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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전화 소리에 눈이 떠졌다. 오전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확인해 보니 친구가 보낸 사진 몇 장이 저 멀리 프랑스에서 날아오고 있었다. 친구는 '니체가 산책한 길'이라는 길을 걷고 있다고 했다. 걷다 보니 내 생각이 났다고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던 당시, 개인이 추구할 수 있는 가장 '완성된 형태의 자유'를 만난 것 같았다. 그래서 몹시 기뻤다. 기쁜 마음에 한동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이런 나를 봐왔던 친구였다. 어쩌면 나를 위해 그 길을 걷고 있는지는 몰랐다. 그 마음이 전해져 와서 잠이 확 달아났다.

친구 덕분에 자유와 함께 아침을 맞이했다. 오늘은 제주에 온 지 11일째 되는 날이다. 창밖을 보니 비가 내리고 있다. 내가 묵고 있는 1인실 창밖으로는 지미봉 일부분이 보였다. 창에 바짝 붙어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지미봉의 전체적인 윤곽을 가늠해 보았다. 하지만 작은 창으로는 전체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나갈 채비를 서둘렀다. 창을 통해서가 아니라 내 눈으로 지미봉을, 제주를 보기 위해.

밖으로 나오자 지미봉의 전체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원래는 오늘 지미봉을 오르기로 했지만, 비가 오니 계획을 바꾸기로 했다. 해안도로를 따라 올레 1코스를 걷다가 가능하면 섭지코지까지 가보자.

더는 낯설지 않은 제주

어두운 제주의 아침. 비바람이 거세다 .
 어두운 제주의 아침. 비바람이 거세다 .
ⓒ 황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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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하늘엔 한 치의 틈도 없이 묵직한 구름이 가득 차 있었다. 구름 아래의 모든 것은 회색빛을 띠고 있었다. 비바람도 거셌고 분위기도 을씨년스러웠다. 그래서인지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이런 날엔 올레꾼들도 잠시 멈춰 서서 내일을 기약하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오늘 걷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하며 계속 걸었다. 비의 장막이 평소보다 더 혼자 있는 기분으로 만들어 주어서일까. 발걸음이 그 어느 날보다 더 가벼웠다. 처음 걷는 길이었지만 왠지 익숙한 길을 걷는 것만 같았다. 이러한 익숙함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마음속 한 공간에 제주가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 같았다. 내게 제주는 더는 낯선 여행지가 아니었다.

거센 바람에 우산이 뒤집히지 않게 이쪽저쪽으로 기울여가며 사십 분쯤 걸었을까.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떤 환희의 감정이 느껴졌다. 벅참과 뿌듯함. 이어서 밀려오는 해방감. 그리고 자유로운 나. 이날 자유가 감정의 형태로도 느껴질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또한 자유를 느끼면 몹시 감격스러워 눈물이 흐른다는 것도.

눈물을 찔찔 짜며 걷는데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다행스러웠다. 더 눈물이 났다. 누군가 옆에 있었다면 사람들은 아침부터 못 볼 꼴을 봤을 것이다. 내 가슴에 들어찬 자유는 보이지 않고, 눈물만 보게 될 테니까 말이다.

눈물은 이내 멈췄다. 그리고 다시 바람과 싸움을 벌였다. 자유의 감정도 점점 더 거세지는 바람 앞에서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몇 번이나 우산이 뒤집힐 뻔한 상황을 넘기며 두 시간 만에 성산 일출봉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잠시 쉬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비가 그치면 다시 걷기로 했다. 어제 들렀던 커피숍의 같은 자리에 앉아 뜨거운 커피를 마셨다.

우산을 쓰고 성산 일출봉을 오르는 사람들이 보였다. 우산은 분명 거추장스러울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오르는 것보다는 빗속에서 오르는 게 훨씬 더 수월할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빗줄기는 점점 얇아졌다. 성산 일출봉을 오르는 사람 중 몇몇은 우산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차츰차츰 우산을 쓰지 않고 오르는 사람이 늘어가더니 한순간에 모든 사람이 우산을 접어들었다. 눈앞에서 우산 쓴 사람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보고 커피숍을 나왔다. 마지막으로 다시 올려다 본 성산 일출봉은 넘치는 박력으로 제주를 보호하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뒤에는 성산 일출봉을, 옆에는 바다를 두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저 앞 어딘가에 있을 섭지코지를 향해서. 태양은 아직 구름 뒤에 숨어있었다. 온종일 그렇게 숨어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걷기에 그만인 날씨를 음미하며 계속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렇게 얼마쯤 걸었을까. 왼쪽 도로 옆 벽을 따라 누군가가 그려놓은 꽃잎들이 아스라이 날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남겨진 사람들이 떠난 사람들의 영면을 바라며 흩뿌린 꽃잎들이었다. 당시 지나던 곳은 성산읍에 있는 4.3 유적지 터진목이었다.

그때 제주에선 무슨 일이 있었나

성산포 터진목에 대한 설명.
 성산포 터진목에 대한 설명.
ⓒ 황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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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사람들이 떠난 사람들에게 흩뿌린 꽃잎들.
 남겨진 사람들이 떠난 사람들에게 흩뿌린 꽃잎들.
ⓒ 황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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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꽃잎처럼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은 꽃잎처럼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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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사건'. 나는 제주에 오기 전 4.3 사건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지슬>이라는 영화가 이 사건을 다룬다는 것 외에 또 무엇을 알고 있었을까. 고통이 있었다는 것. 슬픔이 있었다는 것. 죽음이 있었다는 것. 이렇게 어렴풋한 이미지로만 이 사건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제주에 오고 나서 몇 번 4.3 사건에 대해 들을 기회가 있었고, 이번처럼 사건의 현장을 지나게 된 적도 있었다. 질문을 통해, 스마트폰 검색을 통해 그때의 일을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었다. 그러다 터진목을 지나게 된 거였다. 궁금했다. 그렇다면 그때, 제주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당시 제주에서는 학살이 벌어졌다. 그 학살의 양쪽 편에는 공산주의자를 토벌하겠다는 토벌대와 폭압적인 경찰과 미 군정, 단독정부를 반대하던 무장대가 있었다. 그리고 슬프게도, 그사이에 너른 들판에는 물일하고 밭일하던 제주도 사람들이 있었다. 이념 전쟁 속에서 허망하게 죽은 제주도 사람은 3만 명이나 되었다.

토벌대의 진압 도중 마을이 통째로 사라지기도 했다. 수십 명, 수백 명이 되는 마을 주민들이 한꺼번에 학살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사라진 마을을 사람들은 '잃어버린 마을'이라 불렀다. 제주를 도보로 여행하다 보면 '잃어버린 마을'이란 표지판을 곳곳에서 만나게 된다. 제주에서 태어난 허영선 시인은 그의 책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에서 이렇게 말했다.

알겠느냐. 초토화 속의 그 학살극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겠느냐. 다만 말할 수 있는 것만 말할 뿐이다. 그날 이후, 마을의 봄은 사라졌지. 팽나무 그늘 아래 수백 년 모여 정을 나누던 이웃 삼촌, 한 마을 한가족이었다. 목축과 농사를 천직으로 삼던 사람들, 박한 농사일도 서로서로 '수놀음(품앗이)'하며 살던 오래된 마을들은 다시는 찾을 수 없는 영원한 사라진 마을이 되었구나. -본문 중에서

1948년 4월 3일, 한라산과 오름이 불에 타올랐다. 무장봉기의 신호탄이었다. 이에 당황한 토벌대는 즉각 민중을 탄압했다. 무장대를 축출한다는 명목하에 마을 주민들을 죽여나갔다. 사람들은 밭일하다가 총에 맞아 죽었고, 무서워 도망가려다 붙잡혀 맞아 죽었다.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었다. 1948년 10월 17일, 해안선부터 5km 이외의 지점에 있는 자는 모두 폭도로 규정해 총살한다는 발표문이 나왔다. 1948년 11월 17일, 정부는 제주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느닷없이 폭도로 규정된 중산간 마을 주민들은 겁에 질려 몸을 바짝 숙인 채 살기 위해 산으로, 동굴로 도망쳐 들어갔다. <지슬>에 나오는 순박한 주민들도 그렇게 동광리에 있는 '큰넓궤' 동굴로 숨어들었다. 그러다가 토벌대에 의해 죽음을 맞게 된 거였다. 허영선 시인은 책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군경 토벌대는 무장대의 피난처와 물자 공급원을 제거한다는 구실로 중산간 마을을 모두 불바다로 만들어버렸다.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상했다. 온 가족이 몰살당한 집안이 생겨나고, 눈앞에서 희생되는 부모를 지켜보는 아이들, 어린 것의 죽음을 앞세운 부모들도 있었다. -본문 중에서

민간인 학살을 자행하던 토벌대의 잔인한 진압은 7년간이나 이어졌다. 1954년이 되어서야 제주도민들은 서슬 퍼런 공포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 제주도민들은 '연좌제'라는 또 다른 공포를 맞닥뜨려야 했다. 억울하게 폭도 낙인이 찍혀 죽어간 사람들의 가족들은 '공산주의자의 가족'이라는 오명을 쉽게 떨쳐내지 못했다.

2003년이 되어서야 대한민국 정부는 제주도를 향해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그리고 제주도를 '평화의 섬'으로 선포했다. 이어 2014년 정부는 4월 3일을 제주 4.3 희생자 추념일로 지정한다.

이제야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3만 명의 영혼이 마음 편히 하늘로 올라갈 수 있게 된 걸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저 남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건 '당신들이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라고 마음속으로라도 외쳐주는 것뿐일 테다. 그리고 이 섬을 계속 '평화의 섬'으로 지키는 것도 우리의 몫이다.

성산 일출봉의 아름다운 자태

4.3 터진목 유적지에서 바라본 성산 일출봉.
 4.3 터진목 유적지에서 바라본 성산 일출봉.
ⓒ 황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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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을 따라 흩날리던 꽃잎을 좇아 터진목 안으로 들어갔다. 왼편으로는 방금 떠나온 성산 일출봉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 앞으로는 광치기 해변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성산 일출봉은 멀리서도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비석에 새겨진 강중훈 시인의 시 <섬의 우수>를 읽어 보았다.

시를 읽으며 자연의 역사가 일구어 놓은 절경을 느꼈다. 이렇게 아름다움 풍경 앞에서 학살이 벌어졌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절경을 눈앞에 두고도 아름답지 못한 역사를 남겨야 했던 사람들. 그들의 어두운 눈이 바라보던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섭지코지로 발걸음을 옮기는 중에도 복잡해진 마음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래도 계속 걷고 또 걷다가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할 즈음에는 어느 정도 마음을 회복할 수 있었다. 아침부터 비바람에 녹초가 된 터라 몸은 얼른 침대로 가서 눕자고 아우성이었다. 하지만 마음은 나더러 더 걸어가라며 응원을 해주었다. 그렇게 종달항까지 나아갔다.

그리고 종달항 등대에서 주위가 어두워질 때까지 앉아있었다. 비릿한 바닷냄새를 맡으며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러자 마음이 아침처럼 다시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바다의 넓은 가슴이 다시 가벼운 마음으로 여행할 수 있도록 나를 이끌어주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2015년 5월 26일부터 6월 24일까지, 30일간의 제주 여행 연재글입니다.

개인블로그에도 중복게재합니다.



태그:#제주여행 , #4.3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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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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