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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마다 뜨뜻한 아침밥을 차려준다는 공통점이 있기는 해도 게스트하우스 사장과 엄마는 확실히 달랐다. 엄마는 그랬다. 밤새 미드를 보느라 잠을 자지 못해 퀭해진 눈으로 놀러 나간다고 하면, 엄마는 하늘이 무너진 듯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피곤하면 집에서 쉬라"고 했다. 물론 난 졸릴 뿐 피곤하진 않았다. 하지만 괜히 조금 피곤한 표정을 지으며 "괜찮아"라고 대답한 후 놀러 나가곤 했다.

하지만 게스트하우스 사장은 엄마처럼 나의 피곤함을 알아채지 못했다. 시무룩하게 밥을 먹고 있어도 빙긋 웃음만 지어주었다. 다리를 질질 끌며 문을 나서도 그저 역시 빙긋 웃어줄 뿐이었다. 그래, 엄한 곳에서 엄마의 사랑을 기대할 순 없는 거였다. 그래도 나는 "제가 어제부터 몸이 좀 안 좋은데, 오늘은 안 나가도 될까요?"라며 사장님의 사랑을 갈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규칙은 규칙이었다.

이곳은 지금까지 묵은 게스트하우스 중 가장 강력한 규칙을 내걸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는 무조건 퇴실해야 했다. 나처럼 연박하는 게스트라도 예외는 없었다. 이 외에도 게스트하우스 곳곳에, 방 내부 곳곳에, 다양한 규칙들이 새겨져 있었다.

이런 규칙들 덕분에 3박을 묵는 동안 쾌적하고 조용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이끌고 문을 나서자니 사장님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싶었다. 좀 눕게 해달라며 떼를 쓰고 싶었다. 하지만 규칙은 규칙이었다.

마을 중앙에 놓여있는 벤치들.
 마을 중앙에 놓여있는 벤치들.
ⓒ 황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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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 정각에 문을 나섰다. 며칠 있었다고 이제 종달리의 좁은 골목들이 눈에 들어온다. 각 집 앞에 붙은 주소지 표시 덕택에 길을 잃어도 쉽게 다시 방향을 찾을 수 있었다. 숫자로 된 주소를 보며 지도 어플로 길을 찾았다. '천천히 걷자'는 생각을 굳이 하지 않아도 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느렸다. 느리게 느리게 골목 여기저기를 기웃거려 보았다.

제주는 좋으나 제주 개는 좀...

제주에 와서 가장 신경이 쓰였던 것 중 하나는 바로 '개'다. 개가 너무 많기도 하고, 또 많은 개들이 너무 무섭게 짖는다. 아무 생각 없이 골목길에 들어섰다 공격적으로 짖어대는 개에 놀라 뒷걸음을 치기도 한다. 그러다가 다른 골목에 들어서면 또 다른 개가 나를 째려보며 으르렁대는 식이다.

언젠가는 길을 달리는데 갑자기 개가 뒤에서 튀어나왔다. 개가 엉덩이에서 약 1인치 떨어진 지점에 주둥이를 들이밀고 이빨을 드러내며 목청껏 짖어대는 게 아닌가. '악' 소리를 내지도 못할 만큼 놀랐다. 겁을 잔뜩 집어먹은 채 한동안 짖는 소리를 들으며 우두커니 서 있어야 했다.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눈을 꼭 감고 빠른 걸음으로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 

어디 그때뿐일까. 전날도 성산 일출봉에서 섭지코지로 걸어가는 도중 개를 만났다. 해안가를 걷는데 저기 멀리 30m 전방에서 개 한 마리가 나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봐도 개가 목표물로 삼은 것이 나란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이번에는 "악악악" 소리를 질러대며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모든 걸 내려놓고 개를 기다렸다. 개는 내 앞에 서더니 역시나 미친 듯 짖어대기 시작했다. 그렇게 10초가, 아니 10년이 흘렀을까. 개 주인이란 사람이 오더니 여유롭게 개를 자기 품으로 불러들였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라는 게 "그렇게 자극하면 안 돼요"였다. 공포에 질린 건 나인데 개를 자극하지 말라니. 살면서 처음으로 주먹이 올라갈 정도의 분노를 느꼈다. 하지만 개가 무서워 얼른 그곳을 빠져나왔다. 제주 여행 내내 개가 물지는 않을까 마음을 졸이며 다녀야 했다.

문이 닫혀 있던 가게.
 문이 닫혀 있던 가게.
ⓒ 황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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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시선에 포착되지 않게 최대한 조심조심 골목길을 걸어 다녔다. 그러다가 목이 말라 골목길 중간쯤에 자리한 슈퍼마켓 여닫이문을 열었다. 그런데 잠겨있는 게 아닌가. 유리문에 얼굴을 가져다 대고 가게 안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지나가던 할머니가 가게 옆을 가리키며 말씀해주신다.

"이쪽으로 들어가면 가게로 통하는 문이 있어. 그리로 들어가서 아줌마를 부르면 돼."
"막... 들어가도 돼요?"
"왜 안돼. 가서 불러야 나오지."

"네"하고 대답하며 할머니가 가리킨 곳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고 아줌마를 불렀다. 그러자 정말 가게 사장님이 얼굴을 내밀고 미안한 표정으로 달려 나온다. 다시 앞으로 돌아 나오니 유리문 앞에 아이 두 명이 얼굴을 대고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사장님이 곧 문을 열어 주었다. 우리 셋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급히 가게로 들어갔다. 각자 먹고 싶은 걸 기분 좋게 골랐다.

시원한 음료수를 마시자 조금은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해야만 하는 걸 하는 심정으로 왼쪽길로 들어섰다. 그쪽으로 가면 지미봉 입구가 있다.

동화 속을 걷는 듯한 '지미봉' 오르는 길

지미봉 입구.
 지미봉 입구.
ⓒ 황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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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봉 오르는 길.
 지미봉 오르는 길.
ⓒ 황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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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봉은 구좌읍 종달리에 있는 오름이다. 정상에서 보면 성산 일출봉, 우도, 종달 항, 그리고 바다를 한눈에 볼 수 있어 눈이 즐겁다. 올레 21일 코스에 포함돼 올레꾼들도 지미봉에 자주 간다. 지미봉은 흔히 산을 그릴 때 떠올리는 딱 그 모양이다.

입구에 도착하니 나이 지긋한 남녀 올레꾼이 지미봉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부부로 보이는 두 사람 모두 잔잔한 미소를 보내준다. 나도 그에 응답하며 지미봉을 오르기 시작했다.

'와!'

지미봉은 지금까지 오른 오름과 매우 달랐다. 아부 오름과 용눈이 오름은 오르는 도중에도 눈앞이 시원하게 탁 트여있지 않았나. 그래서 오름의 전체적인 윤곽과 그 주위의 제주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지미봉은 반대였다. 지미봉을 오르는 동안 보이는 건 좁은 길 하나와 그 길을 양옆에서 덮는 푸른 풀 그리고 나무뿐이었다. 시선이 탁 트이는 대신 한 곳으로 확 모이는 느낌. 풀과 나무들에 가려져 몇 미터 앞에 무엇이 있는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올라갈수록 풀과 나무의 크기는 더 커졌고, 마치 숲 속에 사는 누군가의 초청이라도 받은 듯 기분이 들떴다. 동화에 나오는 숲 속 세상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면 바로 이런 길일 것 같았다.

더운 날인데도 불구하고 초록빛이 온통 시선을 간질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올라가는 길이 그렇게 덥지만은 않았다. 얼마나 올라갔을까. 십 분, 이십 분쯤 지났을까. 어느새 정상에 올라설 수 있었다.

왼쪽에 솟아있는 것이 우도, 오른쪽에 솟아있는 것이 성산 일출봉.
 왼쪽에 솟아있는 것이 우도, 오른쪽에 솟아있는 것이 성산 일출봉.
ⓒ 황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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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앞에 바다가 보였다. 지미봉 바로 앞쪽으로는 구역이 나누어진 밭이 넓게 펼쳐져 있었고 그 앞으로는 종달 항이 보였다. 바다를 건너 저쪽 왼편으로는 우도가, 오른편으로는 성산 일출봉이 있다. 마치 지미봉과 함께 삼각형의 꼭짓점을 이루듯 낮은 산처럼 솟아있었다. 성산 항과 종달리 항에서 출발해 우도로 향하는 배 두 척이 바다 한가운데를 향해 함께 나아가고 있었다.

이번에는 바다를 뒤에 두고 반대편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고즈넉한 전경이 펼쳐져 있었다. 지평선에 닿는 오른쪽 끝엔 며칠 전 걸어서 지나쳤던 행원리 마을의 풍차가 돌고 있었다. 그보다 조금 더 먼 왼쪽 어딘가의 마을에서도 작고 희미한 풍차가 연신 바람의 에너지를 우리에게 돌려주고 있었다. 고개를 더 왼쪽으로 돌리니 크고 작은 오름들이 시선 닿는 곳 여기저기에 봉긋하게 솟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떻게 보면 크게 눈에 띄지 않는 전경이었다. 하지만 오래도록 보고 있으니 곳곳의 미세한 개성들이 눈에 들어왔다. 또 더 계속 보고 있으니 그 모습에 정이 들었다. 그게 무엇이든 이렇듯 오래 보고 있으면 정이 드는가보다 싶었다. 정의 힘은 강했다. 그 어느 빼어난 절경이 아닌 지미봉 정상 바다의 배경을 어느샌가 나만의 아름다운 절경 1위로 선정하고 있었다.

기운도 없고 내려가기도 싫었다. 벤치에 앉아 가방에서 과자를 하나 꺼내 들었다. 과자를 다 먹으면 내려가기로 마음을 먹고서. 연인인 듯 보이는 남녀가 올라와 내가 과자를 먹는 모습을 흘긋 보더니 연신 사진기 셔터를 눌러댔다. 당연히 그들 사진의 배경은 바다와 우도, 성산 일출봉이었다. 나는 연인에게 그 반대편도 한번 보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꾹 참고 과자에 집중했다. 이후 몇 커플을 더 보내고 나서야 과자를 다 먹었다.

숲 속 세상에서 내려오자 다시 피곤함이 몰려왔다. 그래도 오전보다는 조금은 나아진 것 같았다. 어깨를 빙빙 돌리며 몸을 풀어보았다. 다시 종달리 골목길로 들어섰다. 문을 활짝 열어놓고 고스톱을 치는 할머니들을 구경했다.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각자의 집에 서서 담소를 나누는 할머니들을 지나쳤다. 이틀 전 들렀던 자그마한 분식집을 향해 걸었다.

종달리, 지금 이대로 남았으면

공짜 비빔국수와 옆 가게에서 사온 맥주.
 공짜 비빔국수와 옆 가게에서 사온 맥주.
ⓒ 황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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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분식집에 찾아간 날, 마치 집에 놀러 온 손님 같은 환대를 받았다. 사장님은 마을 주민 같이 친근한 분위기였다. 그런데 내가 자리에 앉자 주문하지도 않은 비빔국수를 하나 말아 주는 게 아닌가. '저 이거 시키지 않았는데요?'라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본인이 먹을 건데 너무 많이 말았다며 그냥 먹으란다.

비빔국수를 보니 맥주 한잔이 절실했다. 조심스레 "혹시, 맥주 있나요?" 하고 물었고, 사장님은 웃으며 "없어요"라고 대답했다. 나는 절실한 마음에 더 조심스레 "그럼 혹시 옆 가게에서 하나 사와도 돼요?"하고 다시 물었다. 사장님이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 앉아 있던 동네 주민이 "왜 안돼. 어서 사와" 했다. 그렇게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도 전에 비빔국수랑 맥주로 배를 든든히 채워 놓았다. 물론, 내가 주문한 음식도 말끔히 해치웠다.

분식집으로 들어서니 사장님이 얼굴을 알아보고 살짝 미소를 지어준다. 5, 6평 남짓의 아담한 분식집. "해물라면 하나 주세요"라고 말하며 조그마한 분식집 여기저기를 열심히 눈에 담았다.

새롭고 화려하고 높고 큰 것. 이런 가치들에 마음을 두지 않으려 매번 노력했다. 하지만 그래도 언제나 이런 가치들 앞에선 나도 모르게 눈이 돌아가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내 안에선 갈등이 일었다. 뒤에 놓고 온 낡고 투박하고 낮고 작은 것들이 눈에 밟혔다. 나 역시 그런 것들에 속한 사람이지 않은가. 나는 매일 일어날 때마다 새로워질 수 없는 사람이었고, 화려함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이런 것이 자연스러운 상태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꾸 눈은 부자연스럽게 치장된 허깨비들에게 쏠리고 있었다.

제주 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후 좋았던 점이 있다. 눈이 좋아하는 것들이 나와 갈등을 일으키지 않게 됐다는 점이다. 높고 화려한 것보단 낮고 푸른 것에 더 눈이 간다. 충동적으로 충동적으로 시선을 휘두르는 대신 천천히 바라봐야 할 것을 세심히 찾아보게 된다. 능력이 생긴 것이다. 내가 직접 좋아하는 것을 찾아 눈에 꾹 담아 넣을 수 있는 능력.

맥주 사러 갔던 가게.
 맥주 사러 갔던 가게.
ⓒ 황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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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물 라면을 먹고 나온 뒤 종달리 마을의 여기저기를 찬찬히 둘러보면서 생긴 능력이었다. 가정집보다도 작은 문을 달고 있는 분식집, 러닝셔츠를 입은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슈퍼마켓, 앞에 서 있는 풍성한 나무와 그 아래의 벤치들. 골목골목에 숨어 있는 정갈한 카페와 처음 보는 이방인인 내게 고개를 끄덕이며 눈인사를 해주던 마을 어르신들.

나는 종달리를 떠나오며 이곳이 언제나 지금의 모습이길 바랐다. 우리가 진정 좋아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라는 걸 다시금 깨닫게 해주는 마지막 보루가 되어주길 바랐다.

아무리 좋은 종달리여도 아침부터 쌓여온 피로감을 씻어주진 못했다. 오후 5시가 되자마자 게스트하우스로 기어들어 갔다. 그리고 씻고 바로 침대에 누웠다. 잠은 오지 않았지만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덧붙이는 글 | 2015년 5월 26일부터 6월 24일까지, 30일간의 제주 여행 연재글입니다.

개인블로그에도 중복게재합니다.



태그:#제주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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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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