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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산 마르코 수도원(산 마르코 박물관)의 회랑입니다. 안젤리코의 프레스코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 산 마르코 수도원 피렌체 산 마르코 수도원(산 마르코 박물관)의 회랑입니다. 안젤리코의 프레스코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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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때로 고행과도 같은 한 예술가의 작업이 남긴 결과물을 보고 아름다움 이전에 그의 예술혼에 찬탄을 보내곤 합니다. 그림자를 남기지 못해 아내와 비극적 죽음을 맞은 불국사 석가탑의 석공이나, 평생을 바친 불사(佛事)를 마치고 학이 되어 날아갔다는 어떤 목수 이야기는 그런 예술가들의 고행을 상징하는 전설일 테죠.

지금 내 발걸음이 향하고 있는 '산 마르코 수도원(혹은 산 마르코 박물관, Museo di San Marco)'에도 그런, 한 예술가의 숭고한 정신을 만날 수 있습니다.

도미니크회 소속인 '산 마르코 수도원'은 피렌체 시내 한복판에서 거의 유일하게 만날 수 있는 고요하고 적막한 수도원입니다. 수도원 입구에 들어서니 15세기 초반의 전형적인 르네상스 양식의 회랑과 중앙 정원이 나타납니다. 이번 이탈리아 여행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수도원이라 그런지 조금은 낯선 느낌이었지만 왠지 모를 편안함도 느껴집니다.

조금은 낯설지만, 편안하게 안아주는 '산 마르코 수도원'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최후의 만찬' 피렌체, 산 마르코 수도원. 수도원 식당의 한 벽을 가득 채운 장식적인 느낌의 '최후의 만찬'입니다.
▲ 최후의 만찬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최후의 만찬' 피렌체, 산 마르코 수도원. 수도원 식당의 한 벽을 가득 채운 장식적인 느낌의 '최후의 만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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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스코화로 장식된 회랑을 지나 가장 먼저 들어간 곳은 메디치 가문의 인문학 아카데미가 열리기도 했던, 수도원의 식당입니다. 지금은 북 스토어(기념품 판매장)로 쓰이고 있는 이곳 한쪽 벽에 도미니코 기를란다요의 '최후의 만찬'이 있습니다. 초기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화가 중 한 명인 기를란다요는 피렌체 곳곳에 그의 작품을 남겼는데, 어제 만났던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중앙 제단화 '성모 마리아의 일생'이나 '아카데미아 미술관'의 '성 제노비우스 연작'도 그의 작품입니다.

이 그림, '최후의 만찬'은 기를란다요의 대표작 중 하나로 15세기에 그려진 '최후의 만찬' 중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작품입니다. 우리는 흔히 '최후의 만찬'이라 하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을 떠올리곤 합니다. 하지만, '최후의 만찬'은 신약 성경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 중 하나로 중세 시대부터 수많은 화가의 그림 소재였습니다.

그런데 나 역시 아직 보지도 못한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만 익숙한 것일까요? 기를란다요의 '최후의 만찬'도 분명 훌륭한 작품인데, 인물들의 표정과 동작에서 왠지 모르는 어색함이 느껴집니다. 극적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조금은 화려하다는 느낌도 듭니다. 선입견 없는 맨눈으로 그림을 보는 것이 이처럼 어려운 일인가 봅니다.

다시 한 번 차근차근 그림을 살펴봅니다. 고행에 지친 수도사들에게 잠시나마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인 식당. 어쩌면 기를란다요의 '최후의 만찬'은 그런 장소적 특징을 잘 살린 그림이 아닐까요?

르네상스식 건물과 정원을 배경으로,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중앙 제단화에서도 이미 경험한 적 있는 기를란다요 특유의 화려한 색감이 돋보이는 옷을 입은 인물들. 그들 뒤로 탐스러운 오렌지 나무와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들, 거기다가 떨어진 음식이라도 주워 먹으려는 듯 무심하게 앉아 있는 고양이 한 마리까지. 기를란다요는 아예 작정하고 장식적인 그림을 그린 모양입니다.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최후의 만찬'(부분), 피렌체 산 마르코 수도원. 배신자 유다를 노려보고 있는 성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 칼을 든 성 베드로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최후의 만찬'(부분), 피렌체 산 마르코 수도원. 배신자 유다를 노려보고 있는 성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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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누군가 자기를 배신할 거라는 예수의 말에 상심한 듯 쓰러져 있는 성 요한의 절망적인 표정이나 자기는 아니라는 듯 동전을 집어 든 채 등을 지고 앉아있는 유다의 뻔뻔한 표정, 그리고 칼을 든 채 그런 유다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성 베드로의 눈빛은 놀라울 정도로 생생합니다.

특히 성 베드로의 표정은 넋 놓고 식사를 하던 수도사들이 정신을 번쩍 차릴 만큼 섬뜩하기까지 합니다. 성화는 성화인 셈이지요. 성 베드로의 따가운 시선에 나도 정신이 번쩍 듭니다. 다시 힘을 내서 발걸음을 옮깁니다.

이곳 '산 마르코 수도원'은 '안젤리코 미술관'으로 불릴 정도로 안젤리코의 수많은 프레스코를 만날 수 있습니다. 1438년부터 1443년까지 수도원을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안젤리코가 내부 장식 그림들을 그렸기 때문입니다.

수도자를 위로한 건 신성도 인성도 아닌 '모성'

프라 안젤리코 '수태 고지', 피렌체 산 마르코 수도원. 간결하고 정적인, 그러면서도 지친 수도사들을 위로해 주는 느낌의 그림입니다. 프라 안젤리코의 화풍이 가장 잘 드러난 그림입니다.
▲ 수태 고지 프라 안젤리코 '수태 고지', 피렌체 산 마르코 수도원. 간결하고 정적인, 그러면서도 지친 수도사들을 위로해 주는 느낌의 그림입니다. 프라 안젤리코의 화풍이 가장 잘 드러난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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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이기 전에 존경받는 수도자였으며 수도원장이었던 안젤리코는, 본명이 구이도 디 피에트로(Guido di Pietro)로 친근함을 나타내는 말 '프라(Fra)'를 붙여서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천사 같은 신부님)'로 불리기도 하고, 20세기에 '복자'로 시복되었기 때문에 '복자'를 가리키는 말 'Beato'를 붙여서 '베아토 안젤리코'로도 불립니다. 기를란다요의 그림을 뒤로하고 계단을 오르면 바로 그, '프라 안젤리코'의 대표작, '수태 고지'가 눈앞에 나타납니다. 이번 이탈리아 여행에서 가장 만나고 싶었던 그림 중 하나입니다.

로마에서부터 벌써 여러 편 만났던 '수태 고지'. 기독교에서 '수태 고지'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육화(肉化, incarnation)된 '신의 말씀'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기독교에서 신은 말로써 세상을 창조했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도 천사를 통한 신의 말에 의해 수태되었고 탄생했다는 것이 기독교의 논리입니다.

또한, 그렇게 신의 말씀으로 인간 처녀의 몸에 수태되어 탄생한 예수는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진 존재라는 겁니다. '수태 고지'는 말하자면 기독교 신앙의 가장 본질적인 교리를 상징하는 장면인 셈이지요.

프라 안젤리코 '수태 고지', 피렌체 산 마르코 수도원. 43개의 첼라를 장식하고 있는 프라 안젤리코의 작은 프레스코화들 중 하나로 간결한 양식의 '수태 고지'입니다.
▲ 수태 고지 프라 안젤리코 '수태 고지', 피렌체 산 마르코 수도원. 43개의 첼라를 장식하고 있는 프라 안젤리코의 작은 프레스코화들 중 하나로 간결한 양식의 '수태 고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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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 안젤리코 '조롱당하는 예수', 피렌체 산 마르코 수도원. 수도사들을 위로하는 것은 저토록 간결한 프라 안젤리코의 그림과 작은 창문 하나 뿐입니다.
▲ 조롱당하는 예수 프라 안젤리코 '조롱당하는 예수', 피렌체 산 마르코 수도원. 수도사들을 위로하는 것은 저토록 간결한 프라 안젤리코의 그림과 작은 창문 하나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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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는 이런 종교적인 해석 때문이 아니라 전혀 다른 이유로 안젤리코의 '수태고지'를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머니'입니다. 가지런히 두 손을 모으고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처녀 수태를 고지받는 성모의 표정을 봅니다.

그것은, 느닷없는 방문에도 모든 것을 신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감내하려는 '어머니'의 얼굴입니다. 엄격한 수도원의 2층, 수 십 개에 이르는 첼라(cella, 수도자들의 독방)에 들어가 추위와 배고픔과 고독과 싸우며 자신을 온전히 신에게 바치려 했던 수도자들. 그들의 고행을 위로할 수 있는 것은, 신성도 인성도 아닌 '모성'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첼라들! 나는 이 첼라들에서 다시금 소름 돋는 감동을 합니다. 2평 남짓한 좁은 독방을 장식하고 있는 건 오직 창문 하나와 그림 한 점뿐. 그것은 고행하는 수도자들에게 주어진 최소한의 위로였을 겁니다.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겨가며 수십 개의 첼라들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모두 들여다봅니다. 그곳들은 분명 텅 빈 공간이건만, 그냥 비어있는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수도자들의 호흡과 묵상이 아직 가득 차 있는 것 같습니다.

그 호흡과 묵상들은 프라 안젤리코의 그림에 스며들어 오랜 시간을 뛰어넘어 내 앞에서 밝고 선명한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나는 비로소 '프라 안젤리코, 베아토 안젤리코'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수백 년 세월 동안 수도사들을 포함한 수많은 이들을 위로한, 이 그림들로써 그는 정말 '천사같이 복된 자'였던 것입니다.

43개의 첼라를 장식하고 있는 프레스코들은 모두 예수의 생애와 고난, 부활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도원이라는 장소의 특성상, 대부분 작은 화면에 간결한 구도와 차분한 색채로 그려져 있죠. 그러다 보니 고딕 양식과 르네상스 회화 양식이 섞여 있는 것 같습니다. 마사초의 화풍이 휩쓸고 있던 15세기 전반의 피렌체에서 안젤리코의 그림들은 오히려 훨씬 전 시대인 지오토의 화풍을 많이 닮았습니다.

그런데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란 생각도 듭니다. 마사초의 작업은 어차피 하나의 혁명과도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마사초보다 15세 연상인 안젤리코는 마사초 이전에 이미 지오토라는 거대한 산맥 아래 있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화풍을 만들어 가는 중이었죠. 안젤리코가 마사초를 자세히 연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마사초의 급작스러운 죽음 이후 피렌체 회화를 이끈 건 안젤리코였습니다.

그림들을 보면, 안젤리코는 자신이 해야 할 바를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수태 고지'의 성모가 그러하듯 그의 묘사는 간결하고, 고요하고, 단순하고, 무엇보다 겸손합니다. 자로 잰 듯 정밀한 원근법이 아니라 직관적이지만 자연스러운 원근법에, 섬세한 듯하면서도 기술을 자랑하지 않는 인물 묘사는 화가이자 수도자로서 안젤리코의 정체성을 잘 보여줍니다. 그에게 그림이란 수도 일부분이고, 설교와 위로의 과정이었던 셈이지요.

이탈리아에서 갑자기 생각난 고은 시인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의 두 주인공, 아오이와 쥰세이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자리입니다. 저 멀리 '세르비의 길' 끝에 두오모가 보입니다.
▲ 산티시마 안눈치아타 광장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의 두 주인공, 아오이와 쥰세이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자리입니다. 저 멀리 '세르비의 길' 끝에 두오모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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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세르비의 길(via dei Servi)'. 내가 가장 사랑하는 길. 걷다 보면 두오모가 마치 살아있는 거인처럼 느껴집니다.
▲ 세르비의 길 피렌체 '세르비의 길(via dei Servi)'. 내가 가장 사랑하는 길. 걷다 보면 두오모가 마치 살아있는 거인처럼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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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곳 '산 마르코 수도원'과 안젤리코의 프레스코들에서 느껴지는 감동은 이전과는 다른 것입니다. 무언가로 꽉 차있는 것이 아니라 한없이 비워진 느낌. 이방의 나라, 나와 무관한 종교의 그림인데 왠지 고은 시인의 시, '눈길'이 떠오릅니다.

"세상은 지금 묵념의 가장자리 / 지나온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 설레이는 평화로서 덮이노라... 온 겨울의 누리 떠돌다가 / 이제 와 위대한 적막을 지킴으로써 / 쌓이는 눈 더미 앞에 /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

시구처럼 '설레이는 평화'를 일깨워준, '위대한 적막'을 간직한 '산 마르코 수도원'을 나옵니다. 그리고 발걸음을 옮겨 '산티시마 안눈치아타 광장(Piazza della Santissima Annunziata)'으로 향합니다.

이곳에서는 '산티시마 안눈치아타 성당'과 브루넬레스키의 설계로 만든 유럽 최초의 고아원, '오스페달레 델리 인노센티(Ospedale degli Innocenti)'와 '페르디난도 데 메디치의 기마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당과 고아원 건물 모두 보수 공사 중이라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아쉬운 마음을 다독이며 메디치의 기마상 아래에 서 봅니다. 좁은 길 너머 저 멀리 희미하게 '두오모'가 보입니다. 가슴이 또 쿵쾅거립니다. '세르비의 길(via deo Servi)'. 피렌체에서 내가 가장 걷고 싶었던 길입니다.

그런데 분명 처음 본 풍경인데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입니다. 기억을 더듬어 봅니다. 그렇습니다. 이곳은 두오모의 쿠폴라에서 기적적으로 다시 만난,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의 두 주인공, 아오이와 쥰세이가 마주 서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던 자리였습니다. 그리고 내 앞에 펼쳐진 '세르비의 길'은 미술품 복원을 공부하던 쥰세이가 자전거나 스쿠터를 타고 자주 지나가던 길이었지요.

이제 나도 그 길을 걸어갑니다. 첼로 선율이 아름다운 료 요시마타의 '냉정과 열정 사이'를 듣습니다. 광장에서 희미한 신기루처럼 보이던 두오모가 한 발 한 발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점점 더 선명해지고 거대해져 갑니다. 마치 꿈 속에서 만난 르네상스의 거인이 되살아나는 듯한 느낌입니다. 

두오모 둘레를 다시 한 번 더 돌아보고, 보수공사 중인 '산 조반니 세례당'을 뒤로 한 채 오늘의 마지막 일정인 '메디치 리카르디 궁전(Palazzo Medici Riccardi)'으로 길을 잡습니다. 메디치 가문의 첫 번째 궁전이었던 이 궁전은 17세기 중반 리카르디 가문이 차지하면서 '메디치 리카르디 궁전'으로 불리게 된 곳입니다. 요새 같은 외관과 달리 실내는 궁전이란 이름에 걸맞게 화려합니다.

베노초 고촐리 '동방박사의 행렬', 피렌체, 메디치 리카르디 궁전. 메디치 가문의 사람들과 1439년 공의회에 참여한 사람들로 성경 속 동방박사의 행렬을 재현한 매우 화려한 프레스코입니다.
▲ 동방박사의 행렬 1 베노초 고촐리 '동방박사의 행렬', 피렌체, 메디치 리카르디 궁전. 메디치 가문의 사람들과 1439년 공의회에 참여한 사람들로 성경 속 동방박사의 행렬을 재현한 매우 화려한 프레스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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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노초 고촐리 '동방박사의 행렬'(부분). 공의회에 참석한 동로마제국의 황제를 비롯한 인물들을 모델로 동방박사의 행렬을 묘사했습니다.
▲ 동방박사의 행렬 2 베노초 고촐리 '동방박사의 행렬'(부분). 공의회에 참석한 동로마제국의 황제를 비롯한 인물들을 모델로 동방박사의 행렬을 묘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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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곳에 있는 '마기 예배당(Cappella dei Magi)'에서는 피렌체를, 아니 메디치 가문을 상징하는 작품을 반드시 만나야 합니다, 바로 베노초 고촐리의 '동방 박사의 행렬'입니다. '동방 박사의 행렬'이라는 성경의 소재를 따오긴 했지만 사실 이 그림은 15세기 메디치 가문의 집단 초상화이자 홍보물입니다.

1439년, 피렌체의 두오모에서 로마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 사이에 교리를 통일하기 위한 공의회가 열립니다. 교황과 동로마 제국의 황제까지 참석한 이 공의회를 주최한 것은 바로 국부(國父) 코시모 데 메디치. 그는 이 공의회와 메디치 가문의 영광을 기념하기 위해 이 그림을 주문했던 것입니다.

밝고 아름다운 피렌체 풍경을 배경으로 화면을 가득 채운 인물들. 그들이 입고 있는 빛나는 색채의 호사스러운 의복, 사치스럽기까지 한 디테일. 지금까지 봐왔던 다른 어떤 프레스코화보다 화려한 작품입니다. 그림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어린 동방박사, 발타사르로 형상화된 소년으로, 바로 '위대한 로렌초'입니다. 이 작품이 그려질 당시, 로렌초는 아직 어린아이였다고 하는데 그림에서는 미청년의 모습으로 형상화되어 있습니다.

베노초 고촐리 '동방박사의 행렬', 피렌체 메디치 리카르디 궁전. 피렌체 공의회에 참여한 비잔틴제국의 인물들입니다.
▲ 동방박사의 행렬 3 베노초 고촐리 '동방박사의 행렬', 피렌체 메디치 리카르디 궁전. 피렌체 공의회에 참여한 비잔틴제국의 인물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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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까지도 피렌체와 메디치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상이지요. 그런가 하면, 코시모 데 메디치는 소박한 검정색 옷에 당나귀를 타고 있습니다. 실제로 코시모는 자신의 소박함을 드러내기 위해 늘 당나귀를 타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좁고 어두컴컴하지만 고촐리의 프레스코로 인해 보석처럼 빛나는 예배당을 찾아온 이가 아무도 없습니다. 덕분에 나는 이 그림을 혼자서 차분하게 감상합니다. 그런데 이탈리아에서 이런 호사를 오래 누릴 수는 없나 봅니다. 어느 순간 단체 관람객 두 팀이 들어와 순식간에 예배당 안을 가득 채웁니다.

그러더니 각자 준비한 가이드 투어를 진행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 팀은 이탈리아어로, 또 한 팀은 영어로 야단법석을 벌이는 통에 가뜩이나 좁은 예배당 안은 더는 그림을 감상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예배당을 빠져나와 그들이 나오길 한참 동안 기다렸다가 다시 들어갔더니 궁전 전체 문 닫을 시간이 불과 10분 정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결국, 다른 곳들은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오직 이 한 그림만 보고는 급하게 궁전에서 빠져나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상한 것은 아닙니다. '두오모'에서 시작하여 '아카데미아 미술관', '산 마르코 수도원', '세르비의 길', 그리고 '메디치 리카르디 궁전'까지. 쉴 틈 없이 달려온 오늘 하루가 지금까지 내 생애 최고의 하루였으니 말입니다.

(7편으로 이어집니다)

○ 편집ㅣ곽우신 기자



태그:#산마르코수도원, #프라안젤리코, #메디치리카르디궁전, #피렌체, #이탈리아미술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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