투는 1598년 9월 22일부터 9월 25일까지 벌어졌다. 제독 마귀(麻貴)의 명군은 2만4천여 명, 별장 김응서(金應瑞)의 조선군은 5500여 명, 울산왜성의 가토 기요마사 군은 1만여 명, 인근 서생포왜성의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군은 5천 명 내외였다.

조명연합군이 3만여 명, 일본군이 1만5천 명 정도였으니 '열 번 수성(守城)은 쉬워도 한 번 공성(攻城)은 어렵다'는 병서의 격언대로라면 울산왜성이 함락될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1차 울산성 전투' 초반 때에는 5만여 조명연합군과 1만여 일본군이 대결했다.

경주에 머물고 있던 마귀는 9월 21일 부총병(副總兵) 해생(解生)을 선봉장으로 삼아 울산으로 출발했다. 명군은 일본왜성에서 서쪽으로 500m가량 떨어진 고학성산(지금의 충의사 자리)에 진을 치고 공격 준비에 들어갔다. 그 사이 조선군 별장 김응서는 온정(동래) 주둔 일본군을 격파, 후방의 걱정거리를 없앴다. 다음날인 9월 22일, 조명연합군은 울산왜성 공격을 개시했다.

울산성 전투 때 사용되었던 화살들
 울산성 전투 때 사용되었던 화살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연합군은 왜성의 목책을 불사르고 군량미를 불태우는 등 초반 전세를 우세하게 이끌었다. 그러나 빗발처럼 퍼부어대는 일본군의 조총 사격을 감당하지 못해 성 가까이에는 접근하지 못했다. 마귀는 거짓 퇴각하는 채 유인술을 써서 일본군을 성밖으로 끌어내려 했지만 군사의 수가 적은 것을 우려한 가토는 끝내 결전을 회피했다.

나흘 간에 걸친 거듭된 공격에도 실익이 없자 마귀는 9월 25일 모화(경주 외동)를 거쳐 경주성으로 들어간 다음, 거기서 군대를 수습했다. 그 사이 중로(中路)를 택해 남해 쪽으로 내려갔던 동일원(董一元) 군이 10월 1일 사천성 싸움에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군에게 대패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10월 6일, 마귀는 영천성까지 군대를 물렸다.

충의사 전시관에 가면 선무원종1등공신 박홍춘(朴弘春)이 전투에 썼던 칼(맨 위)과 선무원종2등공신 최진립(崔震立)이 사용한 칼(가운데) 등 전란의 생생한 현장을 되새기게 해주는 유물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충의사 전시관에 가면 선무원종1등공신 박홍춘(朴弘春)이 전투에 썼던 칼(맨 위)과 선무원종2등공신 최진립(崔震立)이 사용한 칼(가운데) 등 전란의 생생한 현장을 되새기게 해주는 유물들을 많이 볼 수 있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11월 18일, 포위가 풀렸는데도 가토는 울산왜성(蔚山倭城)에 불을 질렀다. 직접 설계했고, '자결할까' 하고 망설였을 만큼 궁지에 몰렸던 1차 전투 때에도 끝내 지켜내었던 울산왜성이다. 비록 적장이지만, 스스로 울산왜성을 불태워 없애는 그의 심정은 자못 애통했을 것이다.

가토는 1597년(선조 30) 11월 초, 신라 고성 학성(鶴城)을 무참히 파괴한 후 그 자리에 왜성을 쌓았다. 축성에 필요한 돌은 울산좌병영성과 울산읍성을 부수어서 옮겨왔다. 그렇게 하면 장차 조명연합군이 그 두 성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고, 학성 자리에는 일본군에게 더욱 유용한 새 성이 생겨나니 가토로서는 일석이조였다.

(왼쪽부터) 선무원종2등공신 부사용(副司勇) 김응진(金應辰)의 녹권(錄券), 김태허(金太虛)를 호분위(虎賁衛) 부호군(副護軍)에 임명하는 1599년 5월 11일 발행 사령장, 선무원종3등공신 수문장(守門將) 박대수(朴大壽)의 녹권
 (왼쪽부터) 선무원종2등공신 부사용(副司勇) 김응진(金應辰)의 녹권(錄券), 김태허(金太虛)를 호분위(虎賁衛) 부호군(副護軍)에 임명하는 1599년 5월 11일 발행 사령장, 선무원종3등공신 수문장(守門將) 박대수(朴大壽)의 녹권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임진왜란 중 가토는 도요토미로부터 다섯 차례에 걸쳐 큰 상을 받았다. 울산성은 경주, 한양, 황석산성(경남 함안), 함경도 회령(선조의 두 왕자 생포)과 더불어 그에게 큰 명예를 안겨준 전쟁터였다. 그런데도 가토는 울산왜성에 직접 불을 붙여야 했다. 어쩔 수 없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전쟁이 끝났던 것이다.

본환(本丸, 본성)의 동쪽문으로 성을 빠져 나온 가토는 산비탈을 타고 물가까지 내려왔다. 당시에는 바닷물이 지금의 학산공원 발 밑까지 출렁출렁 들어왔다('대동여지도'를 보면 김해도 바다에 닿아 있다. 지금 보는 김해평야는 없다. 김해평야는 조선 말기 이후 서낙동강에서 올라오는 흙을 모아 사람들이 만들어낸 인조 평야이다).

그래서 동문 아래에는 선입지(船入地, 선착장)가 설치되어 있었다. 가토는 배를 타고 부산으로 가려는 계획이었다. 그 무렵, 서생포왜성에 주둔하고 있던 구로다 나가마사도 일본으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싸고 있었다.

'울산 임란 의사 사적비' 비각(사진의 앞 부분 가운데에 보이는 비각)과 그 오른쪽 계단 위의 창의문, 왼쪽의 숭모당
 '울산 임란 의사 사적비' 비각(사진의 앞 부분 가운데에 보이는 비각)과 그 오른쪽 계단 위의 창의문, 왼쪽의 숭모당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충의사 자리가 울산성 싸움 당시 조명연합군의 본부 터이기는 해도, 조선군 또는 명군의 군사 시설 등이 경내에 남아 있지는 않다. 420년 이상의 기나긴 세월이 흐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이곳은 '임시' 본부였다. 종전 뒤 가설물(假設物)들이 곧장 치워졌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충의사 답사의 의의가 반감되는 것은 아니다. 충의사에 오르면 첫째, 420여 년 전 조명연합군 지휘부가 울산왜성을 내려다 본 것과 똑같은 시선으로, 지금, 학성공원을 바라볼 수 있다. 이곳만큼 생생한 역사적 현장감을 맛볼 수 있는 답사지도 별로 없을 것이다.

둘째, 목숨을 던져 왜적을 물리친 울산 지역 임진왜란 의사들이 남긴 칼, 화살, 옷, 투구, 갑옷, 교지, 문집 등 피 묻은 유물들을 볼 수 있다. 또, 여러 해설문을 통해 임진왜란 전체의 흐름과 울산 지역 전투 양상도 알게 된다. 따라서 충의사에서는 전시관을 꼼꼼하게 둘러보는 것이 중요하다.

임진왜란 당시 목숨을 바쳐 왜적과 싸운 울산 지역 의사(義士)들을 기리는 충의사 본전(本殿)
 임진왜란 당시 목숨을 바쳐 왜적과 싸운 울산 지역 의사(義士)들을 기리는 충의사 본전(本殿)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창의문, 전시관, 상충문을 거쳐 사당 안으로 들어선다. 울산 임란 의사 239분의 위패가 질서정연하게 다섯 줄로 모셔져 있다. 바짝 다가서서 앞을 보니 '蔚山 壬亂 義士 神位(울산 임란 의사 신위)' 여섯 글자가 새겨진 위패가 한가운데 놓여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바로 오른쪽에 모셔져 있는 위패의 주인이 '이름도 남기지 못한 의병'이다. '壬亂 義士 無名 諸公 神位(임란 의사 무명 제공 신위)' 열 자가 내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우인수는 논문 <울산 지역 임란 의병의 활동과 그 성격>에서 "의병에 관한 연구는 임진왜란 연구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저명한 의병장이나 의병 활동에 치중되어 있는 한계가 있었다"면서 "각 지역 단위로 이루어졌던 소규모 의병 집단과 저명하지 않던 의병장들의 활약들도 논의의 대상으로 포함되어질 때 임진왜란 의병에 대한 이해의 폭이 더욱 넓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향에 불을 붙이고 절을 올린다. 임진왜란 시대를 살았다면, 나도 이분들처럼 목숨을 포기할 수 있었을까? 특히 '이름도 남기지 못한(無名)' 수많은 순국 의병들처럼 그토록 의연하게 한 몸을 던질 수 있었을까? 고개를 들지 못하는 채로 나는 한참 동안 몸을 숙여 의사들의 넋을 기린다. 세 시간에 걸쳐 둘러보는 동안 충의사에는 인기척 하나 없고, 아무도 찾지 않는 사당 안으로는 차가운 겨울바람이 '휙휙' 스치고 지나간다.

충의사 사당의 위패들. 가운데 '울산 임란 의사 신위' 위패가 있고, 그 바로 오른쪽에 '무명 의사 제공 신위' 위패가 모셔져 있다.
 충의사 사당의 위패들. 가운데 '울산 임란 의사 신위' 위패가 있고, 그 바로 오른쪽에 '무명 의사 제공 신위' 위패가 모셔져 있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충의사 전경(안내도)
 충의사 전경(안내도)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태그:#울산왜성, #학성공원, #충의사, #임진왜란, #정유재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