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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드 인 차이나'(Made in China) 라는 문구를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아마도 싸구려라는 이미지나 '마데인차이나' 같은 조롱 섞인 호칭이 생각날지 모르겠다. 우리가 쓰는 생필품의 70~80% 이상이 중국산이 된 지금에도 이 문구가 주는 인식이 그런 것은 왜일까. 그럼 정말 중국산에 그런 부정적 이미지를 덧씌우는 것이 온당한 것일까.

그럼 우리의 중국산에 대한 인식은 정당한 것이며 문제는 없는 것일까. 필자는 중국에 10년가량 거주했기 때문에 'Made in China'는 가장 친숙한 환경이었다. 또 기사나 방송을 통해서 이 문제를 항상 밀접하게 생각했다.

1999년 중국으로 건너간 후 내 생활의 무대는 중국이었다. 물론 살던 마을에는 한국 물품 슈퍼들이 많아서 원한다면 수입된 한국 물품을 살 수 있었다. 당연히 한국보다 비싼 가격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이용하는 대부분의 공산품은 당시 자리를 잡기 시작했던 지아러프(家樂福, 까르푸)나 톈진의 유명한 생필품 시장인 따후통(大胡通)에서 샀다. 식료품도 집 근처의 작은 시장이나 마트를 이용했다. 사실 살아가면서 한국과 중국에서의 차이는 느끼지 못했다.

내가 겪은 '메이드 인 차이나'

가을에는 옌타이, 봄에는 샤먼에서 중국의 대표적인 농산물 박람회가 열린다. 이곳에 가면 중국의 농산물 수준을 알 수 있다
▲ 옌타이 농산물박람회장의 전시물 가을에는 옌타이, 봄에는 샤먼에서 중국의 대표적인 농산물 박람회가 열린다. 이곳에 가면 중국의 농산물 수준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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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 필자는 '메이드 인 차이나'를 직접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2005년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메이드 인 차이나' 인식의 상당 부분을 제공한 해였다. 중국산 납꽃게, 납김치·기생충김치와 장어·송어·향어의 발암물질 파동 등이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벌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필자는 중국에서 한국 방송사들의 현지 취재 코디네이터 역할을 많이 했다. 이 때도 한 방송사의 피디가 전화를 걸어왔다. 중국산 제품의 문제를 취재하고 싶은데, 같이 해줄 수 있는가를 묻는 전화였다. 당시 우리나라에 수출되던 중국산 김치의 대부분은 산둥 반도에서 생산되고 있었다.

얼마 후 우리는 산둥에서 만나서 본격적인 취재에 돌입했다. 취재진은 약간은 고발성 프로그램 제작팀에 속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가장 담고 싶어하는 것은 비위생적이고, 문제의 약품 등을 사용하는 김치공장의 실태였다. 물론 미리 그런 시각으로만 방송을 할 수 없기에 일본에 물건을 수출하는 식품공장이나 수산물 가공공장의 취재도 포함돼 있었다.

칭다오를 방문해 수출보다는 중국 내수를 주로 하는 고추장·김치 공장을 찾았다. 취재윤리에는 맞지 않지만 수입업체자라고 하고 그 공장을 찾았다. 공장을 둘러봤다. 공장의 제조환경이 대기업처럼 철저하지도 않았지만 크게 나쁘지도 않았다.

또 우리는 고추장에 쓰는 화학 첨가물 등을 찾기 위해서 많은 공을 들였다. 그런데 그 공장에서 그런 모습을 찾기 어려웠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보다 일조량도 많고, 강수량도 적은 산둥반도의 몇 지역에서 나는 고춧가루는 아주 품질이 좋았다.

필자의 고향도 태양초 고추로 유명한 곳이라 고추의 품질을 좀 아는데, 고향의 고추보다 색깔이 더 좋았다. 심지어는 너무 색깔이 좋아서 좀 질이 떨어지는 희아리(약간 상한 채로 말라서 희끗희끗하게 얼룩이 진 고추)를 섞어서 제조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김치 등 음식재료에서 고춧가루는 가장 중요한 재료다. 특히 '고춧가루에 문제가 있는 색소를 첨가한다'는 말이 있어서 이 촬영은 굉장히 중요했다.

"중국 정부가 기준 강화할 텐데..."

칭다오는 물론이고 옌타이나 웨이하이 등을 다니면서 이런 현장을 촬영해야 했다. 그때 안 새로운 것이 바로 파프리카 색소였다. 우리나라에도 자연식으로 많이 먹는 파프리카의 붉은 물질은 식용색소로 사용되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이 지역의 식품첨가물 시장을 많이 돌았지만 '파프리카 색소'를 구입하기 쉽지 않았다.

또 현장에서 만나는 중국 농수산물이나 식료품 가공현장은 경제 원칙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가령 1톤에 1000달러가량에 수출하는 일본용 김치는 식품 원재료의 생산부터 가공까지 완벽한 위생상태로 관리하고 있었다. 한 일본 기업은 씨앗의 농약 잔류량부터 농장의 비료나 농약사용 관리를 통해 문제가 없는 원재료를 수급한다. 또 옌타이에 있는 가공공장은 취재진조차 완전한 위생 장구를 장착하게 한 후 공장에 들어가게 했는데, 생산 공장안에는 각종 이물질 검사장비부터 첨단 생산장비가 갖춰져 위생 문제를 철저히 차단했다.

반면에 우리나라 사람이 운영하는한 식품 공장은 불거진 위생문제로 가동을 중지한 상태였는데, 심하지는 않았지만 어떻든 낙후한 상태에서 김치를 생산한 것이 눈에 띄었다. 이들이 당시 한국에 수출하던 김치는 단가가 톤당 200~300달러도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원가를 맞추기 위해서는 위생은 생각하기 쉽지 않은 것은 말한 나위도 없다. 이런 김치공장은 아침 농산물 시장에서 싸게 김치를 사와서, 담을 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세척도 어렵고, 이물질 검사도 거의 하지 못했다.

당시 웨이하이의 김치공장을 주도하던 이는 필자랑 나이가 비슷한 홍 사장이었다. 그는 취재진에게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사태가 지나고 나면 결국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 죽을 겁니다. 중국 정부는 문제를 피하기 위해 위생 기준이나 수출 기준을 강화할 텐데 우리나라 사람들 가운데 그 수준 맞출 곳 없습니다. 그럼 결국에는 큰 공장을 가진 중국기업들만 살아남을 겁니다."

사실 그해 중국산 식품 파동은 용두사미로 끝났다. 우리나라가 지나치게 이 문제를 확대하자 중국 정부는 화학제품이나 휴대전화 제품의 수출과 연계했고 우리 정부는 바로 이 문제를 유야무야했다. 순간적으로 중국에서 수입하는 김치량 등이 줄었지만, 얼마 후에는 유야무야됐다. 중국산 김치가 없을 경우 한국내 김치가격은 폭등에서 장사 자체가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후에도 우리의 김치 수입은 줄지 않고, 오히려 늘었다.

어떻든 한국으로서는 큰 학습효과를 준 사건이었다. 역으로 2008년에는 한 식품회사의 제품에서 생쥐 머리가 발견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런데 이 회사는 '원재료가 중국 칭다오의 한 공장에서 공급됐다'고 밝혔다. 그런데도 이 사건은 중국과 별 파장이 없었다. 김치사건의 충격이 준 학습효과인데, 좀 씁쓸한 경우였다.

우리가 가진 중국산에 대한 인식은 일견 타당한 것도 있다. 실제로 중국은 같은 상품이라도 너무나 다른 가격대에서 제품이 출시된다. 이는 작은 이윤만 남아도 많이 팔아서 남기겠다는 저지앙 상인부터 시작해 수많은 장사꾼들과 생산공장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메이드 인 차이나'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구성원들이다.

'저질 물품 생산 근원지'로 인식이 굳어진 이유

중국 실크는 지금도 품질에 따라 엄청난 가격에 팔린다. 사진은 난루꾸샹의 한 실크매장
▲ 베이징의 현대식 실크 판매장 중국 실크는 지금도 품질에 따라 엄청난 가격에 팔린다. 사진은 난루꾸샹의 한 실크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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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중국이 세계에 존재를 알린 것은 진(秦)나라 때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도량형도 통일하고, 화폐기능도 만들어서 무역의 개념을 심어 놓았다. 이 때문에 '차이나'(CHINA)라는 중국의 영문명도 진(秦)의 중국 발음인 '친'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그런데 유럽에서 처음 접한 중국 제품은 무엇일까. 우선 가장 빨리 접한 물건이 바로 비단이다. 장건(~B.C. 114)이 실크로드의 첫 걸음을 열었지만 당대가 돼서야 동서양은 본격적인 물건 교류가 시작됐다.

이때 동양에서 서양으로 건너간 물건이 바로 비단이나 당삼채 같은 도자기였다. 당삼채는 지금도 예술성이 인정받는 최고의 도자기 제품이다. 비단은 로마제국 귀족들에게 최대의 사치품이었고, 로마의 재정을 무너뜨릴 정도로 유행했다. 물론 도자기도 마찬가지였다. 이후 중국에서의 정치적 격변과 서양에도 누에가 전해지면서 중국산 제품이 유럽으로 가는 것은 다양한 곡절을 겪었다.

이후 중국산 제품으로 서양과 인연을 맺은 것이 바로 차(茶)다. 차는 고대부터 유럽으로 건너갔지만 특히 유럽 국가들이 산업혁명으로 부흥한 이후에 집중적으로 건너가기 시작했고, 재정악화의 주범이 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영국 등은 아편을 통해 이 무역 균형을 맞추려 했고, 아편전쟁 등 갈등이 되기도 했다. 사실 이때만해도 서양에서 중국산이란 굉장히 고급스러운 제품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런데 현대에는 중국의 산업화가 늦어지면서 상대적으로 저질 물품의 생산 근원지로 인식이 바뀌게 됐다.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이는 너무도 뻔한 일이다. 중국의 산업구조가 선진화되고, 노동 비용도 올라가면서 중국산 제품의 비용도 상승한다. 지금처럼 물류 비용이 높은 시대에 저가 제품이 세계를 상대할 수는 없다. 중국 역시 그 문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미 베트남이나 인도 등이 그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중국 역시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철저히 알고 있다. 그렇게 되면 이제 우리가 애용하던 저가의 중국산 제품은 좀 더 비싸지만 좀 더 품질 좋은 상품으로 대체될 것이다.

이런 구조는 굳이 한국과 중국 관계에서만 아니다. 중국은 미국의 생필품 생산기지기도 했다. 이런 상황이 고착되면서 중국은 4조 달러의 외환보유고를 가진 나라가 됐다. 중국 역시 이런 상황을 더 이상 원하지 않는 모습이다.

중국의 상업은 이미 수천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남방 상업의 중심이었던 광저우의 천년 상업거리
▲ 광저우 천년 상업거리 중국의 상업은 이미 수천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남방 상업의 중심이었던 광저우의 천년 상업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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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중국, #메이드 인 차이나, #마데인차이나,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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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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