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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삼도수군 통제영의 중심 세병관
 조선 삼도수군 통제영의 중심 세병관
ⓒ 김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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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시절, 한 친구가 세병관에서 조선시대 보물지도를 발견했다며 같이 다니던 우리 무리를 비밀스럽게 불러 모았다. 세병관 돌 기단 어느 곳에 감춰진 지도를 얼마 전 찾아서 집에 보관하고 있다고 녀석은 조심스레 말했다. 원본은 분실될 염려가 있다며 16절지에 볼펜으로 보물이 숨겨진 장소를 그려와서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세병관은 통영의 제일 중요한 랜드마크이다. '통영'이라는 이름의 유래인 삼도수군 통제영(조선시대 해군본부)의 중심 건물이기 때문이다. 이 통제영을 중심으로 마을이 구획되었고 민초들은 삶에 살을 붙여갔다. 통영은 군사 도시로 출발했다.

나는 세병관과 담 하나를 사이에 둔 통영초등학교를 다녔다. 선생님들은 세병관이 중요한 문화재이니 함부로 담을 넘거나 하지 말라고 하셨다. 당시엔 보물 몇 호였는데 십여 년 전 국보로 승격 지정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흙투성이 우리들에게 세병관은 학교랑 늘 붙어있는 큰 기와지붕의 건물일 뿐이었다. 학교 운동장에서 야구나 축구를 하다가 공이 담장을 넘으면 그곳에 가서 주워 오는 게 우리들 '답사'의 목적이었다.

보물지도를 손에 넣은 그 녀석도 공을 찾기 위해 갔다가 의외의 횡재를 했다며 들떠있었다. 우리는 보물지도가 많이 미심쩍긴 했다. 하지만, 통영이 과거에 군사기지였으니 군대를 위해 비상시에 사용하려고 돈, 무기 등 중요한 물건들을 몰래 숨겨두지 않았겠냐고 우리를 설득했다. 그러면서, 군사기밀이라 지금껏 아무도 몰랐을 테니 우리가 찾아 나서보자고 호기롭게 제안했다.

그러자 옆에서 코딱지를 파던 다른 녀석이 자기 아빠가 얼마 전 땅을 파다가 엽전을 한 무더기 발견했다고 자랑했다. 자기가 사는 태평동 주전골은 조선시대 때 엽전을 만드는 주전소가 있던 곳이어서 그런 일이 가끔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지도 속 장소에도 진짜 뭔가가 있을지 모른다며 보물찾기를 한 번 해보자고 거들었다.

책가방이 무거워지고 6년째 같은 학교 언덕을 오르내리는 게 지겨워지지 않았다면 이 무모한 일을 시작하진 않았을 것이다. 세상엔 참 다양한 학원이 있다는 걸 체득하며 일요일을 잃어가던 우리들은 공부의 공습을 피해 방공호를 찾듯 보물찾기에 나섰다.

지도는 통영의 여기저기를 향하게 했다. 남망산이나 미륵산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곳도 있었지만 달아, 소매물도처럼 가 본 적 없는 곳도 있었다. 이런 곳들은 모두 한 걸음 마다 멈춰 서서 두 번씩 감탄을 내뱉게 했다.

하지만 대충 그려진 그 지도 종이쪼가리로 몇 주째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것을 찾는 데 지쳐갔다. 점점 이탈병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 보물찾기를 진두지휘하던 그 녀석이 홀연 다른 도시로 전학을 가버리면서 우리의 모험은 허무하게 끝났다.

서울 경복궁 경회루, 여수 진남관과 함께 가장 넓은 목조건물로 기록되어 있는 국보 제305호 세병관 전경. 뒤편 담장 바로 너머에 몇 해 전까지 통영초등학교가 있었다.
 서울 경복궁 경회루, 여수 진남관과 함께 가장 넓은 목조건물로 기록되어 있는 국보 제305호 세병관 전경. 뒤편 담장 바로 너머에 몇 해 전까지 통영초등학교가 있었다.
ⓒ 김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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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병관이 지킨 보물을 찾다

몇년 후, 우연히 길에서 그 괘씸한 녀석을 만났다. 너의 보물지도는 지어낸 것이 아니었냐고 내가 물었다. 녀석은 오묘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통영 여기저기를 다니며 우리가 본 것들이 보물이고 비밀병기 아닐까."

해탈한 듯 평온한 녀석의 태도에 당황스러웠지만 이상하게도 화가 나지는 않았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만들어졌지만 통제영은 전쟁이 아닌 평화를 위해 존재했다. '세병'은 은하수를 길어와 무기(병기)를 씻어 영원히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싶다는 두보의 시에서 따 온 말이다. 그래서 세병관에는 피로 물든 세상을 끝내고자 하는 평화의 이상이 담겨있다. 세병관 입구의 지과문(止戈門) 역시 '무기를 거두는 문'이라는 뜻이다.

전쟁이 멈추자 통영은 예술의 도시로 다시 태어났다. 포연이 해무로 바뀌고 핏빛 바다가 제 빛을 찾으면서 그 안의 사람들은, 통영 바다가 만들어 낸 보물같은 작품 속에서 마감시간 없이 삶의 순간 어디에서든 대자연의 전시를 즐겼다. 그리고 그 평화로운 통영 바다를 교과서 삼아 유치환, 박경리, 윤이상 등등 많은 예술가들이 잉태되었다. 군수물자를 만들던 12공방의 장인들은 여염집의 살림살이를 솜씨 좋게 만들었다. 결국 통제영이 지켜낸 건 평화의 바다였고 평화가 쌓이면 인간다움이 자라 예술을 낳았다.

그렇게 세병관은 통영이란 보물을 그려냈다. 보물 사기꾼 녀석의 능청맞은 장난도 나에게 빛나는 보물들로 가슴 속에 사리처럼 남았으니, 그리 나쁜 일은 아니다.

세병관에서 바라 본 통영 바다
 세병관에서 바라 본 통영 바다
ⓒ 김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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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평화의 통영도 역사 앞에서 비극적인 '씽크홀'을 만나기도 했다. 한국전쟁 자체도 처절했지만 특히 아군과 경찰 등에 의한 민간인 대량 학살이 통영에서 벌어졌다.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지난 2009년, 통영 지역에서 적어도 800~900여명의 민간인이 1950년 전쟁 당시 군경 등에 의해 총살당했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희생자들은 대개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이거나 그 가족들이었다. 보도연맹은 이승만 정부가 반공사상 교육을 위해 정부 수립 직후에 만든 기관이다. 처음에는 좌익 인사들이 주로 가입 대상이었다. 하지만 가입자 수가 늘지 않자 정부는 가입하면 양곡과 비료 등을 나눠주겠다며 일반 국민을 유인했다. 공무원들에게는 가입시킨 사람의 숫자가 자신의 실적이었다.

그렇게 많은 평범한 이들이 어느새 보도연맹원이 되었는데, 전쟁이 나자 국가는 이들이 북한을 도울 수 있다며 재판도 없이 집단학살을 시작했다. 희생자 중에는 우익 인사인데도 정치적 의견 차이로 적으로 몰려 끌려간 이들도 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억울한 사연으로 무고한 이들이 죽임을 당했다. 당시에 권력을 가진 이들의 힘이 수십 년 이어져 피해자들은 오랜 세월을 숨죽여 살아야 했다.

'내 손에 들려 있던 즉결처분(사형)자 명단만 해도 800명이 훨씬 넘었어. (중략) 이물(뱃머리)에 차례로 앉히고 뒤통수 숨골에다 대고 '꽝'하고 한방씩 놓았거든. ... (총을 맞고 쓰러지면) 돌멩이를 달아 물속에 밀어 넣었는데 아래로 내려다보니까 물속에서 일렁일렁하다 가라 앉는 거야.'
- 2001년 6월 13일자 부산일보 기사 <[보도연맹원 대학살] ⑨ 통영 학살 관여자 증언>

우리들의 평화는 안녕한가?

대학에 들어올 무렵, 사살된 평화의 기록들을 알게 되면서 자연스레 어린시절 한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세병관 바로 옆, 그러니까 통영초등학교 교문 언덕에는 신령처럼 느티나무 한 그루가 웅장하게 솟아있다. 민방위훈련 사이렌이 울리면 선생님의 인도 아래 우리들은 그 느티나무 아래로 대피하는 연습을 했다. 훈련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를 뒤덮고 있는 나무를 올려다보고 있으면 잎사귀마다 신화를 머금은 듯한 녹음 안으로 폭탄이 끼어들 자리는 없을 것 같았다.

세병관 옆 느티나무. 지난 겨울을 이기고 있던 모습이다.
 세병관 옆 느티나무. 지난 겨울을 이기고 있던 모습이다.
ⓒ 김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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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는 학교 부지 안에 있지만 수백 년간 그 동리 사람들에게 너그러운 그늘을 드리워왔다. 많은 주민이 나무의 품을 애용했다. 그 분들 중에 유독 붉은 낯으로 느티나무를 서성이던 할아버지가 있었다. 늘 술에 취한 듯했다. 아이들은 무서워서 그 할아버지 주변에 다가가지 않았다.

한 친구가 그 할아버지에 대해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학교 옆동네에 사는 할아버지인데 그 동네 어른들도 다들 그 분을 피한다고 했다. 무서워서이기도 했지만 예전에 몹쓸 짓을 해서 사람들이 안 좋게 본다는 것이다.

그 할아버지가 젊었을 때 한국전쟁이 있었고 동네의 여러 젊은이들이 죄 없이 국군, 경찰, 우익청년단 등에게 붙잡혀 가 한산도 앞바다에 수장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 동네엔 같은 날에 여러 집에서 제사를 지냈단다. 그 죽음의 연행을 지휘했던 사람이 붉은 낯의 할아버지였다는 거다.

나는 어느 날 하굣길에 그 할아버지가 느티나무 옆에서 울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얼굴은 더 붉어보였다. 무슨 이유였을까? 학교 앞, 세병관에서 조금 내려오면 어른 키 높이의 높이의 돌벅수(장승)가 서 있다. 돌벅수는 마을의 재앙을 막고 평온을 기원하기 위해 세워진 거라 한다. 붉은 빛이 감도는 기이한 얼굴을 한 돌벅수를 보면 그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세병관 앞 통영 벅수.
 세병관 앞 통영 벅수.
ⓒ 김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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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비인간적인 이유는 총구에는 눈이 없고 탱크에는 심장이 없기 때문이다. 전쟁을 통해 이익을 누리는 권력자들은 평범한 이들의 안녕에 포격을 붓는다. 평화는 나의 삶 속에 타인의 삶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경쟁에 눈 먼 세계는 공존을 학살하고 있다.

세병관의 너른 지붕이, 느티나무의 잎들이 보듬어야 할 야만이 우리 안에 그리고 세계 도처에 여전하다.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마음만 아파하면, 삶터를 빼앗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폭격에 희생되는 광경을 소파에 앉아 환호하며 바라보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결과적으로 다르지 않다.

우리들이 전쟁광들과 다른 존재란 걸 보여주기 위해, 나아가 세상의 야만이 우리의 목까지 서서히 조여 오는 걸 막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평화의 기지 세병관 마루에 앉아 있으면 버려진 포탄 탄피로 만든 학교 종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우리는 언제쯤 과거를 잘 배울 수 있을까?

보물같은 통영 바다를 세상이 함께 누릴 미래를 그려가고 싶다.


태그:#통영, #세병관, #벅수, #평화, #양민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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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혁'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며 노래 만들고 글을 쓰고 지구를 살리는 중 입니다. 통영에서 나고 서울에서 허둥지둥하다가 얼마 전부터 제주도에서 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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