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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의 위패가 있는 통영충렬사 입구
 이순신 장군의 위패가 있는 통영충렬사 입구
ⓒ 김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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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충렬사는 이순신 장군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왕의 명으로 1606년에 만들어진 곳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충무공 관련 사당이기도 하다.

대통령 출마자나 당선자들이 오늘날 현충원을 맨 먼저 참배하듯, 광복 직후 통영 충렬사는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김구, 여운형 등 많은 지사들이 새로운 사회를 만들겠다는 다짐을 하러 찾았던 곳이기도 했다. 건축미 면에서도 단아한 아름다움이 있어, 충렬사 외삼문이 정부 수립 후 발행된 우표의 도안으로 쓰이기도 했다.

나는 통영 충렬사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서문고개 근방의 할아버지 집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충렬사 주차장이 된 곳의 바로 뒤편 여황산 자락이 어린 시절 할아버지 댁에 올 때마다 헤집고 다니던 천연의 놀이터였다.

맑은 상류이던 그 시절의 나는 아무렇게나 뻗은 산길을 흘러 다니며 올챙이를 품고 다녔다. 바다로 향할 운명 따위는 몰라도 됐다. 야산의 '드림파크'를 헤집고 온 날이면 개근상장에 찍힌 도장처럼 빨갛게 몸 여기저기에 상처가 나 있기도 했다. 그러면 할머니는 노란 기름에 무슨 가루를 타서 긁혀 피 나는 곳에 발라주었다. 동백꽃으로 만든 기름과 가루라는데, 은은한 그 내음을 맡으며 잠이 들기도 했다.

여황산 산자락은 동네 꼬마들과 무공을 겨루던 격전지이기도 했다. 아이들은 저마다 위인전집이나 영웅 만화에 나오는 인물로 빙의해서 전투에 임했다. 격전 중 최대의 논쟁은 그 인물들 중 누가 제일 강한가였다. 도시의 이름부터 이순신 장군의 호를 따 충무시라고 부르던 이 고장은 이순신의 도시였기에 이순신 장군이 제일 세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하지만, 광개토대왕이 더 싸움을 잘한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이순신은 장군인데 반해 광개토는 왕이니 더 낫다는 논리였다.

장군이던 사람이 왕처럼 대통령을 하기도 했다는 걸 그때 그 아이들이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그것도 광개토대왕이 통치했던 22년과 필적할 만한 기간인 18년이나 그랬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순신 장군을 신격화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광화문에 거대한 동상을 세우고 장군의 탄신일을 국경일로 지정하는 것을 추진했으며 현충사 성역화 작업을 진행했다.

군인 대통령 연정의 시대 끝무렵이었던 때,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에서도 충무공의 정신을 강조했다. 조회 시간에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은 기-승-전-이순신이었다. 학교 곳곳엔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와 해상 전투를 묘사한 그림, 어록들이 붙어 있었다.

해전도에는 파도가 휘몰아치고 있었고, 소리 없는 아우성이 병사들의 날선 눈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위태롭게 떠 있는 배 위에 선 이순신 장군과 병사들의 모습을 나름 용맹하게 보이려 그린 것일 텐데, 나의 눈에는 죽음과 싸워야 하는 외롭고 아픈 사람들이 느껴졌을 뿐이다.

한산대첩 기념하는 백일장 축제에 내가 참석한 이유

통영 충렬사 안마당의 동백나무. 동백꽃이 빨갛게 열렸다.
 통영 충렬사 안마당의 동백나무. 동백꽃이 빨갛게 열렸다.
ⓒ 통영충렬사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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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에서는 매년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을 기념하는 축제를 벌인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나는 그 축제 행사 중 하나인 백일장 대회에 나갔다.

충무공 정신을 계승하자는 축제의 일환이지만 나의 목적은 달랐다. 내 마음을 삐져나온 마음이 수줍게 향하던 같은 학교 다니던 여학생이 있었는데, 그녀가 백일장에 나갈 거라는 첩보를 입수했기 때문이었다. 내 마음이 다른 마음에게로 가는 길을 몰라 어떻게든 그렇게 주변을 서성이고 싶었던 거였다.

백일장은 충렬사에서 열렸다. 초등부는 '충렬사'를 시제로 받았고, 3시간쯤 주어진 시간 동안 시를 써야 했다. 다른 사람들이 시상을 떠올리는 동안 나는 그 아이를 떠올렸다. 만나면 뭐라고 할까 고민하며 충렬사 마당을 공전했다.

기다리다 보니 충렬사 입구 마당의 동백나무 몇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300년 이상 된 나무라는 설명이 적혀 있었다. 겨울을 이기고 피는 불굴의 꽃인 동백은 충무공의 사당에 어울렸다. 그리고 약재로도 쓰인다고 선생님이 알려 주셨다. 예전에 할머니가 나의 다친 곳에 동백기름과 가루를 발라 주시던 게 생각났다.

동백꽃을 보니 그 여자 아이가 더 보고 싶어졌다. 소설 <동백꽃>을 쓴 분의 이름과 그녀의 이름이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그녀는 결국 오지 않았다. 아쉬운 하늘엔 누군가의 얼굴같은 구름이 열심히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었다. 동백꽃이 빨갛게 돋아나 충렬사 한 켠에 우두커니 선 목석같은 내 마음을 보듬었으면 싶었다.

빈 마음으로 충렬사 경내를 한 바퀴 돌았다. 산등성이를 누비던 시절에 담장 밖에서만 보았던 곳이라 내부를 와 본 건 처음이었다. 근심을 놓고 보니 한가로이 거닐기에 좋은 평온한  곳이었다. 장군의 위패가 놓인 제일 안쪽 건물 정당 뒤편에는 대나무숲이 우람했다. 저 숲 너머 오른편에 나의 상류가 있다.

그녀에 대한 그리움을 닦으며 자리에 앉아 남은 시간 동안 충렬사에서 전해지는 울림들을 시로 썼다. 동백처럼 사람들을 치유하고 처마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살며 평화로움을 누릴 수 있는 것. 그런 게 충무공 정신은 혹시 아닐까? 그런 마음으로 이렇게 충렬사라는 제목으로 시를 적었고 감사하게도 나는 백일장에서 전체장원을 받았다.

여황산 줄기 등지고
한려수도 푸른 물결 가슴에 안고
충무공 정신 한아름 담긴 곳

그 정기가 담긴 잔디에 누우면
이순신 할아버지 모습이
구름과 함께 흘러간다

동백나무 향기가
숲 사이로 흘러
뜰에 앉으면
그 향기 만발하여
장승마저 고개 숙이는 그 곳

통영 남망산공원 정상에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 동상 뒤편으로 충렬사 뒷산인 여황산이 보인다.
 통영 남망산공원 정상에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 동상 뒤편으로 충렬사 뒷산인 여황산이 보인다.
ⓒ 김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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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류를 출발한 내 삶의 물길은 돌 틈을 흐르고 계곡을 돌기를 스무해, 어느덧 서울이란 바다에 와 닿았다. 그러는 사이 동백의 그 소녀는 다른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았다. 나는 광화문에 선 이순신 동상 앞, 팍팍한 세상을 향한 사람들의 하소연이 몰려드는 그 곳을 찾는 일이 잦았다.

세상이 탁하다. 나라에 흉한 일이 있으면 물이 흐려진다는 360년 된 충렬사 앞 명정샘 우물엔 빨래하러 오는 발길이 끊긴 지 오래다. 동백꽃 향이 은은하게 이 땅의 상처들 위로 감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순신 장군이 우상의 제단이 아닌 사람들 가까이로 내려와 '백성을 향한 충'을 다하지 않는 무리들을 향해 칼을 휘둘렀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올해도 통영한산대첩축제가 8월13일부터 17일까지 통영 곳곳에서 진행된다. 관심있는 분들에게 의미있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태그:#통영, #통영에세이, #충렬사, #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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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혁'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며 노래 만들고 글을 쓰고 지구를 살리는 중 입니다. 통영에서 나고 서울에서 허둥지둥하다가 얼마 전부터 제주도에서 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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