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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링에서 케체페리로 가는 산 중턱.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옥수수를 쌓아놓고 껍질을 까고 있다. 옥수수 껍질을 까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일가친척. 갱톡에서 사업을 하는 부부도, 네팔에서 트레킹 가이드를 하는 사촌오빠도, 옥수수 추수를 위해 고향으로 돌아와 수확한 옥수수를 열심히 손질 중이다.
 펠링에서 케체페리로 가는 산 중턱.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옥수수를 쌓아놓고 껍질을 까고 있다. 옥수수 껍질을 까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일가친척. 갱톡에서 사업을 하는 부부도, 네팔에서 트레킹 가이드를 하는 사촌오빠도, 옥수수 추수를 위해 고향으로 돌아와 수확한 옥수수를 열심히 손질 중이다.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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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은 호텔에 맡기고 가자. 트레킹 끝나면 다시 펠링으로 와서 짐 챙기면 되지. 편하고 좋잖아."

'현명한 아내'인 내가 말했다.

"왜 만날 편한 것만 찾아? 넌 그게 문제야. 귀찮고 어렵고 골치 아픈 건 피하려는 거. 지금 우리가 편하자고 이러고 있는 게 아니잖아? 시킴에서 나가면 바로 히말라야 트레킹 할 건데, 그때도 배낭을 들고 몇날 며칠을 다녀야 한다고. 벌써 편한 것만 찾고 힘든 건 무조건 피하면 그땐 어떻게 되겠어?"

'지지 않는 남편'인 더스틴이 말했다.

"야 너! 기차역에서 노숙하고, 이틀 내내 기차만 타고, 밤 버스 타고, 그렇게 여기까지 온 네 아내한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더스틴의 한마디에, 현명한 아내는 어리광부리고 편한 것만 찾는 시답잖은 인간으로 전락했다. 하여간에 그놈의 배낭 연습. 말레이시아에 도착한 여행 첫날에도 그랬었지. 인도에서는 매일 배낭을 들고 다녀야 한다면서, 내 가방을 맡긴 사물함이 반 이상 비었는데도 종일 고집스럽게 무거운 배낭을 메고 다녔지. 그때 그렇게 '똥고집'을 부리던 더스틴이, 다시 내 앞에 등장했다. 나흘에서 닷새가 걸리는 시킴 트레킹을 떠나는 길이다.

닷새 걸리는 시킴 트레킹 떠나는 길

펠링에서 타쉬딩까지, 나흘에서 닷새가 걸리는 시킴 트레킹을 떠난다. 호텔에서 받은 흑백 지도와 방명록의 정보들을 모아본 바로, 케체페리 마을까지 가는 오늘은 총 29km, 7시간의 트레킹이다. 지름길을 따라간다면 5시간 만에 돌파할 수 있는 코스다.
 펠링에서 타쉬딩까지, 나흘에서 닷새가 걸리는 시킴 트레킹을 떠난다. 호텔에서 받은 흑백 지도와 방명록의 정보들을 모아본 바로, 케체페리 마을까지 가는 오늘은 총 29km, 7시간의 트레킹이다. 지름길을 따라간다면 5시간 만에 돌파할 수 있는 코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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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게스트북에는 시킴 트레킹에 관한 정보와 견문록들이 가득 적혀 있었다. 대부분의 트레커들은 펠링에 있는 호텔에 짐을 맡기고 트레킹을 떠난 듯했다. 트레킹 마지막 마을인 타쉬딩에서 지프를 타고, 다시 펠링으로 돌아와 짐을 챙겨 떠나는 거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무거운 짐을 호텔에 던져버리고, 사뿐한 어깨로 기분 좋은 트레킹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 내 옆에 이 고집쟁이만 없다면.

"논점이 그게 아니잖아. 우리는 지금, 시킴 트레킹에 배낭을 메고 가느냐, 안 메고 가느냐를 결정하는 거라고. 지금까지 누가 더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겨루는 게 아니야."

하여간 말 잘하는 남자랑은 결혼하는 게 아니었어….

"좋아. 그럼 내가 조금 더 들게. 네 가방에서 짐을 좀 덜자. 내가 9kg 메고, 네가 5kg 메면 어때.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 그건 좋아. 그런데 내가 이거 들고가다 너한테 어떤 원망을 하게 될지는 나도 몰라."
"오 노. 제발 그러지 마. 원망하고 비난하지 않기로 했잖아. 내 탓도 아니고 네 탓도 아니라고. 내가 도와줄 수는 있지만, 결정은 각자가 하는 거고 책임도 각자가 지는 거야. 진심으로 하기 싫은 거라면 지금 말해." 

하여간 이 말 잘하는 놈…. 원망할 틈마저 싹둑 잘라버리는 매정한 놈…. 나는 입을 삐죽거리며, 속을 든든히 채울 야채 볶음밥을 열심히 오물거렸다. 호텔에서 받은 흑백 지도와 방명록의 정보들을 모아본 바로, 오늘은 총 29km, 7시간의 트레킹이다. 지름길을 따라간다면 5시간 만에 돌파할 수 있는 코스다. 오늘은 첫날이니 욕심부리지 않고 지름길만 따라가겠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무슨 짓을 해도 7시간 안에는 도착하겠지.

트레킹에서 만난 마을 사람들. 좁은 계단 길 사이사이는 아담한 집과 논밭이 장식하고 있다. 계단을 아장아장 오르는 꼬마 아이를 지나, 우리를 수상쩍게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을 지나, 닭들과 아기 염소 무리가 뛰어노는 산허리를 거쳐, 채소밭의 향긋한 냄새를 따라 산 아래 도로에 도착했다.
 트레킹에서 만난 마을 사람들. 좁은 계단 길 사이사이는 아담한 집과 논밭이 장식하고 있다. 계단을 아장아장 오르는 꼬마 아이를 지나, 우리를 수상쩍게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을 지나, 닭들과 아기 염소 무리가 뛰어노는 산허리를 거쳐, 채소밭의 향긋한 냄새를 따라 산 아래 도로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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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발로 걸어야 하는 불운한 우리 곁으로, 이제 막 펠링에 도착한 지프가 멈춰 섰다. 지프에서 흘러나온 행복한 관광객들 사이를 빠져나와 한 시간여를 걸었다. 지도를 들춰봤다. 어찌 된 영문인지, 첫 번째 지름길로 빠지는 길은 지나친 지 오래다. '다랍'이라는 마을에 도착해 다음 지름길을 찾았다.

가파른 계단 길을 따라 산 아래로 난 도로까지 내려가는 길이다. 좁은 계단 길 사이사이는 아담한 집과 논밭이 장식하고 있다. 계단을 아장아장 오르는 꼬마 아이를 지나, 우리를 수상쩍게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을 지나, 닭들과 아기 염소 무리가 뛰노는 산허리를 거쳐, 채소밭의 향긋한 냄새를 따라 산 아래 도로에 도착했다.

"너무 좋다! 트레킹 하길 잘한 거 같아."

첫 번째 목적지인 림비 폭포에 도착해 내가 말했다. 산 위에서와 아래에서의 기분이 이렇게 다르다니. 배낭을 던져버리고 그 위로 걸터앉았다. 시킴의 명소라고 소문난 림비 폭포는, 별로 높지도 않은 절벽에서 시작되는, 졸졸 새는 것 같다고 말해도 무방할 가녀린 물줄기에 불과했다.

우리가 휴식을 취하는 사이, 림비 폭포를 보러 온 관광객들을 실은 지프 한 대가 도착했다. 이 폭포 따위를 보러 지프를 타고 왔단 말이야? 그 예쁜 마을들은 다 지나치고? 역시 내 두 발로 직접 걷는 트레킹은 큰 보람이 있군. 나는 스스로 어깨를 다독이며, 우리의, 아니 나의 결정을 자랑스러워했다.

첫 번째 목적지인 림비 폭포에 도착해 내가 말했다. 산 위에서와 아래에서의 기분이 이렇게 다르다니. 배낭을 던져버리고 그 위로 걸터앉았다. 시킴의 명소라고 소문난 림비 폭포는, 별로 높지도 않은 절벽에서 시작되는, 졸졸 새는 것 같다고 말해도 무방할 가녀린 물줄기에 불과했다.
 첫 번째 목적지인 림비 폭포에 도착해 내가 말했다. 산 위에서와 아래에서의 기분이 이렇게 다르다니. 배낭을 던져버리고 그 위로 걸터앉았다. 시킴의 명소라고 소문난 림비 폭포는, 별로 높지도 않은 절벽에서 시작되는, 졸졸 새는 것 같다고 말해도 무방할 가녀린 물줄기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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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나선 길. 폭포에서 시작해 개울을 따라 이어지는 림비 마을은 끝없이 계속됐다. 산길이 아닌 도로를 지나는 터에 수월하게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건 큰 착각이었다. 오히려 수월한 게 독이었다. 반듯하게 깔린, 끝이 보이지 않는 도로 길을 몇 시간이고 걷는 건 지루한 고역이었다. 심약한 마음이 금세 태도를 바꿨다. 불운한 마음으로 펠링을 떠났던 나는, 림비 폭포에 도착했을 땐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만, 다시 두 시간 만에, 나를 비롯한 세상 모든 것을 저주하기에 이르렀다.

도대체 왜 난 이런 짓을 하고 있는가. 얌전히 앉아만 있으면 아무 힘들이지 않아도 목적지까지 데려다 주는 차도 있고, 하늘을 나는 비행기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자전거도 있고 심지어 말이라도 탈 수 있는 마당에. 림비 폭포를 찍고 다음 마을로 향하던 지프가, 우리를 지나치며 얼굴에 먼지 다발을 뿜어냈다. 아, 나는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는가. 이 먼 길을, 왜 굳이, 이 무거운 배낭까지 메고, 내 두 발로 걷고 있는 거란 말인가. 이 길의 끝은, 제기랄, 어디인가!

끝없던 림비마을의 끝에서, 카체페리 호수까지 21km가 남았다는 표지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걸으려던 길이 29km인데. 고작 8km를 왔단 말인가. 펠링에서 이곳까지 이어졌던 그 영원한 길을, 세 번 넘게 걸어야 이 고통이 끝난단 말인가. 해로 뜨겁게 달궈진 검은 머리 사이로, 미지근한 땀이 흘러내렸다. 불평해봐야 소용없다. 누가 데려다 주지 않는다. 더스틴이 나를 업어다 줄 것도 아니다. 내 두 발로, 이 배낭을 이어지고 가야 한다. 끝까지.

길은 29km... 고작 8km 걷고 후회가 밀려오다니

대부분의 트레커들은 펠링에 있는 호텔에 짐을 맡기고 트레킹을 떠난다. 트레킹 마지막 마을인 타쉬딩에서 지프를 타고, 다시 펠링으로 돌아와 짐을 챙겨 떠나면 되기 때문. 고집쟁이 더스틴의 강력한 주장으로 우리는 모든 짐을 지고 트레킹을 떠났다.
 대부분의 트레커들은 펠링에 있는 호텔에 짐을 맡기고 트레킹을 떠난다. 트레킹 마지막 마을인 타쉬딩에서 지프를 타고, 다시 펠링으로 돌아와 짐을 챙겨 떠나면 되기 때문. 고집쟁이 더스틴의 강력한 주장으로 우리는 모든 짐을 지고 트레킹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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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킹 도중 마주한 마을
 트레킹 도중 마주한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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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오르막길. 우리가 지나쳐 온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내려다보는 산 중턱.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옥수수를 쌓아놓고 껍질을 까고 있다.

"저쪽으로 가면 되는데 아직 한 시간은 더 가야 해요. 갈 길도 먼데, 좀 쉬어 가시죠."

길을 물었더니 마당 한 쪽에 서 있던 아저씨가 재빠르게 의자 두 개를 가져다준다. 옳거니. 우리는 배낭을 던져버리고 의자에 걸터앉았다. 옥수수 껍질을 까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일가친척. 갱톡에서 사업을 하는 부부도, 네팔에서 트레킹 가이드를 하는 사촌오빠도, 옥수수 추수를 위해 고향으로 돌아와 수확한 옥수수를 열심히 손질 중이다.

"예스 슈가, 노 슈가? (설탕 넣을까요 말까요?)" 
"예스 슈가! (설탕 듬뿍!)" 

피로엔 설탕이 최고지. 우리는 일가친척 무리에 섞여 앉아, 아주머니가 바구니 한가득 내어준 고구마와 달짝지근한 홍차를 삼켰다. 북인도에서였다면 고구마 바구니를 받아들자마자 돈을 원하는 건 아닌지 의심부터 했을 텐데.

산속 마을 사람들은 마음씨도 더 착할 거라는 나의 짐작은 틀린 게 아니었나 봐. 아니, 사람들이 아니라 내 마음이 변한 걸지도. 모두가 계산적으로 접근해 날 속이려 한다는 나의 색안경이 헐거워지고 있는 걸지도. 하긴, 종일 먹어도 다 못 먹을 고구마를 바구니 한가득 내어주는 이 사람들이 사기를 쳐봤자 얼마나 칠 거야. 더러운 옷 쪼가리 몇 개 든 내 배낭을 도둑맞아봤자 뭘 잃을 게 있을 거고. 

가파른 계단길이 산 위로 이어졌다. 지름길인 게 틀림없다. 나는 오르막길의 고통을 빨리 해치워 버리기 위해, 숨도 안 쉬고 계단을 올랐다.
 가파른 계단길이 산 위로 이어졌다. 지름길인 게 틀림없다. 나는 오르막길의 고통을 빨리 해치워 버리기 위해, 숨도 안 쉬고 계단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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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달한 홍차로 에너지를 주유한 우리는 다시 힘을 내어 길을 나섰다. 무거운 몸과 배낭을 이어진 두 발이 찡하게 울부짖는다. 카체페리 호수까지 6km. 가파른 계단길이 산 위로 이어졌다. 지름길인 게 틀림없다.

나는 오르막길의 고통을 빨리 해치워 버리기 위해, 숨도 안 쉬고 계단을 올랐다. 그러기를 30여 분. 오르막길은 계속 이어졌다. 해에서 떨어진 불덩어리가 내 몸으로 녹아내리는 듯, 온몸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괜찮다. 이 길만 끝나면 지름길도 끝날 거다. 호수도 금방 나올 거다. 계단 끝에 자리한 집에서, 땀 한 방울 없이 뽀얀 얼굴을 한 여자아이 하나가 재밌다는 듯 우리를 내려다봤다. 시뻘건 얼굴을 땀으로 뒤집어쓴 나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아이를 올려다봤다.

"저기, 헉, 헉, 호수…. 호수가 이쪽 맞죠?" 

물벼락을 맞은 빨간 괴물 같은 나를 보더니 아이가 대답했다.

"호수? 카체페리 호수 말하나요? 호수는 이 산이 아니고 저 산인데. 헤헤." 

뭐라고! 이 산이 아니라니! 이 산으로 진격! 했다가 이 산이 아닌가 봐! 하고 말을 바꾼 나폴레옹이 된 꼴이라니! 우리는 망연자실하게 아이를 바라봤다. 아이는 미안한 마음에 차마 웃지는 못하고 입술을 씰룩거렸다. 그래. 웃었다가는 이 얼굴 빨간 괴물에게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르니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길을 잘못들었다. 누가 데려다 줄 것도 아니다. 내 두 발로 다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산길을 다시 내려갔다. 호수까지 4km. 이 산이 아닌 저 산에서 힘을 다 빼버린 우리는, 경미한 오르막길에도 힘이 들어 질척대며, 고통을 천천히 음미하며, 마지막 4km를 걸어냈다.
 길을 잘못들었다. 누가 데려다 줄 것도 아니다. 내 두 발로 다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산길을 다시 내려갔다. 호수까지 4km. 이 산이 아닌 저 산에서 힘을 다 빼버린 우리는, 경미한 오르막길에도 힘이 들어 질척대며, 고통을 천천히 음미하며, 마지막 4km를 걸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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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해에 달궈진 목덜미를 스쳤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이라지만 이렇게 고생할 것까진 없지 않은가. 머리끝까지 솟구친 피가 다시 발아래로 떨어지는지, 징하게 붓는 느낌이 났다. 손도 퉁퉁 부었다. 어쩌겠나. 이미 올라와 버린 산인 걸. 지름길을 힘겹게 올라온 고생이 땅을 치게 아깝다만 어쩌겠는가.

여기 머물 수는 없지 않은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누가 데려다 줄 것도 아니다. 내 두 발로 다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산길을 다시 내려갔다. 호수까지 4km. 이 산이 아닌 저 산에서 힘을 다 빼버린 우리는, 경미한 오르막길에도 힘이 들어 질척대며, 고통을 천천히 음미하며, 마지막 4km를 걸었다.

지름길로 가면 5시간, 무슨 짓을 해도 7시간이면 도착할 예정이던 카체페리 마을에 닿았을 때는, 펠링을 떠난 지 9시간이 지난 후였다. 펠링에서 먹은 아침 식사 이후 먹은 거라곤, 림비 마을에서 까먹은 커피 맛 캔디 세 개와 산 위의 마을 사람들이 내어준 고구마 2개뿐이다. 허기에 달아오른 몸이 일단 밥부터 먹자고 나를 보챘다.

안 돼. 일단 호텔로 가서 이 저주받을 배낭 먼저 던져버려야 해. 목적지는 '팔라스 호텔.' 펠링 숙소의 게스트북에서 트레커들이 입이 닳도록 칭찬하던 산 위의 호텔이다. 궁전 호텔 정도로 번역하면 되나. 궁전 호텔이라니. 깔끔한 대리석 바닥으로 장식된 로비에, 양복을 입은 친절한 호텔리어가 우리를 맞는 장면이 떠올랐다.

뜨거운 샤워부터 하고, 하얗고 깨끗한 시트에 싸인 침대 위로 점프해야지. 인터넷도 될까. 시원한 맥주도 있을 거야. 산을 바라보는 전망 좋은 레스토랑에 가서 메뉴에 있는 음식을 모조리 시켜야지.

목적지는 팔라스 호텔... 더럽게 완벽한 하루

시킴 트레킹 중 마주한 마을. 팔라스 호텔은 카체페리 호수 옆으로 난 언덕길을 따라 20분을 더 가야 했다. 까짓 20분. 9시간도 걸었는데, 전망 좋고 깔끔한 호텔에서의 휴식을 위해서라면 내 20분 더 고생해 줄 수 있지.
 시킴 트레킹 중 마주한 마을. 팔라스 호텔은 카체페리 호수 옆으로 난 언덕길을 따라 20분을 더 가야 했다. 까짓 20분. 9시간도 걸었는데, 전망 좋고 깔끔한 호텔에서의 휴식을 위해서라면 내 20분 더 고생해 줄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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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라스 호텔은 카체페리 호수 옆으로 난 언덕길을 따라 20분을 더 가야 했다. 까짓 20분. 9시간도 걸었는데, 전망 좋고 깔끔한 호텔에서의 휴식을 위해서라면 내 20분 더 고생해 줄 수 있지. 언덕길은 '언덕'이라고 부르기엔 범상치 않아 보였다. 좁은 길을 따라 10분 정도 올랐을 땐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그 누가 이곳을 '언덕'이라고 이름 지었단 말인가. 이곳은 산이다. 그것도 아주 험상궂은 산. 정말이지 더는 갈 수 없다. 아무리 고지가 코앞이라지만, 나는 10초에 한 걸음을 겨우 내디딜 정도로 심하게 지쳐 있었다.

"팔라스 호텔이 어디죠?"

다 지쳐 쓰러질 것 같이 너덜너덜해진 우리 곁으로, 산 오르기 국가대표라도 되는 듯 번개처럼 달려오는 젊은 청년. 번개 같은 두 다리를 닮아 눈도 반짝, 입도 반짝인다.

"팔라스 호텔이요? 저 따라오세요. 제가 팔라스 아들이에요." 

아들? 팔라스 아들이라니? 궁전의 아들이라고? 호텔 주인 아들이라는 말인가. 다행히도, 산길은 계단 20개로 마무리되고 있었다. 대장정의 끝이다. 마지막 바위를 딛고 오른 순간. 규칙적으로 난 창문을 멋지게 단 커다랗고 웅장한 호텔이….

우리를 맞을 줄 알았건만 그게 아니었다. 30분도 더 걸려서야 마무리된 산행의 끝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담한 논밭 사이로 티베트 기도 깃발이 펄럭이는, 작고 아담한 초록색 마을이었다. 우리가 그토록 찾았던 팔라스 호텔은 Palace(궁전) 호텔이 아닌 'Pala's(팔라의)' 호텔이었다. 우리가 만난 젊은이는, 산 위에 작은 집에서 홈스테이를 운영하는 팔라의 아들이다.

케체페리 마을. 산행의 끝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담한 논밭 사이로 티베트 기도 깃발이 펄럭이는, 작고 아담한 초록색 마을이었다.
 케체페리 마을. 산행의 끝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담한 논밭 사이로 티베트 기도 깃발이 펄럭이는, 작고 아담한 초록색 마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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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위에 서 있는 듯한 작고 아름다운 마을. 마을 한쪽의 평화로운 곰파. 장난스러운 꼬마 동승들. 밥 짓는 굴뚝 위 연기를 따라 시선을 올리면 보이는 하얀 설산. 모든 것이 완벽하다. 나무를 엮어 벽을 세운 작은 집에서, 몸집이 작은 팔라 아저씨가 등장했다.

"티(Tea)?" 

팔라 아저씨가 밥통만 한 커다란 티 주전자와 잔 두 개를 가지고 나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에 각설탕 두 개를 퐁당 담갔다. 저녁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설산을 바라보며 뜨거운 차를 끊임없이 마셨다. 따뜻한 차가 혈관을 타고 내려가며, 9시간 동안 쌓인 피로를 조금씩 만져 주며 위로했다.

더럽게 힘들고, 더럽게 완벽한 하루다.

팔라스 홈스테이. 아기 염소 두 마리가 서로의 몸을 베고 누워있다.
 팔라스 홈스테이. 아기 염소 두 마리가 서로의 몸을 베고 누워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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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시킴 트레킹, #시킴, #트레킹, #케체페리, #펠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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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한 부부의 히말라야 여행,'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 인도편'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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