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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 전, 이맘 때 즈음 유라시아 횡단여행을 떠났습니다. 변변한 외국어 실력 없이 오롯이 패기 하나로 떠난 여행이었습니다. 배낭을 짊어지고 낯선 땅을 돌며 보낸 4개월의 시간은 하루하루가 도전의 연속이었습니다. 10여개 국가를 여행했고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늦었지만 서랍 속에 간직했던 묵혀둔 일기장을 공개합니다. - 기자 말

울란우데를 떠날 생각을 하니 아쉬움에 발길이 선뜻 떨어지지 않는다. 아직 가보지 못하고 미처 보지 못한 것들에 대한 아쉬움과 서운함에 짐을 꾸리는 동작이 굼뜨다.

슬류댠카 기차역을 떠나가는 시베리아 횡단열차.
▲ 야간 열차 슬류댠카 기차역을 떠나가는 시베리아 횡단열차.
ⓒ 정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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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견에 쫓겨 떠난 울란우데

현지시각으로 2013년 1월 21일 오후 2시 30분, 주인 아줌마에게 작별을 고했다. 주방에 있던 홍콩 친구에게도 이별 인사를 전한 뒤 숙소를 빠져나와 기차역으로 향했다. 어깨를 짓누르는 짐의 무게보다 발길이 더 무겁다. 이런 감정을 알아차린 것일까? 기차역으로 향하는 길, 대여섯 마리의 유기견 무리가 사나운 이빨을 드러내고 짖어대며 따라와 때 아닌 줄행랑을 쳐야 했다.

끈질기게 쫓아오는 개떼를 겨우 따돌리고 나니 등 뒤가 축축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안도감보다는 개들에게 사냥감 취급을 당했다는 생각에 자조 섞인 허탈한 웃음만 나왔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울란우데에 도착한 첫날도 숙소 앞에 모여 있던 개떼로부터 위협을 당했다. 아무래도 여행수첩에 '울란우데에서는 유기견 조심'이라고 써야겠다.

기차역 대합실은 털모자를 쓴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두꺼운 털옷을 입은 그들 곁에는 덩치만큼이나 큰 가방이 있었다. 한 귀퉁이에 가방을 내려놓고 한숨 돌리기 위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때, 대합실로 군견을 앞세운 두 명의 군인이 들어왔다. 방금 전까지 개떼에 쫓겼기에 괜스레 긴장했다. 몸을 곧게 세우고 군견의 행동을 예의주시했다. 내 앞을 스쳐지나 갔지만 다행히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한 번 겁을 먹은 뒤라, 신경이 쓰인다.

드디어 타야 할 열차가 플랫폼에 정차했다. 이제야 겨우 마음이 편하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올라 좌석을 찾아가 짐을 내려놓자 긴장이 풀렸다. 열차가 출발하자 금세 기진맥진 상태가 됐다.

울란우데에서 슬류댠카로 향하는 길목에서 마주하게 된 바이칼 호수의 풍경. 꽁꽁 얼어버린 모습이 이색적이다.
▲ 꽁꽁 언 바이칼 호수 울란우데에서 슬류댠카로 향하는 길목에서 마주하게 된 바이칼 호수의 풍경. 꽁꽁 얼어버린 모습이 이색적이다.
ⓒ 정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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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의미 깨닫게 해준 울란우데를 그리다

깜박 졸았다. 맥이 풀리니 졸음이 밀려와 어느새 잠이 들었다. 창밖 풍경을 감상하기 위해 통로 칸 좌석을 예약했는데, 잠을 깨보니 차창 밖이 어스름하다. 어렴풋이 보이는 창문 넘어 꽁꽁 얼어버린 바이칼 호수가 눈에 들어온다. 마치 바다가 얼어버린 듯하다. 저 멀리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까지 온통 하얗다. 그야말로 겨울왕국이다.

스치듯 지나는 창밖 풍경을 보고 있노라니 울라우데서 보낸 3일간의 추억이 떠오른다. 되돌아보면 울란우데는 참 많은 경험을 선사한 여행지다. 낯선 땅에서 홀로 인터넷 정보에 의지해 숙소를 찾아가고 말이 통하지 않는데 기차표를 예약하는 데도 성공했다. 거기다 좋은 인연을 맺는 기회까지 얻었으니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경험이었다.

비록 아쉬움을 뒤로하고 떠나야 했지만 새로운 여행지를 향해 떠나는 설렘을 느끼게 한 도시. 가만히 생각해보면 어쩌면 여행은 아쉬움을 남겨두고 오는 일인 듯하다. 그러하기에 또 우리는 여행을 떠날 수 있고, 일상을 살아가는 데 힘을 얻는 게 아닐까? 창문 밖으로 저물어 가는 하늘이 더 이상 쓸쓸해 보이지만은 않았다.

드라큘라 성을 연상케 하는 슬류댠카 기차역의 모습. 왠지 모르게 음산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 슬류댠카 기차역 드라큘라 성을 연상케 하는 슬류댠카 기차역의 모습. 왠지 모르게 음산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 정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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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작정 찾아간 슬류댠카... 귀인을 만나다

기차로 5시간을 달려 마침내 슬류댠카에 도착했다. 바이칼 호수를 따라 운행되는 동네열차를 탈 수 있는 출발지다. 열차의 정식 명칭은 환바이칼 열차(Circum-Baikal railway)이다.

오후 9시 무렵, 열차에서 내리자 칠흑 같은 어둠이 사방을 뒤덮고 있다. 기차역 주변의 한줄기 빛만이 어둠을 밝히고 있다. 불빛에 비친 기차역은 드라큘라 성을 연상케 하는 외형이다. 왠지 모르게 음산한 기운이 감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가까운 미래에 닥칠 난관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마냥 들떠 있었다.

대합실로 향하는 문을 당기자 '삐거덕' 소리가 작은 기차역 안을 가득 메웠다. 텅 빈 대합실에 발을 내딛자 발자국 소리가 도드라지게 울려 퍼진다. 잠시, 멍한 상태가 됐다.

울란우데 숙소서 인터넷으로 슬류댠카에 관한 정보를 이 잡듯 뒤쳤다. 하지만 간단한 동네정보는 고사하고 숙박정보도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오로지 환바이칼 열차와 관련된 정보가 전부였다. 일단 '몸으로 부딪혀보자'는 심정으로 이곳에 오긴 했으나 막막하다. 다른 기차역과 달리 와이파이도 잡히지 않는다. 무작정 떠난 여행이지만 무모한 여정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갑자기 걱정보다는 두려움에 신경이 곤두선다.

망연자실하고 있던 그 순간, '삐거덕'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쫓아 눈을 돌리니 제복을 입은 군인 두 명이 대합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자동반사적으로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나도 모르게 어느 틈엔가 그들 앞에 섰다.

"즈드라스부이쩨, 빠마기찌 므네 빠좔스떠(안녕하세요, 저 좀 도와주세요)."

점퍼 안주머니에서 재빨리 회화책을 꺼내 띄엄띄엄 읽었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그에게 회화책을 들이밀고 손가락으로 문장을 가리킨다. 그제야 러시아 군인은 이해한다는 표정을 짓는다. 얼굴 옆으로 두 손을 모아 가져가며, 잠을 자는 모습을 취했다. 러시아 군인이 고개를 끄덕인다. 행색을 보고 짐작했는지 '뚜리스트(여행객)?'라고 묻는다. 환희에 찬 얼굴로 '다(дa 네)'를 연신 내뱉었다. 그러자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며, 매표소로 날 이끌었다.

갑작스레 이루어진 만남이지만 러시아 군인은 내게 마치 하늘에서 내려준 귀인이었다. 그의 도움으로 역사 안에 마려된 게스트하우스에 머물게 됐다. 물론 대화가 어려워 애를 먹었지만 어쨌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또, 환바이칼 열차에 관한 정보도 얻을 수 있었다.

내가 인터넷서 찾은 정보에 의하면 환바이칼 열차는 '화요일과 금요일'에 두 차례 운행됐다. 하지만 러시아 군인의 도움으로 찾은 열차운행 시간표를 살펴보니 '월요일과 목요일'에 운행된다고 적혀 있다. 도착한 날은 월요일 밤, 앞으로 3일간 이곳에서 머물러야 할 듯하다.

매표소 직원에게 숙박비를 지불하고 역사 안 게스트하우스로 향했다. 투숙객이 없어 두 개의 침대를 혼자 사용하게 됐다. 대충 짐을 풀고 나니 슬슬 허기가 느껴진다. 저녁을 굶었다.

다시, 러시아 군인을 찾아갔다. 그는 역사에서 근무하는 군인으로 보였다. 그에게 다가가 굶주린 배를 잡고 숟가락으로 떠먹는 시늉을 보였다. 역시, 바디랭귀지는 세계 공통어다. 그는 날 이끌고 철길을 가로질러 기차역 반대편의 한 건물로 데리고 갔다. 철도청 직원들이 밥을 먹는 구내식당 같았다. 식당에 들어서자 서너 명이 밥을 먹고 있다. 나를 보자 일순간 시선이 쏠린다. 주방에 있던 아주머니도 밖을 내다본다. 갑자기 러시아 군인에게 질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러시아 군인의 도움으로 철도청의 구내식당서 먹은 저녁식사. 그동안 먹어 본 러시아 식단 중 단연 최고의 만찬이었다.
▲ 최고의 만찬 러시아 군인의 도움으로 철도청의 구내식당서 먹은 저녁식사. 그동안 먹어 본 러시아 식단 중 단연 최고의 만찬이었다.
ⓒ 정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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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달픈 하루 끝에 맛본 최고의 만찬

쟁반에 음식그릇을 가득 채웠다. 주방 아주머니는 이것저것 음식을 권하며, 그릇에 담았다. 지불한 돈에 비하면 음식이 풍성하다. 좌석에 앉아 허겁지겁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꿀맛이다. 그동안 먹어본 식단 중 최고의 만찬이다. 설탕을 가득 넣은 홍차까지 마시자 배가 뜨끈뜨끈하고 볼록해졌다. 이제야 살 것 같다.

만찬을 즐긴 뒤 숙소로 돌아와 침대에 눕자 잠이 물려온다. 내일은 근처에 있는 다른 숙소를 알아봐야 할 것 같다. 게스트하우스는 시간당 요금이 책정돼 비싸다. 아무래도 가까운 마을에서 환바이칼 열차가 출발하는 목요일까지 머물러야겠다. 참, 고달픈 하루였다.

덧붙이는 글 | 여행과 관련한 자세한 정보는 오블(http://blog.ohmynews.com/kaos80)에서 확인해 보실 수 있습니다.



태그:#러시아 여행, #환바이칼 열차, #슬류댠카, #시베리아 횡단열차, #바이칼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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