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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형태이든, 여행의 가장 큰 매력은 의외성이 아닐까요? 아니 어쩌면 일상을 벗어나 낯선 곳으로 떠난다는 의외적인 행위, 그 자체가 여행의 본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돌이켜보면, 주말마다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녔던 청춘 시절의 '문화유산 답사'도, 느닷없이 불어왔던 의외의 열병이었던 셈입니다. 그 청춘 시절, 몰라서, 관심이 없어서, 무엇보다 먹고 살기 바빠서 외면해 왔던 소박하고 정겨운 우리의 문화유산들을 하나하나 만나는 것이 어찌 그리 반갑던지요.

유홍준 교수의 말처럼 몰라서 느끼지 못했던 우리 문화유산의 아름다움에 감탄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또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이탈리아에 있습니다. 그 사이의 구구절절한 삶의 궤적을 나열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리고 이 여행이 끝나면 곧바로 그 구구절절한 삶의 궤적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지만, 나의 이번 '이탈리아 미술 기행'은 오래된 꿈의 실현이며 불과 몇 달 전까진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의외적인 행보입니다.

그래서, 정말 많이 준비했습니다. 미술 기행이라는 주제에 걸맞게 그 청춘 시절 공부했던 서양미술사 자료들을 다시 펼쳤습니다. 여행 선배들의 도움을 받아 하루하루의 계획과 경로도 꼼꼼하게 짰죠. 시간표에 맞게 대부분의 교통편도 예약을 했고, 반드시 봐야할 곳들도 대부분 예매해 두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철저하게 준비를 해도 어느 순간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벌어지는 것이 여행인가 봅니다.

우연히 찾게 된 '중세 도시' 산 지미냐노

공공노조의 파업으로 오늘 일정이었던, '우피치 미술관'이 휴관한다는 공고문입니다.
▲ 문 닫힌 우피치 공공노조의 파업으로 오늘 일정이었던, '우피치 미술관'이 휴관한다는 공고문입니다.
ⓒ 박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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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전 밤, 그날의 여정을 정리하려고 노트북을 켜 보니 영어로 된 메일이 한 통 와 있었습니다. 발신자는 주요 박물관, 미술관들의 입장권을 예약해 두었던 웹 사이트. 떠듬떠듬 해석해보니, 내용인즉, 이탈리아 공공노조의 파업 때문에 오늘 아침 첫 시간으로 예약해 두었던 '우피치 미술관'이 문을 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침 일찍 '우피치 미술관'에 가보고 문을 열지 않았으면 자기들에게 메일을 보내달라는 것입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호텔 프런트 직원에게 공공노조 파업에 대해 알고 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직원은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인지 더 묻지도 않았는데 오늘 '우피치 미술관'과 다른 박물관들 모두 문을 열지 않을 거라고 합니다.

원래 '우피치 미술관'은 월요일이 쉬는 날입니다. 거기다가 여행객이 많은 토요일, 일요일까지 제외하고 나면 '우피치 미술관' 관람 계획은 정말 잘 짜야 합니다. 나는 애초에 피렌체에서 7박 8일의 여정이었기 때문에 선택지가 많았는데 하필 오늘이 파업이라니 난감할 따름입니다. 그런 내 심정을 알아차린 걸까요? 직원은 마치 자기 일처럼 미안해합니다.

"미안하다. 당신 같은 여행자들은 파업 때문에 불편하겠지만, 우리에게는 중요한 일이다. 이해해 달라."

그렇습니다. 아무리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여행지라 해도 이곳의 주인은 이탈리아인들입니다. 여행자들은 그들의 삶의 공간을 잠시 빌린 이용자들일 뿐이지요. 그래서 다시 웃으며 물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직원의 대답이 걸작입니다.

"당신도 유니언(공공 노조)이냐?"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유니언이다."

더 이상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파업이라면 모두 불법적인 것이고 시민의 불편함을 유발하는 이기적 행동으로 보도되는 나라에서 온 나로서는, 자기 일이 아님에도 공공노조의 파업을 당연시하고 여행객에게 양해를 구하는 호텔 직원의 인식이 오히려 부러울 뿐이었습니다.

직원에게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밝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평상시보다 더 일찍 호텔을 나서 '우피치 미술관'으로 향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파업 때문에 문을 열지 않는다는 쪽지가 붙어 있습니다. 생각해 보니 이탈리아에서는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니 예비 일정도 준비해 두는 게 좋을 거라는 여행 선배들의 말이 떠오릅니다. 그 자리에서 휴대폰으로 예약 사이트에 메일을 보내 환불을 요청하고 급하게 일정을 바꾸었습니다. 그곳은 피렌체와 시에나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중세 도시, '산 지미냐노(San Gimignano)'입니다.

작은 중세 도시, 산 지미냐노의 남문이며 정문인 '산 조반니 문'입니다.
▲ 산 조반니 문 작은 중세 도시, 산 지미냐노의 남문이며 정문인 '산 조반니 문'입니다.
ⓒ 박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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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지미냐노에 가려면 '산타 마리아 노벨라'역 옆에 있는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포기본시(Foggibonsi)란 곳까지 가서 버스를 갈아타야 된다고 합니다. 생전 처음 2층 버스를 타고 포기본시에 도착하니 산 지미냐노까지 가는 버스는 또 30분 정도 기다려야 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포기본시 역 앞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며 기다렸습니다. 부쩍 추워진 날씨지만 아직은 견딜 만합니다. 무엇보다 오늘 만날, 탑의 도시, 산 지미냐노의 모습이 궁금합니다.

그렇게 느닷없이 오게 된 산 지미냐노는 모데나 출신의 신부 '산 지미나누스'의 이름에서 유래한 도시입니다. 원래는 유럽 각지와 북 이탈리아에서 로마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숙박지로 유명한 곳인데 우리나라로 치면 '조령 관문'이 있는 문경쯤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그러다 보니 중세 시대에 숙박업과 상업이 많이 발달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부를 축적한 상인과 귀족들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지지하는 가문과 교황을 지지하는 교황파의 대립이 극심하던 11~13세기. 산 지미냐노의 지배층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자랑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70개가 넘는 토레(torre, 탑)들을 세우게 됩니다. 지금은 15개 정도 남아 있는데, 그 토레들이 만들어 내는 독특한 스카이라인은 멀리서부터 보는 이를 사로잡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입구인 '산 조반니 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산 지미냐노는 중세 도시의 정취를 확실하게 느끼게 해줍니다. 돌로 벽을 쌓아올린 건물들과 좁은 골목길, 그리고 어느 순간 눈앞에 우뚝 나타나는 토레. 로마 외곽에서 만난 '오르비에토'보다도 작은 중세 도시인 산 지미냐노는 말 그대로 '아름다운 탑의 도시'입니다.

산 지미냐노의 중심, '치스테르나 광장'입니다.
▲ 치스테르나 광장 산 지미냐노의 중심, '치스테르나 광장'입니다.
ⓒ 박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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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너무 느닷없이 온 탓일까요?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일정에 맞춰 준비해 두었던 산 지미냐노의 자료들을 들고 오지 않은 것입니다. 게다가 지난밤에 '우피치 미술관' 자료들을 살펴보느라고, 산 지미냐노에 대한 공부도 제대로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선 '여행자 안내 센터'를 찾아가 보았습니다.

하지만, 역시 파업 때문에 문을 닫았다고 합니다. 어쩔 수 없이 기억을 더듬어 무작정 길을 헤맵니다. 왔던 길을 몇 번이나 돌아오고 또 돌아오고, 마을 중심의 '키스테르나 광장(Piazza della Cisterna)' 주변을 얼마나 많이 서성였는지 모릅니다.

의외의 장소에서 만난 그림에 전율이...

산 지미냐노의 두오모인 '산타 마리아 아순타 성당'과 가장 높은 '그로사 토레'입니다.
▲ 두오모와 토레 산 지미냐노의 두오모인 '산타 마리아 아순타 성당'과 가장 높은 '그로사 토레'입니다.
ⓒ 박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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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 대로 되라 하는 심정으로 우선 문이 열린 것 같은 산 지미냐노의 두오모이자 참사회 성당인 '산타 마리아 아순타 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Assunta)'에 들어가 봅니다. 성당 안에는 관리를 맡은 경찰관만 한 명 있을 뿐 찾아오는 여행객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성경의 내용을 그대로 옮긴 오래된 프레스코화가 성당 벽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혼자서 더듬더듬 성경의 내용을 떠올리며 프레스코들을 하나씩 보다 보니 어느새 전율이 일기 시작합니다. 지금까지 봐왔던 바로크나 르네상스 양식의 그림들보다는 훨씬 이전 시기의 그림인 것은 확실한데 누구의 그림인지 알 수 없어서 갑갑합니다.

혹시 몰라 계속 옆을 지키고 있는 경찰관에게 물어봅니다. 그랬더니 구약성경을 그린 것은 '바르톨로 디 프레디'이고 신약성경을 그린 것은 '리포 멤미'라고 합니다. 둘 다 생소한 이름입니다. 급하게 구글링을 해 봅니다. 알고 보니 그들은 중세의 끝자락, 14세기를 대표하는 '시에나 화파(Scuola Senese)'의 작가들이었습니다.

며칠 후 시에나에서 만날 두치오와 로렌체티 형제, 시모네 마르티니로 대표되는 그 '시에나 화파' 말입니다. 사진을 찍을 수 없어서 조금 아쉽긴 했지만, 나는 또 의외의 장소에서 새로운 작가를 만난 기쁨에 빠집니다.    

다음으로 성당 바로 옆에 있는 '시립 박물관(Musei Civici)'으로 향합니다. 다행히 박물관 문도 열려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 준비도 없이 들어간 상태라 박물관에 어떤 작품이 있는지도 제대로 몰랐습니다. 여기 저기 더듬다 보니 필리피노 리피의 또 다른 '수태 고지'가 보입니다. 다른 그림들과 달리 가브리엘 천사와 처녀 수태를 듣는 성모의 모습을 각기 다른 둥근 화폭에 배치한 점이 특이합니다. 하지만 이곳도 사진 촬영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어 눈으로만 열심히 봅니다. 

'시립 박물관' 내부는 산 지미냐노의 상징인 토레, 그중에서 가장 높은 '그로사 토레(Torre Grossa)'와 이어져 있습니다. 이곳까지 와서 산 지미냐노의 명물인 토레에 오르지 않을 수 없겠지요? 별 준비 없이 산 지미냐노에 온 터라 큰 기대는 하지 않고 한 발씩 한 발씩 오릅니다. 생각해 보니 '지오토의 종탑', '두오모의 쿠폴라', 그리고 오늘 토레까지 연달아 사흘 동안 높은 곳에 올라갑니다. 그런데! 이것입니다. 이것. 나는 이곳이 토스카나 지방이란 걸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산 지미냐노의 토레에서 본 토스카나의 풍경입니다.
▲ 토스카나 풍경 1 산 지미냐노의 토레에서 본 토스카나의 풍경입니다.
ⓒ 박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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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지미냐노의 토레에서 바라본 토스카나의 풍경입니다.
▲ 토스카나 풍경 2 산 지미냐노의 토레에서 바라본 토스카나의 풍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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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즈막한 구릉과 언덕, 들판이 이어진 곳. 포도밭과 와인으로 유명한 곳.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비롯해, 수많은 이탈리아 화가들의 그림 속 배경이 된 곳. 르네상스가 싹튼 피렌체와 시에나와 피사가 있는 곳. 단테, 복카치오, 갈릴레이, 다빈치, 미켈란젤로, 마키아벨리의 고향이었으며 푸치니와 로베르토 베니니, 안드레아 보첼리 그리고 '피노키오'의 고향인 곳. 프로방스와 함께 내가 꼭 와보고 싶었던 곳. 토스카나! 그 토스카나가 아무 예고도 없이 내 눈 앞에 탁 트인 전망으로 확 들어옵니다.

산 지미냐노의 그 어떤 미술 작품이나 유적보다도 최고의 보물은 바로 이 전망, 이 풍경입니다. 그것으로 끝입니다. 다른 어떤 말도 필요 없는 이 전망과 이 풍경만 있으면 그것으로 끝인 셈입니다. 오늘 '우피치'를 못 본 아쉬움도, 아무 계획 없이 산 지미냐노에 온 부실함도 모두 훌쩍 사라져 버렸습니다.

하늘과 구름과 들과 언덕과 숲과 포도밭과 마을들이 만들어 내는 토스카나의 풍경. 그것은 행복입니다. 이탈리아 답사 일번지를 뽑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자연과 인간이 함께 만들어 낸 이 토스카나의 풍경을 말할 것입니다. 나는 아이패드에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를 틀어놓고는 혼자서 오래 오래, 정말 오래 오래 찾아오는 이 하나 없는 이 '그로사 토레' 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읽지 않은 이런 메모를 남겼습니다.

당신은 언젠가 이탈리아에 올 것인가?
그렇다면 반드시, 산 지미냐노에 와 보라.
와서 별 준비도 없이 시립 박물관의 그로사 토레에 올라 보라.
그러면 당신은 분명, 행복해질 것이다.
당신이 좋아하는 음악과 함께 한다면 더 행복해질 것이다.
추천곡은 마스카니의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중 인터메조.

(8편으로 이어집니다.)

산 지미냐노의 토레에서 바라본 토스카나의 풍경, 파노라마입니다.
▲ 토스카나 풍경 3 산 지미냐노의 토레에서 바라본 토스카나의 풍경, 파노라마입니다.
ⓒ 박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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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옛 성루에서 바라본 산 지미냐노의 풍경입니다.
▲ 산 지미냐노의 토레들 무너진 옛 성루에서 바라본 산 지미냐노의 풍경입니다.
ⓒ 박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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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ㅣ최은경 기자



태그:#산지미냐노, #토스카나, #토레, #이탈리아, #미술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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