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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딸! 이것 좀 볼래? 999번째야. 한 꼭지만 더 쓰면 1000꼭지 기사란 이야기지. 1000번째 기사로 어떤 책을 소개할까? 엄마 이야기나 우리 집 이야길 쓸까 생각도 했는데…. 어떻게 기사를 쓰게 됐고, 기사를 쓰면서 무엇이 달라졌는가. 괜찮을까? 좀 쑥스럽기도 하고 그러네!"
"언제 그렇게 많은 기사를 썼어요? 그러고 보니 엄마가 기사 쓰는 거에 참 무심했네. 내 생각엔 엄마 이야길 썼으면 좋겠어. 난, 엄마가 기사를 좀 많이 썼으면 좋겠어."

"기사 많이 쓰는데? 옛날만큼 많이 쓰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야. 이만하면 많이 쓰는 거야."
"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아직 공부도 더 해야 하지만 우리도 이제 많이 컸고 돈도 버니까 엄마는 다른 일은 하지 말고 기사만 썼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야. 돈 번다고 일하면서 쓰면서 친구들도 제대로 못 만나고, 잠도 제대로 못 자잖아. 만날 시간에 쫓기고. 이젠 그러지 말고 집에서 편히 쉬면서 책도 맘껏 읽고, 기사도 여유 있게 쓰고, 엄마 책도 쓰고 그러면 좋겠다는 이야기야. 엄마가 전에 말했던 르포? 그것도 쓰고…."

한 달 전쯤 '이제 몇 꼭지만 더 쓰면 1000꼭지 기사'라는 계산을 하면서부터 이따금 술렁였다. 1000번째 기사로 어떤 이야길 쓸까? 어떤 책을 소개할까? 공연히 설렜다. 그동안 기사를 써온 이야길 쓰는 게 좋겠다 싶다가,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에 그치는 것이라 망설이기를 거의 한 달. 999번째 기사를 쓴 날 밤 딸에게 물으니 이렇게 대답한다.

1000번째 기사, 그 시작은 이랬습니다

 그간 받은 상패와 메달.
 그간 받은 상패와 메달.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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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5년 2월 6일 밤에 첫 기사를 썼다. 한 해 전인 2004년 4월, 이웃집의 화재로 우리집이 전소한 후 그 어느 해보다 처참한 2004년을 살아야 했다. 없는 것이 너무나 많았던 혹독한 겨울을 보내며, 남의 잘못으로 모든 것을 잃은 분노를 간신히 삭여야 했다. 그래도 더 이상 무너지지 말고 어떻게든지 살아내야 한다는 절실한 심정으로 기사를 썼다(첫 기사 : 책표지, 꼭 싸야만 하는가).

기사를 쓰기 몇 년 전인 2001년부터 <오마이뉴스> 독자였다. 가장 많이 봤던 기사들은 책동네 기사들. 가게가 바쁘던 당시에도 아무리 바빠도 매일 일정 분량의 책은 읽었다. 그런 내게 <오마이뉴스> 책동네 기사는 참 유용했다.

나보다 먼저 <오마이뉴스> 독자였던 한 지인이 독자로만 머물지 말고 기사를 써보라고 권했다. 약속이라도 한 듯, 청소년기부터 글을 써오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주변 사람 몇몇도 부추겼다. 그러나 화재를 당한 2004년까지는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눈에 띄도록 많은 돈을 벌진 못했으나 소시민으로 아이들을 키우며 궁색하지 않게 살 정도는 되었던지라 아쉬울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하루하루 안일하게 살았다.

이런 나를 혹독하게 후려친 것은 2004년 4월의 화재 사건이었다. 1991년 3월 이후 다시 겪은 이 화재의 여파는 이겨내기가 너무 힘들었다. 첫 화재처럼 아무런 잘못 없이 누군가의 잘못(이웃집 화재로 번져 전소)으로 하루아침에 거지꼴이 된 것이다. 다시는 되풀이해선 안 된다는 조바심으로 13년을 조심스럽게 살았는데, 나와 상관없이 결국은 되풀이된 불행이라 더 처참하기만 했다.

첫 화재 당시 교통사고까지 겹치는 바람에 정말 많은 것을 잃고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했다. 두 번째 화재가 나기 전까지 우리 부부는 정말 열심히 살았다. 노점까지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살아온 덕분에 턱없이 버거웠던 빚도 갚고, 이제 가게도 확장하고, 집도 늘려 좀 여유있게 살 수 있겠다 싶을 때 또 한 번 화재가 났다. 맥이 풀렸다. 보이지 않는 신? 운명? 이런 것들로부터 내동댕이쳐졌다는 생각만 자꾸 들었다.

온종일 정신 없이 일을 해 피곤한데도 잠들지 못하고 어둠 속에 깨어있는 날들이 많았다. 세상과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한, 밑도 끝도 없는 막연한 피해의식과 이유도 결론도 없는 뻔한 자책이 되풀이됐다. 불을 내고서도 보상 하나 해주지 않는 이웃집이 떠오르면 속에서 뜨거운 것들이 불쑥불쑥 치밀어 올라와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면 한밤중에 엉뚱한 곳에 서있는가 하면, 나도 모르게 위험한 일도 저질러 놓은 후였다.

 화재 그 며칠 후 잿더미 속에서 건진 아이들 유치원 사진. 화재 당시 초등학교 6학년, 3학년이었던 두 아이는 이제 성년이다.
 화재 그 며칠 후 잿더미 속에서 건진 아이들 유치원 사진. 화재 당시 초등학교 6학년, 3학년이었던 두 아이는 이제 성년이다.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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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는 참 위험했다. 우울증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이제와 생각하면 한편 부끄럽기도 하다. 순간순간 치솟는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면 '묻지마 범행'까지도 가능하겠다는 것을, 훗날 묻지마 범행 관련 뉴스를 보며 생각했다.

'…우리 엄마가 웃음을 많이 잊어버렸다. 어젯밤 엄마가 울고 있어서 화장실에 가지 못하고 억지로 참고 잤다. 언제부턴가 우리 엄마는 무엇이든 자꾸 까먹는다. 우리 엄마가 집을 잊어버릴지도 몰라서 걱정된다. 그리고 우리들도 잊어버릴 것 같아 불안하다….'  

이처럼 날로 위험해지고 있는 나를 잡아준 것은 아이들이었다. 남의 잘못으로 저희들의 추억 어린 물건을 모두 화재로 잃어 버리는 아픔을 겪고도, 화재로 인해 전보다 훨씬 쪼들리는 생활을 하는데도 투정 한 번 부리지 않고 묵묵히 자라준 아이들. 어느 가을 날, 우연히 3학년 딸의 공책에서 발견한 이 글을 보는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동시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미 가을을 지나 겨울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때야 비로소 추위에 마땅한 외투 하나 없는 아이들과 남편이 보였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괴롭고, 불을 낸 이웃집을 생각할 때마다 분노가 치밀곤 했다. 그럴수록 예전과 달리 우연히 보게 된 딸의 글이 떠오르고 나 때문에 불안한 딸에게 미안해졌다. 아이들에게 큰 죄를 짓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 용서하자. 그 누구보다 우리 아이들을 위하여. 아이들의 앞날을 위하여. 우리 아이들에게 죄를 짓지 말기 위하여. 일단 열심히 살고 보자. 내 아이들을 위하여.'

그래도 가라앉지 않는 분노를 삭일 방법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일기를 써나가며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너무 피폐해져 있었다. 예전의 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일기 쓰는 날이 늘어가면서 조금씩 안정이 됐고, 비로소 2~3년 전 지인이 권한 글쓰기가 생각났다. 그렇게 2005년 2월 6일 밤 첫 기사를 썼다.

기사쓰기는 내 가장 큰 힘이자 위로

 2006년 9월 중순 서울 지하철 2호선 기관실에서 찍은 사진. 2회에 걸쳐 지하철 기관실에 탑승, 그 이야기를 썼다. 당시 만났던 기관사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내가 공식적으로 기관실에 탑승한 첫 시민이라고. 대통령들도 나처럼 지하철 기관실에 탑승해 전구간을 달린 적이 없다고. 개인적으로 참 많은 것들을 얻은 취재와 기사쓰기였다.
 2006년 9월 중순 서울 지하철 2호선 기관실에서 찍은 사진. 2회에 걸쳐 지하철 기관실에 탑승, 그 이야기를 썼다. 당시 만났던 기관사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내가 공식적으로 기관실에 탑승한 첫 시민이라고. 대통령들도 나처럼 지하철 기관실에 탑승해 전구간을 달린 적이 없다고. 개인적으로 참 많은 것들을 얻은 취재와 기사쓰기였다.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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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년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쓰면서 참 많은 것들을 얻었다. 밑바닥까지 떨어진 참담한 상황에서 어떻게든지 나를 추스르려고 선택한 기사쓰기였는데 정말 잘한 일이었다. 털어내자 하면서도 쉽게 털어지지 않는 분노를 어떻게든지 삭이려고, 어떻게든지 살아내야 했기에 바쁘게 쓰다 보니 올해의 뉴스게릴라(2009년)를 비롯해 여러 가지 상도 받았다.

기사를 쓰던 지난 날, 많은 일들이 있었다. 17년째 운영해 온 가게를 빚을 떠안고 접는 일도 있었고, 남편이 죽음 직전까지 간 적도, 딸이 중환자실에 입원한 일도 있었다. 외에도 교통사고 등 수많은 악재가 되풀이됐다. 이런 와중에도 기사 쓰는 것은 놓지 않았다. 기사쓰기는 나와 내 가족을 다시 일으켜 걸어가게 해준 가장 큰 힘이자 깊은 위로였기 때문이다.

지난해부터 생활이 조금씩 안정되고 있다. 그동안 나와 남편이 때론 '투잡' '스리잡'까지 하면서 정신없이 살아낸 덕분이다. 1000개의 기사는 이처럼 바쁘고 힘들게 살아내면서 쓴 기사들이다. 딸의 말대로 밤 잠 줄이고, 친구들과의 만남도 접으면서 쓴 기사들이 80% 이상이다. 돌아보면 기사 한 꼭지 한 꼭지 모두 내 개인적인 사연들이 얽혀 있다.

"힘들 때마다 엄마 아빠가 고생하신 것들이 떠올라 힘이 나요. 엄마ˑ아빠 아들이니 어떻게든지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생각도 들고요. 부대(군대)에서 힘들거나 억울한데도 말 못할 일이 생겨 화가 날 때도 엄마ˑ아빠 생각하면 참아지더라고요. 우리 때문에 엄마ˑ아빠는 얼마나 많이 참았을까 생각하게 되고요. 엄마 아빠는 가난해서 우리에게 해준 것이 없다고 말씀하시곤 하는데, 우리가 무엇을 하겠다고 할 때 다른 부모들처럼 엄마ˑ아빠 생각을 무조건 강요하지 않고 우리 이야기를 먼저 들어준 후 우리의 판단을 믿어준 것이 가장 많이 준 것이라고 생각해요. 믿어준 만큼 열심히 해야 한다. 내가 선택했으니 후회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아들)

"엄마가 기사를 써서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도 되고, 세상에 의미 있는 일을 하시는 것을 생각하면 함부로 살아선 안 된다,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엄마처럼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곤 해요. 난, 돈이 많아서 무엇이든지 해주는 엄마보다 개념이 있는 엄마가 더 좋아. 암튼 엄마가 기자라는 것이 자랑스러워요. 엄마처럼 멋있게 살고 싶고요."(딸)

올 봄 아들이 전역하던 날 밥을 먹으며 두 아이가 우리 부부에게 했던 말을 떠오를 때면 행복하다.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쓰면서 얻은 것 중 이보다 값진 것이 또 있으랴.

이제 더 이상 우리 가족에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이웃집 그 사람들이 원망스럽지도 않다. 그때 그토록 처참하게 무너지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나 내 아이들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때 그토록 힘든 일이 없었다면 나의 글쓰기는 끝내 시작되지 못했거나 훨씬 훗날로 미뤄졌을 것이다.

그리고 절실하지 않았던 만큼 그와 같이 열심히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1000번째 이 기사는 꿈도 꾸지 못했을 거다. 아이들에게 그저 잔소리와 참견으로 들들 볶는 엄마로 남아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만하면 <오마이뉴스> 기사쓰기를 통해 정말 많은 것들을 얻지 않았나.

2015년에도 열심히 쓸 것이다. 나처럼 글쓰기를 통해 시련을 이겨내는 사람들이 많기를 바라면서. 나의 글들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믿음으로, 내 기사를 기다릴 독자들을 위해, 이런저런 방법으로 기사에 대한 관심과 고마움을 표현해주시는 열혈독자님들과 지인들에게 보답하는 마음으로. 내 아이들에게 여전히 힘이 되고 자랑이 되는 엄마로 살기 위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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