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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보고서에 과학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빨갱이! 종북!"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읽어보니 도대체 어느 부분이…."
"빨갱이! 종북!"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는 상위법을…."
"빨갱이! 종북!"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 청구는 조금 무리한 감이…."
"빨갱이! 종북! 북한으로 꺼져버려!"

이유는 필요 없다. 국가가 하는 일에 사사건건 의심하고 방해하는 '미친' 무리들이니까. 나는 국가의 안위에 노심초사하는 '애국' 세력이다. 그들은 나라를 흔들고 사회를 불안하게 만드는 이들일 뿐이다. 그러니 의견은 들어볼 필요가 없다. 그들은 '종북' 세력이다. 호시탐탐 북한에 우리나라를 바치려는 빨갱이다. 대화해 봐야 시간낭비다. 무조건 걷어차야 한다.

'종북'을 통한 타자화... 우리 그리고 '너'

한국사회에서 소수를 가장 빠르고 강력하게 제압하는 무기는 '종북' 딱지다. 주류에 속하지 않거나 정부 의견에 반대하면 어김없이 종북 딱지가 붙게 되고, 이 종북 세력을 비판하는 '우리'는 애국세력이 된다.
 한국사회에서 소수를 가장 빠르고 강력하게 제압하는 무기는 '종북' 딱지다. 주류에 속하지 않거나 정부 의견에 반대하면 어김없이 종북 딱지가 붙게 되고, 이 종북 세력을 비판하는 '우리'는 애국세력이 된다.
ⓒ 김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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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에서 소수를 가장 빠르고 강력하게 제압하는 무기는 '종북' 딱지다. 그게 설령 48%에 이르는 국민이라 할지라도, 주류에 속하지 않거나 정부 의견에 반대하면 어김없이 '종북' 딱지가 붙는다. 그렇게 일단 딱지가 붙으면 '우리'가 아니라 '너'가 된다. 완벽한 타자화. 그게 바로 '종북'이다. 마치 마술과 같다.

이렇게 딱지를 발급하는 분들은 모든 타협과 논쟁을 거부하면서 '민주주의'를 부르짖는다. 역설적이게도 북한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가장 민주주의적이지 않은 도구를 사용하는 셈이다. 이런 현상은 광복 후 60년 넘게 이어져왔다. 달라진 것은 '빨갱이'라는 다소 원색적인 표현 대신 뭔가 더 고상해 보이는 '종북'이란 단어가 널리 쓰인다는 사실뿐. 지긋지긋하다.

최근 통합진보당과 관련한 TV 토론 프로그램에서 토론자로 참석한 한 신문사의 논설위원은, 국제 사례를 드는 상대 패널을 향해 "가장 악랄한 독재국가와 마주한 한국의 특수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선민사상(?)을 들어 다원적 민주주의의 미덕을 깔아뭉개도 된다면,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다. '특수성'을 만들어내기는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 않다. 이를테면, 북한이 그들의 체제를 위협하는 남한정부가 들어섰다는 특수성을 들어 자신들의 세습 독재를 정당화해도 된다는 말인가?

역사적으로 많은 나라들이 이런 특수성을 이용했나 보다. '종북' 혹은 '빨갱이'란 말과 매우 흡사한 용례를 가진 단어를 알게 됐다. 이들 단어보다 더욱 광범위하게 쓰였고 역사도 오래됐단다. 알베르토 토스카노의 책 <광신>을 읽고서.

'광신'적인 방식으로 '광신'에 맞서기, 과연 옳을까
<광신 - 어느 저주받은 개념의 계보학> 겉표지.
 <광신 - 어느 저주받은 개념의 계보학> 겉표지.
ⓒ 후마니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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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신', 미친 믿음. 우리가 알베르토 토스카노의 <광신>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서양에서 '광신'이 뜻하는 의미를 명확히 알아둘 필요가 있다. 미칠 정도로 한 가지에 꽂혀있는 사람과의 대화는 거의 불가능하다. 광신자들은 정치적 합리성의 틀 바깥에 위치해 있다. 고집스럽고 구제불능이다. 이게 서양인들의 '광신'에 대한 인식이다.

따라서 '광신'이란 딱지는 상대방에 대한 일체의 타협을 거부해도 되는 일종의 절대무기가 됐다. 영화 <반지의 제왕> 골룸에게 절대반지가 있다면, 우리에겐 '광신'이 있다! 토론·타협·관용·이해·민주주의의 그 모든 미덕이 사라진다. 왜? 그들은 악마니까. 타도할 대상이지, 대화상대가 아니었다.

책을 옮긴 문강형준 평론가의 지적대로, 서양의 '광신'이란 단어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사회의 '빨갱이' 혹은 '종북' 정도다. '광신' 하면 음산한 사이비 종교 정도가 떠오르는 한국에서는, 차라리 지금의 '종북'이라 생각하면 거의 들어맞을 게다. 다른 문화권에서 이정도로 이해가 빠를 수 있다는 게 신통할 따름이지만.

저자는 <광신>을 쓰는 것이 '역사 없는 것에 대한 역사를 쓰는 것'이라 자평했다. 역사적으로 '광신'에 대한 담론은 하나 같이 그 대상을 비난할 뿐만 아니라, 일종의 병리 현상으로만 치부해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존재에게 역사를 부여해주는 것도 사치다. 그렇게 '광신'은 역사 속에 잠들어 있었다.

그러나 무작정 '광신'을 재단하고 대하는 태도가 옳았던 걸까. 저자는 칸트의 문장에 주목했다. 칸트는 '광신'을 "종교적 편협함에 바탕을 둔 망상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오만하게 초월하면서 이성의 힘을 남용하는 것"이라 했다. 그러니까 광신이라는 질병을 규정하는 것은 편협성과 특수성이 아니라 보편성의 과도함이다.

'광신'에 대한 수많은 글들이 이들의 잔인함, 불관용, 편집광적 모습을 분류하고 묘사하는 방대한 일람표에 반복적으로 기대고 있지만, 이들의 어떤 변치 않는 핵심을 분석하거나 정의하는 글들은 거의 없다.(본문 36쪽)

도대체 누가 천편일률적인 고집불통인가?

'광신'이 답은 아니나 봉쇄는 위험하다

그렇다고 오해는 말자. <광신>은 주장 자체를 옹호하지 않는다. 주장과 표현을 원천봉쇄하는 세태에 대한 우려를 표할 뿐이다. '광신'이란 딱지를 수단 삼아, 보편적 평등을 꾀하고, 억압받는 자들의 연대를 통해 해방적 정치의 전망을 열 수 있는 가능성을 애초에 틀어막는 현상이 문제란 것이다. 이는 책을 이끄는 핵심 동력이다.

다시 말해, '광신'이란 딱지를 붙이는 행위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 그런 딱지가 붙은 파시즘이나 테러리즘을 포함한 극우적이고 근본주의적인 모든 운동이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에게 '북한'으로 상징되는 지극히 퇴행적인 체제가 이 시대의 과제를 해결하고 미래를 열어주는 대안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통합진보당의 현실인식과 정치목표에 완벽히 찬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과 표현에 제약을 가하는 것엔 단호히 반대한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고 훌륭한 민주 시민들이 존재하는 한, 그 정도의 '불온함'은 공개적인 정치의 장에서 안고 갈 수 있지 않을까. 바로 그 점이 북한과 다른, 우리가 갖는 우월성이다. 이를 왜 스스로 포기하려 하는가.

정말로 폭력을 통해 국가를 전복하려 했다면 이는 당연히 막아야 할 일이고, 벌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쪼잔한' 이유를 들어 당 자체를 해산시키는 행동은 위험해 보인다. 시기도, 수단도, 근거도 수긍이 가지 않는다. 정당에 대한 부당한 탄압은 대의민주제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다. 신중하게 생각하자. 

'광신' 없이 우리는 어떤 미래를 사유할 수 있을까

자유주의가 갖는 웃기는 사실이 있다. 하층계급과 유색인종을 타자화하면서 등장한 자유주의가 그나마 보편적 인권을 옹호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들이 그토록 금기시했던 '광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광신자'로 치부됐던 이들의 노력으로 절대왕정은 붕괴했고, 여성은 참정권을 갖게 됐으며, 노예는 해방됐다.

광신적 동력은 기존의 질서들과 투쟁한다. 그 과정에서, 광신을 그토록 금기시하는 자유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마저도 자신의 지평을 확장하거나 반성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광신을 무작정 일종의 병으로 낙인찍는 담론의 이면을 의심하기, 동시에 광신에 담긴 본질적인 정치적 차원들을 새롭게 되살리기. 이것이 '역사 없는 것들의 역사'를 한 권의 책에 담으면서 토스카노가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다.

'미친 믿음'에 대한 전면전이 은폐하는 것은 정의로운 '우리'가 저지르는 또 다른 대량 학살만이 아니다. 반광신이라는 시대정신 속에서 사라지는 더 중요한 것은 '급진적이고 보편적이며 근본적인 정치적 기획'의 가능성 자체다. 현재의 질서를 거스르려는, 지금의 시간을 단절하려는 정치적 기획이 모조리 '광신'으로 취급되어 저주받을 때, 우리는 과연 어떤 미래를 '사유'할 수 있을까?(<광신> '옮긴이의 후기'에서)

딱 두 가지의 경우만 생각하자. 기존의 질서를 넘어서려는 모든 급진적 시도에 '광신'이라는 딱지를 붙일 때, 그리고 그 딱지를 성찰 없이 받아들여 '광신자'들을 몰아내면서도 막상 그 시도를 만들어낸 원인에 대면하기는 거부할 때. 그때 사회는 자신의 모순을 극복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역량을 상실하게 된다.

무엇이 두려워 재갈을 물리는가. <광신>을 읽은 후, 더욱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다. 정말로 나라를 사랑한다면 그런 걱정일랑 접어두시라.

덧붙이는 글 | <광신>, 알베르토 토스카노 지음, 문강형준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 2013.10, 2만2천원



광신 - 어느 저주받은 개념의 계보학

알베르토 토스카노 지음, 문강형준 옮김, 후마니타스(2013)


태그:#광신, #알베르토 토스카노, #후마니타스, #문강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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