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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스커플, 'Jamie&Scott'의 하루하루 이야기입니다. 미국인 남편과 함께 버지니아주 어딘가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고 있어요. 달달한 신혼 이야기도, 새로이 정착하는 이방인으로서의 이야기도 들려드릴게요. 생기 있게 살고 용기 있게 사랑하고자 노력하는 저희 둘의 날들을 지켜봐 주세요! - 기자 말

빨간 립스틱들
 빨간 립스틱들
ⓒ LariKo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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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오고 나서 한국에선 한 번도 바르지 않았던 새빨간색 립스틱을 바르기 시작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한국에서 매일 하던 눈 화장을 하기가 귀찮아서다. 그냥 비비크림만 바른 얼굴로 다니자니 그렇지 않아도 이목구비 뚜렷한 이런 외국인들 사이에서 너무 희미해 보이는 느낌이라 입술에 포인트를 주고자 함이었다.

하지만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었으니, 그건 '쎄' 보이고 싶어서다. 나는 아시안, 특히 한국인이다보니 자연스레 몸에 배어있는 '예의', '예절'이라는 게 있다. 또 어려서부터 종가집 딸래미답게 부모님께 항상 '예의 바르게 행동해야한다', '먼저 양보하고 져주는 게 이기는 것이다'라는 얘길 듣고 자라 그런 것에 예민한 편이다.

그래도 대학에 들어가고 나이 들면서 적어도 내 것은 챙길 줄 아는 성격으로 바뀌었고, 미국에 와서 살다보니 한국에서 보다 예의, 예절 같은 것에 덜 신경을 쓰며 지내고 있다.

하지만 시댁(격 없고 친구같이 좋은 시부모님이지만) 가까이에 사는 데다 자주 만나니 거창한 예절까진 아니라도, 자연스러운 양보나 배려같이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려 노력하는 탓에! 결국 이 곳 사람들과 비교해서 나는 굉장히 순해 보이는 것이다. 그냥 순해 보이기만 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너무 만만하게 보이기까지 하는 것이 문제였다.

미국에 온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남편 스캇의 동네 친구들과 다 같이 어디 놀러가 술을 마셨던 적이 있었다. 스캇 친구들이라 해봤자 무리들 중에 스캇이 제일 나이가 많고, 동갑이 두어 명. 나머지 열댓 명의 친구들은 다 20대 초반의 어린 애들이다. 그래서 그런지 가끔 보면 철없기도 하고, 미성숙해 보이는 느낌도 들었지만 나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 이상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그날, 다들 술을 좀 마셔 알딸딸해있을 때 어떤 여자애가 자기 남자친구와 대화하면서 나와 스캇을 가리키며 놀리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 여자애는 내가 자길 못 보고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나는 분명히 봤다. 사실 지금 같았으면 당장 걔한테 가서 "너 방금 뭐라고 했니? 내 앞에서 다시 한번 말해볼래?"라고 했겠지만 그때는 미국에 온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또 어쨌든 쟤들도 남편 친구인데 나쁘게 대해서 좋을 것 없다는 생각으로 그냥 넘어갔다.

하지만 나도 성인군자는 못 되는지라 그 이후로 그 여자애와 그 남자친구를 볼 때마다 기분이 나쁜 거다. 이것들이 내가 아시아에서 방금 왔다고 무시하나, 내가 맨날 웃으며 상대하니 만만하게 보이나, 내가 지들처럼 욕 섞어가며 개념 없이 남 뒷말하고 떠드는 게 싫어 입 다물고 있었던 건데 내가 생각도 없는 사람같나... 나도 한국에선 한가닥 했는데.

아시안이라고 무시하나? 그래서 바른 립스틱

그래서 나도 그날부터 (굉장히 유치하지만) 내 나름의 대응을 했다. 굳이 먼저 인사 안 하기, 괜히 미국 스타일로 밝은 척 "Hey~ how are you doing? you look so nice today~" 같은 입발린 소리 안 하기, 내가 먼저 말 걸지 않기, 선한 눈빛 같은 건 내버려두기, 형식적으로만 대하기.

그렇게 그 이후로 몇 번 마주칠 때 마다 저렇게 행동하니까, 얘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바뀌는 게 보였다. 나를 볼 때마다 내 눈치를 보고, 먼저 다가와서 인사하고. 뭔가 자세히 형용하긴 어렵지만 확실히 달라졌다. 근데 자꾸 내 눈치를 보는 모습이 미안하기도 하고, 부질없이 느껴지기도 해서 나는 금방 저 유치한 대응을 그만두고 말았다.

하지만 나는 하나를 배웠다. 쉽게 보이면 그들은 나를 쉽게 대한다는 것을. 이 일 말고도 두어 번 비슷한 일들이 있었다. 하지만 운 좋게도 미국에 온 지 6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아직 심한 인종차별이나 무시 따위를 겪지는 않았다. 미국 사람들은 대부분 기본적으로 나이스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겉으로는.

하지만 생각하던대 나는 만만하게 보이기 딱 좋다. 아시아인이고, 내 성격이 워낙 '좋은 게 좋은 거'라서 헤헤 거리고 다니는 데다, 생긴 것도 희미하게 생겼다. 또 몸에 배어 있는 한국적인 예의까지 나름 이유는 충분하다.

그래서 어느 날 문득 무슨 바람이 들어 화장품 가게에 가서 새빨간색 립스틱을 구매했다.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이 정도 새빨간색 립스틱은. 한국에서는 너무 튀어서 평생 못 발랐을 색깔. 여기서는 거의 매일 바르고 다닌다. 심지어 마트에서 2명의 직원들에게 립스틱이 너무 예쁘다는 소리도 들었다. 미용의 용도로도 좋은 선택이었다.

뭐 어쨌든, 저 립스틱의 진짜 효과라 하면 내 내적 심리에 영향을 준다는 것. 새빨간색 립스틱 하나로 난 굉장히 '쎈' 언니가 된 느낌이다. 백인, 흑인 천지인 이곳에서 '나도 어디서 꿇리진 않어!' 하는 느낌으로 당당하게 다닐 수 있다는 것.

사실 어쩌면 이 모든 건 내 자격지심에서 비롯된 걸 수도 있다. 뭐랄까, 나름 한국에서 잘 먹고 잘 살다가 갑자기 건너 온 이곳에서, 갑자기 마이너리티가 되어 생긴 자격지심이랄까.

막상 남들은 별로 신경도 안 쓰는데 혼자 '만만하게 보이면 안돼!!!', '너무 쉽게 보이면 안돼!!!' 하며 스트레스 받다가 새빨간색 립스틱이라는 아이템을 장착한 뒤 많은 게 달라졌다. 그래도 여전히 내 성격은 똑같고, 아시아인 건 변함 없는데 말이다.

의도가 어찌됐든 나는 마음에 든다. 어쨌든 살아남아야 하는 이곳, '타지'라는 전쟁터에서 나를 지켜주는 든든한 창이자 방패를 구했다. 바로 새빨간색 립스틱을.

○ 편집ㅣ최은경 기자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이자민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 <오늘은 오늘생각>(http://jaykim237.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쎈언니, #빨간립스틱, #인종차별, #미국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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